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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39화 (39/176)

39.

잠자리에 들 적에는 한껏 열을 낸 몸이 녹진하여 구름 위에 누운 듯 포근하게 잠이 들었는데, 깨었을 적에는 그렇지 않았다. 너무 신나게 뛰어논 모양인지 전신이 얼얼했다.

아직 덜 자란 몸을 너무 우습게 보았던 것이 분명했다. 무리하게 사용한 근맥의 일부가 상하여 퉁퉁 부어오른 것이 느껴져 침상에 대자로 누워 헛웃음을 터트렸다.

제가 정말로 열세 살 난 어린 아해라도 된 양 승리 한 번에 들떠서 오후 내도록 헤실거리고 다닌 꼴을 생각하니 기가 막히고 민망했다. 갑작스럽게 침상 밖으로 나돌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높은 침상에서 기듯이 아래로 내려와, 카펫 위에서 익숙하게 가부좌를 틀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저 또한 무인인 것을 이렇게 다시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과 겨루어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제일의 꿈으로 삼아 평생을 살아왔으면서 들끓는 욕심을 전생에 다 털어내었다 착각하였다. 이기고 싶어 겨루는 것이 아니라 지키기 위해 겨루는 것이라 저를 속였다.

손에 검 쥔 무인이라면 모두 다 떠날 수 없는 길이거늘. 에드윈의 눈에 서렸던 호승심이 제게는 없었을까.

제 어깨 위에 올려져 있다 생각했던 것들을 내려놓고 나니 다시 날뛰고 싶어졌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남 탓만 한 것이 우습고 부끄러웠다.

운기조식을 마치고 식사하러 내려가니 익숙한 낯들이 함께 공부하기 위해 왔다며 제 뒤를 따랐다.

공부는 뒷전으로 하고 떠들게 될 것이 안 보아도 눈에 선하여 금요일에 야영 수업 동무들과 함께 찾았던 도서관 소회의실로 들어섰다.

쉐이든과 벤자민은 물론이고, 마리앤과 제니도 저 공부할 것을 들고 쫓아 들어왔다.

그렇게 다섯이 둘러앉아 각기 공부할 것을 펼쳐두고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시험공부보다 다른 것에 관심이 많은 이가 셋이나 붙어 있으니 공부가 될 리 없었다. 펼쳐놓은 노트에 무엇인가 끄적거리는 시늉을 하던 마리앤이 불쑥 묻는다.

“그럼 화해한 거예요? 에드윈 키아드리스랑?”

“음.”

“맞다, 아니다, 제대로 얘기해 봐요.”

“화해란 말은 적당치 않습니다. 대련에서 이긴 대가로 다른 마법부 학생과 대화하는 것을 막지 않겠다 하였으나, 그가 나에게 잘못한 것은 결국 사과하지 않았으니까요.”

“어어? ⋯그, 야 그렇긴 한데요.”

“내 편, 내 적이 있으면, 내 편도 적도 아닌 이도 있는 법이니까⋯. 뭐 대충 서로 신경 쓰지 않는 사이 정도는 되는 것 같습니다. 이제 날 해칠 생각은 없는 것처럼 보이니 됐습니다.”

중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마교를 제하더라도, 의와 협을 기조로 내세운 정파와 폭급하여 앞뒤 안 가리는 사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정파라는 이름을 내세우며 무림맹의 비호 아래에 분명히 들어갈 수 있을 법한 거대한 세가 몇을 제외한 수많은 중소 문파들이 정사지간(*정파와 사파의 사이)에 서서 제 앞가림하기에 급급하였다.

무림맹은 멀고, 당장 제 동네에 박혀있는 사파의 고수를 이겨낼 힘이 없으면 제 뜻에 반하더라도 머리를 숙이고야 마는 것이 인간이었다. 대표적으로 하오문이 그러했다.

하오문은 낮은 신분의 이들이 모인 정보조직이다.

어릴 적부터 웃음 파는 일을 보고 자란 기녀들과 다탁을 닦고 객잔을 청소하는 점소이들이 그 뜻을 모아, 술을 마시러 온 작자들이 흘려대는 정보를 조각보마냥 누덕누덕 기워 술과 함께 팔았다.

그들이 흘린 조각보는 어느 때에는 무림맹의 손에, 어느 때에는 흑사문의 손에 들어가 무기가 되었고 방패가 되었다.

