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토요일 아침에는 이른 시간부터 기운이 좋았다.
오늘은 하루 종일 대련을 하고 그것을 복기할 생각으로 미진한 공부를 다음 날로 미뤄두었기에, 오전 중에는 간단히 체력 단련을 하고 운기조식하는 시간을 오래 가졌다.
이야기를 들은 쉐이든도 대련에 참관하고 싶어 하였으나, 아직 그의 안법이 뛰어나지 않아 대련을 보아도 이해하지 못할 것 같기에 시험공부나 하라 하였다.
또 토라진 녀석의 볼이 빵빵하게 부풀었으나 떼를 쓰진 않아 다행이었다.
식사를 일찍 마치고 정해진 시간보다 한 시간은 일찍 제1 강의실에 도착하였다.
더글라스 머스탱 교수가 끌고 온 마법사들이나, 고급 검술 수업을 함께 듣는 선배와 동무들이 가득할 것을 예상하였으나 의외로 까무잡잡한 로브를 폭닥하게 두른 젊고 어린 마법사들이 우글우글하였다.
옷차림을 보니 아카데미의 학생인 듯 했다.
슥 보아도 쉰 명은 족히 넘는 대인원이었다. 이모저모 살펴보았지만, 모두 다 낯선 얼굴이었다.
잠시 당황하던 중, 익숙한 보라색 단발머리를 발견하여 가까이 다가섰다. 간단한 눈 맞춤으로 인사를 생략하고 바로 물었다.
“마리앤. 이게 다 뭐예요?”
“어어⋯. 스팅 교수님께서 다신 없을 기회라고 해서, 3서클 이상의 마법부 학생들 중에 대결을 관람하고 싶은 사람의 목록을 받았는데⋯. 이렇게 됐어요. 혹시 불쾌한 건 아니죠?”
“아니, 그건 아닌데⋯. 저도 꽤 많이 불렀거든요.”
“예? 부르다뇨?”
“한⋯ 마흔 명은 더 올 것 같은데요.”
“으응. ⋯이전에 멱살 잡은 거 정말 미안했어요, 미카엘. 제가 마법 대 검술의 영향력을 너무 우습게 봤어요⋯.”
“이미 예전에 사과받았으니 됐습니다. 그나저나 마리앤도 3서클이었습니까?”
“저는 1서클 마스터. 2서클 초입인데 언니가 4서클이라서요. 교수님 졸라서 언니 손 잡고 같이 왔어요.”
근처에 서 있던 마법사 하나가 꾸벅 인사를 하기에 같이 고개를 까닥하였다. 마리앤보다 머리가 좀 더 길 뿐, 그녀와 꼭 닮은 언니라는 사람은 말을 걸지는 않았다.
마리앤 외의 다른 마법부 학생들이 혹여나 키아드리스에게 책잡힐까 봐 나와 가까이 서 있는 것도 겁을 내는 기색이기에, 다음에 이야기하자며 물러섰다.
대련 시간 삼십 분 전이 되자 기다리던 사람들이 모두 함께 등장하였다.
마엘로 샌슨 교수가 한 무리의 검술부 학생들과 함께 왔고, 더글라스 머스탱 교수는 나이 든 마법사 여덟을 거느리고 왔다.
앤젤라 스팅과 그녀의 뒤로 반걸음 거리를 두고 따라오는 에드윈 키아드리스까지 시야에 들어왔다.
에드윈은 대련을 구경하고자 우르르 찾아온 마법사들과 검사들을 보며 조금 질린 표정을 지었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미간을 콱 구겼다.
웃음이 새려는 것을 막고 가까이 다가서서 악수를 청했다. 녀석은 받아주지 않았다. 마냥 우스웠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태워버린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조용히 해.”
“보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힘들겠는데요.”
“조용히 하라고.”
“전 다치지 않게 해 드리겠습니다.”
“⋯.”
과연 도발한 보람이 있어, 소년의 희멀건 이마 위에 핏대가 서는 것이 보였다.
적절한 격장지계(*상대의 감정을 자극해 의도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계책)는 좀 더 실전 같은 대련을 꾸려나갈 수 있는 좋은 원동력이라고 생각해 흐뭇하였다.
저켠에서 기감을 돋워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검술부 동료들 몇이 저들끼리 입술을 꽉 깨물었다. 웃음을 참는 게 분명하였다.
앤젤라 스팅 교수가 마법부 제1강당의 두툼한 문 위에 손을 대고 술식을 덧그렸다.
보안 마법과 방어 마법이 몇 중으로 걸려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사실 나의 실력으로는 좀처럼 알아보지 못할 것이었다. 문이 열렸을 때 모두와 함께 따라 들어갔다.
