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기가 막힌 술수였다. 마나를 이렇게 사용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하였다. 방어 술식 실드를 흉내 내어 전개한 속박의 술식은 그 생김만 실드와 같고 찌르는 감각이 전혀 달라 끈적하였다.
붙잡혀 공중에 매달린 채로 발끝이 들렸다.
검으로 속박을 베어내려 하였으나 쉽지 않았다. 얼굴에 피가 몰리고,
컥, 숨이 가빠질 즈음 갑작스레 주문이 풀린다.
중심을 잃지 않고 날렵하게 바닥에 내려앉았다. 헐떡이는 숨이 잦아들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머리를 양옆으로 잘게 털었다. 강하게 목이 졸린 탓에 목 안쪽이 따끔거렸다.
“에드윈 키아드리스, 일 승. 해설 없이, 1분 대기 후 바로 경기 재개.”
묵묵한 판정이 따랐다. 고개를 들어 살피자 이쪽을 보는 에드윈 키아드리스의 낯빛도 창백하였다. 마나를 많이 사용하여 서클의 통로가 불안정해지는 마나 탈진 현상이 일어날 때 저런 낯짝을 한다고 배웠다.
기진하게 만들어 이길 생각은 아니었지만, 수 싸움에서 져서 패한 터라 면이 서지 않았다.
일어서서 우수에 검을 고쳐 쥐었다.
온몸이 저릿하게 달았다. 내가 선공하더라도 상대를 잡아채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마법을 난사하더라도 나를 잡을 수 없다는 걸 상대도 알아챘다.
더욱 넓게 보고, 더욱 깊게 알아야 했다.
첫 번의 승부에서는 그가 쏘아내는 마법이 완성되기를 모두 기다렸지만, 두 번째 대련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마나가 모이는 장소마다 검신을 세워 그 핵을 갈랐다.
내 수작을 알아챈 그가 높은 곳에, 혹은 아주 낮은 곳에, 또는 아주 많은 수를 한 번에 두려 하였으나 모두 베었다. 넓은 공간의 끝과 끝에서부터 내달렸고, 위와 아래를 차지하였다.
이 땅에 와 이렇게 안력을 한계까지 사용한 것은 처음이다. 내 눈에 핏발이 선 것은 보지 않아도 알았다.
내가 벤 것은 얼음이고, 불이고, 바람이다. 나는 그 술식이 덧그려지는 방식을 알았다. 종잇장 한 장 위에 올라와 앉아 있던 술식들이 마나를 치맛자락처럼 휘감고 저희들끼리 노래하며 섞여 드는 것을 알았다.
멀어져야 하는 것이 가까워지고, 가까워야 하는 것이 멀어지면 그 정합의 어긋난 구석이 힘이 되는 것을 알았다.
컥, 그가 얕게 기침하는 소리를 들었다.
멈추지 않고 베고, 또 베었다. 그의 몸을 한 바퀴 휘감은 실드가 어느 순간 칭, 약한 소리를 내며 깨어진 순간에 몸을 쏘았다.
천풍의 길이고, 하늘의 길이다. 세 걸음에 닿은 길에 허리를 좌에서 우로 크게 돌렸다.
그대로 손에 든 검을 휘둘러 내려친다. 아래에서 위로 올려 긋는 순간 상대의 목이 날아가는 것이 보이는 듯하였다.
“ㅡ미카엘 에른하르트, 일 승.”
이번에는 곧장 대련 재개 신호가 떨어지지 않았다. 숨을 시근대며 앞을 살핀다.
내 검의 날카로운 날이 얇고 흰 목에 닿아 있었다. 마엘로 샌슨의 오러로 단단히 묶인 채였다.
파리한 얼굴을 한 소년이 눈에 힘을 단단히 주고 나를 노려보았다. 그 낯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오기, 분노, 흥분⋯. 싸우는 이의 눈이다.
그의 입술 옆으로 핏물이 흐르는 것도 보았다. 연이어 마법식이 깨어져 서클에 무리가 간 모양이지. 나 또한 숨을 돌리기 위해 애를 썼으나, 어깨가 얕게 들썩거리는 것을 막아내지 못했다. 내 숨소리가 내 귀에 들렸다. 땀으로 온몸이 젖어 있었다.
샌슨이 묶었던 것을 풀어 주어 검을 거두었다. 다시 두 걸음 물러선다. 사방이 조용하였다.
“내상을 입으신 것 같은데. 쉬었다 가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에드윈은 대꾸 없이 핏물을 소매로 닦아내고는, 왼손에 스태프를 쥐어 바로 세웠다.
소년의 눈에 스민 것은 더 이상 분노 따위가 아니었다. 호승심이 그득히 배인 눈을 마주하며 나 또한 마음을 가다듬었다.
하늘에서 땅을 잇는 것만 같은 그 동작 뒤에 어떤 것이 뒤따를지 나는 알지 못한다. 경계하며 검을 빗겨 세웠다.