웃음과 술을 파는 이들은 필연적으로 난폭한 이들과 가까웠다. 당장에 유흥과 술을 즐기러 오는 이들은 정파의 말쑥한 고인들보다야 사파의 방탕한 개자식들이 많은 탓이었다.

주먹과 돈으로 어르고 협박하니 아무리 바르고 싶어도 바를 수 없었다. 그렇기에 무림맹에서는 필요하면 그들의 손을 잡았고, 필요하지 않으면 그들을 가장 먼저 버렸다.

남궁도 하오문을 대할 때 그렇게 했다.

하오문의 인물들이 종종 정파의 위선을 욕하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가까이 곁에 두었다가 점소이의 손에 산공독(*내공을 흩어 내는 독)을 몇 번 먹고 나면 제 목숨 지키기 위해서라도 조심하게 되었다.

그들의 서툰 손이 다른 누구를 언제 그들의 지옥으로 끌어내릴지 모르기 때문에.

나는 에드윈 키아드리스와 나의 관계를 그렇게 정의하였다.

정도 사도 아닌 것이 굳이 내 곁에 가까이 붙여 둘 필요는 없는 놈이었다. 필요한 일이 있을 적에나 마주하여 이런저런 것을 묻거나 청하면 그만이었다.

형에 대한 열등감이나 나름의 불우한 가정사 따위는 중원의 슬픔과 비교하면 간지럽지도 않은 것들이라 크게 딱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 그, 그럼 왜 그렇게 아련하게 쳐다봤었어요⋯?”

“예? 그런 적 없다니까요.”

“진짜? 그냥 대련 한 번 하고 끝이에요?”

“아. 그건 아니고.”

“그건 또 아니고?”

“다음에 한 번 더 대련하기로 했습니다. 대련 자체는 꽤 재미있었으니까.”

“그런데 화해는 안 했다고요?”

“그야⋯.”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에드윈 키아드리스는 내 친우였던 모용 공자와 차림새와 행실이 형제마냥 똑 닮았다. 그럼에도 그가 금방 울타리 안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말로 쉬이 풀어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손에 쥔 펜을 빙글빙글 돌렸다.

“⋯교수님들이 없으면 대련할 수가 없으니까⋯? 굳이 친해질 필요가⋯ 없다고⋯ 해야 하나.”

“예에?”

“예를 들어⋯. 벤자민 클라우디안 영식이랑은 샌슨 교수가 없어도 언제든 대련할 수 있잖습니까. 서로의 경지도 비슷하고, 서로의 선도 알고, 어느 정도 엇비슷한 무기를 사용하고 있으니⋯. 약간 다치는 것 정도야 서로 감수할 수 있고, 어느 정도 상해를 조절할 수도 있고. 그러다 보면 친해졌다는 기분이 드는데.”

“그렇긴 하죠.”

어쩐지 뿌듯한 기색으로 벤자민이 끼어들어 한마디 하기에, 고개를 주억였다.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에드윈은⋯. 그 공격하는 모양새나 대처하는 방법 같은 게, 사이에 교수님들을 끼고 있지 않으면 대련이 불가능한 상대라는 걸 알았거든요. 대련 전에는 저도 친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컨트롤이 안 돼서요?”

“그렇게도 말할 수 있겠네요. 아직 낯선 힘이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잘못했다가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뒤집히게 생겼는데, 제 한 몸 빼내는 거야 할 수 있겠지만 주변이 쑥대밭이 되는 건 막을 길이 없잖습니까.”

“아니, 그건 그런데⋯.”

“실수로 그 녀석 팔이라도 하나 자르면 더 큰 일이고. 그러니 대련을 하려면 아예 날을 잡고 사이에 사람을 끼워야 하는데⋯. 그건 그냥 일정을 잡으면 되는 거라, 굳이 그와 친해지거나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 마법 빼고 사람 자체에 대해서는?”

“음⋯, 성격 나쁜 놈이랑 부러 가까이 지내서 뭐 합니까?”

“⋯아⋯.”

“그분도 저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았습니다만.”

“으응⋯.”

어쩐지 처연한 눈이 된 마리앤이 퍽 소리 나게 책을 펼치며 말했다.

“우리 공부나 하죠.”