한 사람의 마법사가 공격 마법을 연습하기 위한 공간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넓었다.
그 층고가 일반 건물의 삼 층 높이에 달하고, 너비는 백여 명을 수용하는 연무장과 같았다.
빙 둘러 반 층 높이의 단상이 있었는데, 그중 한 칸에 구경 온 사람들을 모조리 밀어 넣은 스팅 교수가 각 모서리의 마법진에 마나를 불어넣어 방어 술식을 전개하였다.
더글라스 머스탱 교수가 방어 술식 안쪽에서 검술부 학생과 마법부 학생들 사이에 참관하러 온 마법사들을 앉힌 뒤, 자리를 정돈하며 소란을 피우지 않을 것을 다짐받았다.
술식 정돈이 끝난 앤젤라 스팅 교수와 마엘로 샌슨 교수가 에드윈 키아드리스와 날 대련장 중간으로 이끌었다.
그 모든 일 처리가 막힘이 없이 깔끔하여 이런 일이 처음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 새삼스럽게 아카데미 교수진들에 대한 존경심이 치솟았다.
들뜨는 가슴을 가라앉히기 위해 두어 차례 심호흡했다.
“심판은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우리 둘이 본다. 불만 없겠지? 기본 골조는 검사들의 대련 때와 흡사하게 갈 거야. 서로를 향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공격을 하되, 우리가 보기에 큰 상해를 입힐 것 같으면 한 차례 대신 방어하겠다. 승패를 가리기 위해서 세 판을 진행할 거고, 삼 전 이 선승제로 갈 거야. 두 번을 이기면 완전히 승리하는 것으로 본다.”
“아카데미에서 연 대련이 아니라 학생들이 원하여 시작하게 된 대련이니만큼⋯ 정해진 상품은 따로 없어요⋯. 혹시 두 영식이 미리 정한 내기가 있다면 대련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합의를 끝내는 편이 좋겠어요⋯. 저 앤젤라 스팅이 내기의 공증인이 되어 줄 테니까요⋯.”
이런 이야기가 나올 것을 미리 알았는지 에드윈 키아드리스가 냉큼 입을 열었다.
“에른하르트 영식이 마법부 수업을 우습게 보는 일이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녀석이 숨긴 뜻을 알아챘다.
이 대련에서 진다면 사과하고 월요일마다 참석하는 마법과 수식 원리 기초 수업에 참여하지 말라는 소리나 진배없었다. 이번 중간고사 시험 문제를 받고 내심 많이 괴로웠던 터라 손해 볼 것은 없었으나 어쩐지 오기가 솟았다.
무엇을 대가로 내세울까 고민하다가 얌전히 대꾸했다.
“제가 이기면 마법부 친구를 사귀고 싶습니다. 키아드리스 선배보다 실력이 좋으신 분으로.”
“⋯.”
이번엔 격장지계를 쓴 것이 아니라 진심이었는데, 어쩐지 에드윈이 아까보다 더 화가 난 것만 같은 기색이라 입을 닫았다.
검술의 경지에 대해서야 알아도 서클의 경지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다. 내가 배운 마법부 수업은 수식의 기초였지 마법의 개념 원리가 아니었던 탓이다.
내가 실수했나 싶어 슬쩍 눈을 옆으로 굴리니, 입술을 꾹 깨문 샌슨 교수의 얼굴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웃음을 참는 표정이었다. 실수한 것이 분명해 곧장 사과했다.
“아, 죄송합니다. 선배보다 실력이 낮은 분이라도 괜찮습니다.”
“⋯그래.”
목 안쪽에서부터 억지로 끌어낸 듯 끓어오르는 대답이었다.
앤젤라 스팅 교수의 중재로 우리는 대련장에 둘이 마주 보고 섰다. 우리가 서로의 경지를 모르더라도 두 교수는 우리의 경지를 알고 있어 다행이었다.
에드윈과 내 사이에 3장(*9m)의 거리가 주어졌다. 내가 오 초식은 펼쳐야 에드윈에게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멀찍이서부터 이켠으로 마나가 울렁이며 끌려오는 것을 느낀다.
검을 빼 들었으나 달려들지는 않았다. 몸 앞에 검을 바로 세우고 호흡을 바로 했다. 주위에 가득한 시선을 잊었다.
나 또한 기감을 넓게 퍼뜨렸다.
선공하면 상대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였으나, 그러지 않았다. 상대의 목을 베어 무릎 꿇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알아채고 파훼하는 것. 혹은 그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잡아채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사나운 기운이 사방에 넘실거리는 동안에, 에드윈도 나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내 쪽으로 쏘아지는 것이 있으면 곧바로 쳐냈으련만.