손등 위에 손바닥을 겹쳐 쥔 그가 스태프를 크고 둥글게 한 바퀴 돌렸을 때, 두 호흡 만에 하늘과 땅이 뒤집어진다.
기가 막힌 술수였다.
나는 내 머리 위를 덮쳐오는 타일에서 무게가 아닌 마나를 느꼈다. 환영이었다. 안법을 깨치지 않았다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터였다. 동으로 세 방향, 남으로 두 방향을 베었다.
또다시 기침 소리가 들렸고, 이켠으로 무언가 쏘아졌다. 검으로 그대로 받아쳤다. 이번엔 무게가 묵직하게 실렸다. 돌이다. 화염 안에 돌덩이를 섞어 던졌다. 쳐낸 그대로 천장에 꽂혀 콰득 소리를 내는 것을 보고 또 웃었다.
즐겁다.
베고 또 베어도 끝없이 몰려오는 마인들 사이에서 죽은 것이 내 삶의 마지막인 것을 섧게 여겼다. 한 합에 목을 베어내지 않으면 몸통을 부딪쳐 다리를 걸고 발목을 물어뜯는 처절한 죽음들 사이에서 죽는 것이 내 무(武)의 끝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지금 나는 살아, 불을 베고 물을 베었다. 검이 아닌 것과 맞부딪친 검에서 맑은 소리가 나거나 탁한 소리가 울거나 하는 동안 손끝이 저렸다.
뻗어야 할 곳을 찾아 손을 뻗었다. 디딜 곳을 찾아 발을 디뎠다. 그럼에도 뻗은 손은 허공을 가르고, 디딘 땅은 무너져내린다. 중원의 그 어떤 진법도 따라잡지 못할 기이한 술법이었으나 활로가 보였다. 내가 아는 수식 중 그 모양새가 가장 익숙한 것을 찾았다.
모든 마법의 끝에 닿는, 가장 중요하여 첫째로 내세우는 술식.
알파 술식의 둥글고 휜 조형을 찾아 검을 찌른다. 정화 술식의 중간을 꿰뚫던 적금의 마력을 떠올렸다. 술식의 중간부 얽히기 시작하는 점을 베었다. 틈을 벌릴수록 길이 열렸다.
길을 따라 걸었다.
발아래가 가볍고 어깨 위가 무겁다. 내 몸을 짓누르는 힘이 어떤 수를 써서 자아낸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어릴 적부터 철을 짊어지고 연무장을 달렸던 나다. 이겨낼 수 있었다.
절진의 생문(生門)을 열고 나가 뻗은 내 검이 상대의 천돌혈(*목젖)에 닿는다.
“⋯미카엘 에른하르트, 이 승.”
에드윈 키아드리스는 스태프를 짚고 기대어 선 채로 입을 열지 않았다. 내 입가에 스며들었던 미소도 찬찬히 잦아들었다.
대련의 끝은 공경이다. 그는 훌륭히 싸웠고, 나 또한 그러했다. 이번의 승리는 내 검식과 실력이 더 뛰어나서가 아니라 단순히 체력과 내공의 안배에 있어 유리한 조건을 가져왔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의 뱃속에 담긴 정제된 내공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피의 전투를 이어간 수십 년의 경험이 없었더라면, 이 싸움은 내가 졌다.
두 교수는 우리가 방금의 대련에서 무언가 얻어갈 수 있도록,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주었다. 나는 검을 거두었고 키아드리스 역시 스태프를 내렸다.
차분한 시선이 맞닿아 있기를 한참, 그가 입을 열었다.
“아는 선배 하나를 소개해 주지.”
“감사합니다.”
“⋯어떻게 그 사이에서 알파 수식만 골라 깨트릴 수 있었지?”
“배워서 알았습니다. 그, 이번 중간고사 쪽지 시험 유인물 첫 장 제일 윗줄에 있어서.”
“⋯.”
에드윈의 표정보다도 앤젤라 스팅 교수의 표정이 더 미묘했다.
잠시 그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던 샌슨 교수가, 앤젤라 교수의 팔꿈치를 툭 치며 저도 그 유인물 한 장 받아도 되겠냐 물었다.
교수들끼리 무슨 말을 하든 간에 나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이번엔 마주 잡는 손이 있었다. 굳게 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가 떨어지는 손이 기묘했다.
중원에서는 볼 수 없던 인사였다. 이제 나는 상대의 맥을 당장에 잡아챌 수 있는 동작이 표하는 신뢰와 인정을 알았다.
말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슬쩍 다가서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너무 어려워서 다음 학기부터는 마법 수업 안 들으려고요.”
“⋯다음에 한 번 더 싸우는 건 어때?”
“그건 좋습니다.”
그제야 녀석이 픽 웃었다. 그제야 대련이 끝났음을 실감했다.
대련하는 내내 그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기에 다들 조용히 관람한 줄로만 알았는데, 앤젤라 스팅 교수가 방음막을 쳤던 것임을 후에 알았다.