옆에서 아무 말도 않고 함께 이야기를 듣던 제니가 방긋 웃으며 마리앤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리앤이 울상을 하고 2 실버를 제니의 손에 쥐여 주었다.

둘이 나를 두고 무언가 내기라도 했던 것인가 생각하니 헛웃음이 나왔지만, 나 또한 내기를 걸고 대련했던 터라 터부시할 일은 아니라 마음을 고쳐먹었다.

다만 아직 삼류에서 이류 사이의 수준을 가지고 있는 쉐이든이 심각한 기색으로 수련 일정을 더 늘리고 싶다 이야기하기에, 꾸준히 수신(*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닦아 수양하는 일)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잘 생각하였다 대꾸하며 크게 칭찬하였다.

* * *

시험이 끝났다.

시험 기간 내내 사는 것이 사는 것 같지가 않았다. 입 안에 음식물을 넣고 씹어 삼키면서도 낯선 이름자를 웅얼거렸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필승비법 어쩌구 하며 데미안과 제니가 추천해 준 대로 쪽지를 읽고 누웠다.

그나마 매일 새벽마다 운기조식을 하고 몸을 연마하는 일을 잊지 않았고, 오전 시간을 기초 검술과 고급 검술 시간으로 보내 겉보기로는 멀쩡할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 홀로 검을 그을 때는 상념에 젖어 집중하지 못하는 일이 잦았으나, 화경의 무인과 고절한 경지에 대해 논할 때는 세상 모든 시름이 잊혀 마음을 다스리기에 좋았다.

시험 성적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니, 썩 괜찮았다.

마법과 수식 원리 기초 수업에서는 아주 간신히 70% 이상을 맞춰 기본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교양 세계사 수업은 중간에서 약간 상위권인 성적을 받았는데, 빈칸 채우기는 성공하였으나 다섯의 서술형 문제에서 두 문제를 틀린 탓이었다.

제국의 계보야 언제나 그러했듯 두세 문제 정도를 틀렸고, 수렵과 야영 수업의 대체 과제는 그 내용과 질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아슬아슬하게 전날 완성하여 제출했다.

마나와 오러 수업은 마리앤과 쉐이든의 도움을 받아 기본 답안을 완성한 덕분에 달달 외워 적당한 점수를 받아내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런 일을 앞으로 몇 차례나 반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찔하였으나, 지금 당장은 마냥 신이 나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금요일 오전까지 시험이 있는 데미안의 일정이 끝나면 몇을 더하여 친한 동무들끼리 함께 놀러 가자 하는 것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리고 금요일 아침, 빨간 표식이 붙은 편지를 받았다.

깜짝 놀라 열어 보니 험한 소식은 아니었다.

두 달을 꼬박 채워 열심히 공부하였는데도 아직도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없다는 사실에 억울하고 분하여 미하엘이 엉엉 울고야 말았다는 소식이었다.

주말을 기해 에른하르트 소백작가 혈족들이 수도에 올라올 것인데, 잠시간이라도 얼굴을 보자 하는 아비의 편지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편지는 며칠 전에 보낸 것이었으나 이미 출발했을 것임이 분명하여, 미리 약속해 두었던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가족을 만나기로 하였다.

쉐이든의 안내로 학생들이 밤에 돌아다니다가 변고를 당하지 않도록 신경 쓰는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카데미에 와 처음으로 외박 신청서를 작성하였다.

편지에 따르면 이미 금요일 오전 중에는 아카데미에 도착했어야 했을 터인데, 연락이 없는 것이 신경 쓰여 조금 일찍 정문으로 나서 기웃거렸다.

부러 사복이 아니라 교복을 챙겨 입은 채였다.

내 교복 입은 모습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하엘이 어찌 반응할지가 궁금하여 가슴이 술렁였다. 어찌할 줄을 몰라 몇 번이고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러다가 익숙한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가 코앞에 도착했을 적에, 나는 마차 문이 열리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달려들고 말았다.

문을 벌컥 열어젖히니 큰 눈을 동그랗게 뜬 어린 아해가 저 안아 줄 것을 알고 두 팔을 짝 벌렸다. 나는 숨도 고르지 않고 미하엘의 뜨끈하고 작은 몸을 꽉 끌어안았다.

중단전이 빠듯하게 벅차 충만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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