멀찍이서 입술 달싹이는 것이야 눈으로 볼 수 있었지만 그가 무슨 말을 읊조리는 중인지 들리지는 않았다. 그때 갑자기,
등골을 타고 소름이 쫙 돋았다. 빠르게 우측 전방으로 피하며 한 바퀴 구른다.
차캉, 차캉, 차캉, 괴상한 소리가 뒤늦게 울렸다. 소리보다 빠르게 바닥을 꿰뚫은 것은 수십의 얼음창이었다. 그대로 곧장 일어서 바닥을 크게 박찼다.
이미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소년이 우장과 좌장을 합쳐 내 쪽으로 크게 휘둘렀다. 손아귀에 쥐어진 스태프가 그의 엄지에 걸려 떨어질 듯 위태로웠으나, 그것이 내뱉는 힘은 달랐다.
직선거리로 쏘아지는 불덩이를 몸을 틀어 피했다. 귓가와 뺨이 뜨끈하였다. 단단히 틀어쥔 검에 오러를 쏟아 하나를 막았다.
무게도 없고, 심지도 없는 불덩이는 가운데가 갈리자 양옆으로 사르르 흩어져 사라졌다. 녀석이 코앞에 보였다. 검식을 고를 새가 없었다. 몸을 왼쪽으로 틀었다가 우로 강하게 회전하며 검을 휘둘렀다.
막힐 수도 있을 것이라 여겼으나, 눈앞에서 녀석이 사라졌을 적에는 당혹했다. 높이 뛰었다. 천장을 등에 업고 내려다보니 내 등 뒤에 서서 스태프를 뻗었던 녀석이 이쪽을 올려다보는 것이 보였다.
그 얼굴을 향해 검기를 밀어냈다. 미숙한 오러는 활처럼 쏘아지는 대신 안개처럼 흩뿌려진다. 녀석이 그것을 피하여 몸을 뒤로 뺐다.
그 주문의 이름자를 알지 못하여도, 짧은 거리를 순식간에 이동하여 피하는 것임은 알았다. 이형환위(*시각으로 과정을 파악할 수 없도록 이동하는 신법)를 닮은 움직임은 과연 절정의 경지와 다름없다.
힘들이지 않아도 녀석이 갈 길을 자연히 알았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길을 따라 남서 방향으로 칠 보. 서북으로 삼. 아니, 사 보.
심장이 꽉 죄어오는 흥분에 웃음이 절로 났다. 자연히 떨어지는 속도에 내력을 실어 천근추(*기를 사용하여 몸무게를 무겁게 하는 무공)의 묘리를 담았다. 두 손으로 검병을 쥐었다. 머리 위에서부터 내리꽂았다.
우우우웅ㅡ!
쨍하고 부딪히는 소리도 아니고, 쾅 하고 터지는 소리도 아니다. 기와 기가 짓눌려 옅게 울리는 진동이 커다란 강당을 잔잔하게 울렸다.
검신과 스태프의 둥그런 끝이 맞닿아 있는 줄로만 알았으나, 나는 곧 내 검을 막은 것이 그의 스태프가 아니라 시어런의 온실을 닮은 둥그런 반구형 마나의 막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실드. 알고 있는 방어 술식이었다.
몸으로 겪어 본 일이 없기에 이토록 강력한 줄은 미처 몰랐으나.
두 기다란 것들을 사이에 두고 잠시 침묵했다. 녀석의 발치에서부터 번진 적금의 서클이 강당의 반을 덮고 있었다.
그 입술이 다시금 달싹이기 시작하는 것을 깨닫고 즉시 몸을 빼냈다. 발목을 잡아채러 올라오는 것을 피하여 달렸다. 녀석의 뒤를 잡으려는 수작이었다.
몇십 합이 숨 가쁘게 오가는 동안, 나는 그가 자신의 시야 안에 있는 대상에 한해서만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러나 그의 동작이 빠르고 방어를 위하여 펼치는 마법에 사각이 없어 공격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가까이에서, 또 멀리서.
나는 높이 뛰고 낮게 기었다. 크게 돌고 얕게 숨 쉬었다. 기척을 죽이고 빠르게 쏘았다. 뒤통수 어림에서 쏘아지는 얼음 창이, 내 머리 위에서부터 쏟아져 내리는 화염의 폭포가, 발목을 휘어잡는 덩쿨이, 갑작스러운 지진이, 손과 발을 묶어 늦추는 마력의 기운이 나를 살아 있게 했다.
그가 펼쳐낸 실드의 해법을 알았다. 술식과 술식이 맞닿는 어느 점을 검으로 깊게 찌르는 순간 나는 승리를 자신했던 표정을 지운다.
내가 찌른 실드가 그대로 허물어져 내 목을 졸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