방어진을 벗어나자 소란스러운 검술부 학생들이 내 주위를 둘러쌌다.
그들은 아예 나를 들어다 헹가래를 치고 싶은 모양새였으나, 예의가 아니라며 마엘로 샌슨 교수가 애써 말렸다.
검술부 학생들 사이에서 샌슨 교수가 초식과 초식 사이의 전개나, 마법 술식을 깨트리기 위해 사용한 방법 따위를 하나하나 해설해 주는 것을 들었다.
자꾸만 웬 손이 머리를 헤집어 놔, 땀에 젖은 머리칼이 삐죽삐죽 서는 것이 싫어 몸을 뒤로 빼냈다.
에드윈 키아드리스 또한 마법부 학생들 사이로 스며들었다.
내가 보기에도 그 공부가 얕지 않다고 느꼈으나 마법부 학생들이 보기에는 어마어마했던 모양이다.
어떻게 아이스 스피어 술식을 1.2초 만에 열다섯 번 구현할 수 있느냐, 접착 스킬을 실드 모양으로 구현하기 위해서 환상 마법을 덧씌운 것이냐, 아니면 실체 구현을 한 것이냐, 이 술식들은 미리 연습한 것이냐 혹은 그 자리에서 고안한 것이냐 하는 등의 이야기를 한참 떠들어대는 것을 엿들었다.
그 모습을 기웃대고 있으니 더글라스 머스탱 교수가 나를 어딘가로 이끌었다. 거절하지 않고 순순히 낯설고 늙은 마법사 무리들 사이로 섞여 들었다.
예의 바른 모습으로 꾸벅꾸벅 인사하여 어린 척을 하였다. 그들은 내가 알 수 없는 언어로 이야기하였다⋯.
아니, 분명 시어런의 말인데도 시어런의 말인 것 같지 않았다. 그들이 내게 질문을 건넬 적마다 초식을 전개하기 전에 무의식중에 어떤 생각을 했었던가를 곰곰이 생각하여 답하기를 몇 차례 반복하였다.
이때 처음 명함이라는 것을 받았는데, 네모진 것에 이름자와 연락할 수 있는 주소 따위가 적혀 있는 것이 퍽 정갈하고 괜찮아 보였다.
사업하는 이라면 누구나 하나씩 가지고 있는 것이라 하여, 나도 졸업하게 되면 이런 것을 가져야겠다 생각했다.
이 마법사의 앞에서 저 마법사의 앞으로, 저 마법사의 앞에서 또 다른 마법사의 앞으로 불려가 이런저런 시범을 보이는 것을 마엘로 샌슨 교수가 건져 주었다.
그들의 명함을 모조리 받았기에 아쉬울 게 없어 순순히 따랐다.
겨우 반 갑자 모아 둔 내공을 쪽쪽 뽑아 쓴 탓에 온몸에 기운이 없었다. 샌슨의 얼굴을 보고서야 다시금 실실 웃음이 나왔다.
“좋냐.”
“예, 재밌네요. 생각보다 더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너도 참 난 놈이다, 난 놈이야.”
“자만하진 않습니다. 이번엔 운이 좋았어요. 키아드리스 영식의 술식 전개 속도가 조금만 더 빨랐거나 그의 체력이 조금만 더 좋았어도 할 수 없는 짓이었다는 걸 저도 압니다.”
“에드윈 키아드리스는 술식 전개 속도에 있어서는 천재적이야. 체력은⋯ 책상물림 마법사의 고질적인 병이니 어쩔 수 없다고 치더라도. 충분히 잘했다, 미카엘 에른하르트.”
“⋯예.”
화경의 무인에게 받는 칭찬은 언제나 달았다.
나는 대련 중에 있었던 몇 가지 상황에서 창천무애검의 검식이 아니라 뒤이어 배운 검식 중 몇을 사용했으면 어떠했을지를 물었다. 다급한 상황이 되었을 적에 자연히 쓰던 대로 몸이 움직인 탓에 펼쳐보고 싶은 검식을 모조리 펼쳐내지 못한 것이 뒤늦게 아쉬웠다.
자세한 것은 고급 검술 시간에 이야기하도록 하자 약속하며 자리를 파했다.
이날, 저녁 식사 때에는 축하하겠다며 모인 고급 검술 수업의 선배와 친우들로 일학년 남자 기숙사 식당이 온통 북적북적하였다.
선배 중 누군가가 축하할 때 마시는 음료라며 예쁘장한 병을 꺼내왔다.
한 모금 마셔보니 달달하면서도 쌉싸래한 것이 신기한 맛이었다. 중원에서 맛본 적 없는 음료라 거푸 입맛을 다시다가 물어보니 포도즙에 계피를 더해 몇 가지 향신료를 잘 섞어 끓인 뒤, 차게 식힌 시어런 전통 음료라 했다.
그 맛이 달고 묵직하여 입에 잘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