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36화 (36/176)

36.

연금술과 함께하는 수렵과 야영 수업을 가르치는 세드릭 교수의 차례에는 도대체 무슨 시험을 어떤 식으로 낼까 싶어 긴장하였다.

그의 수업에서는 배운 것이 참 많았다.

다만 그 모든 것을 지나가는 어투로 툭툭, 불 피울 때는 이렇게 하여라, 어떤 풀을 꺾을 때는 무엇을 조심하라, 하고 필요할 때마다 알려주는 터라 필기하여 정리해 둔 것이 조금도 없었다.

학생들을 교실에 불러 모은 세드릭 교수는 언제나처럼 쾌활한 태도로 교탁 위에 팔꿈치를 대고 양손으로 턱을 괸 해괴한 몸동작을 한 채로 즐거이 말했다.

“자아, 우리 연금술과 함께하는 수렵과 야영의 중간고사는! 과제로 대체한다!”

과제라면 외워 쓰는 것이 아니니 시험보다는 나을 것이었다. 나는 작게 안도했다.

그러나 이제 그 과제의 주제가 궁금한 것이라, 아해들은 환호도 탄식도 없이 잠잠하였다.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아쉬워하며 몸을 바로 세운 교수가 칠판에 타닥타닥 판서하였다. 쓰인 글자를 눈으로 읽었다.

-첫 야영과 첫 실험에서 있었던 일과 느낀 점.

“사실 우리는 밖에서 하룻밤을 보낸 것도 아니고 몬스터나 야생 동물을 만나지도 않았으니까 그날의 수업을 야영이라고 여기지 않는 꼬마 친구들도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우리 중에는 분명 야외에서 모닥불을 피워 본 경험이 처음인 친구들도 있을 거야.”

여기저기서 수긍하는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작은 목소리로 네 하고 대답하였다.

“연금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의심이라면, 모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록이다.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때 어떤 식으로 해결했고, 어떤 감상을 가졌는지 꾸준히 기록하는 습관이 제일 중요해.”

세드릭이 칠판에 적은 글씨 중에서, ‘있었던 일’과 ‘느낀 점’에 크게 동그라미를 그었다.

“어떤 것에 중점을 두고 활동하였는지, 또 어떤 점에서 미흡했었는지 적은 그 모든 기록이 우리의 후인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의 일부가 되는 거라고. 자, 그런 고로! 피와 땀을 쏟아 열심히 작성해 오길 바란다. 다음 주 수업은 없고, 과제 제출은 다다음 주 이 시간까지.”

늘 장난스럽고 쾌활해 보였던 그가 하는 말들이 생각보다도 더 정론이었기 때문에, 나는 적잖이 감탄하였다.

문득 중원을 떠돌아다닐 적에는 기록에 신경을 써 본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궁정연이었을 적엔 이 땅에 어느 놈이 악적이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싶을 때마다 객잔에 가 죽엽청 한 잔 기울이며 세인들이 떠들어대는 소리를 엿듣고는 했다.

천하 사람들이 모두 입소문을 듣고 모였고, 입소문을 듣고 떠났다.

그러나 요즈음은,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도서관으로 향했다. ⋯좋은 일이었다.

세드릭 교수의 다음 말이 이어지기 전까지 나는 마냥 안온하였다.

“분량은, 최소 50페이지. 자세하게 쓸수록 더 좋은 점수를 줄 거고, 같은 팀 아이들과 상의해도 좋지만 느낀 점은 각각 달라야 할 거야. 똑같은 과제물을 냈다가는 재미없을 줄 알아. 아, 노트 줄 간격보다 글씨가 커도 낙제 점수야. 난 미리 경고했다?”

미친 소리였다.

종이를 철하는 것도 일일 테니 대략 얼개가 짜이면 지금 나누어주는 노트에 옮겨 적으라는 소리를 하며 세드릭 교수가 학생들에게 노트 한 권씩을 나눠 주었다.

펼쳐보니 줄눈의 간격이 촘촘하였고 짝수 장마다 우측 하단에 쪽수가 매겨져 있었다.

50페이지를 다 채우기는커녕 보고서의 얼개를 짜는 일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2주 만에 할 수 있는 과제가 맞기는 한 것인가 하여 어안이 벙벙하였다.

그렇게 여기는 것은 나 뿐만이 아닌 듯, 많은 학생들이 탄식과 야유를 하며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세드릭 교수는 깔깔 큰 소리로 웃으며, 그럼 수고하라며 방긋방긋 웃고는 교실을 떴다.

곧바로 같은 팀 아해들이 서로서로 돌아보며 약한 소리를 쏟아냈다.

“이거, 일단 이 과제부터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 같아요.”

“와, 정신 나갔네. 50페이지? 글자 크기를 이 정도로 제한해두면 다른 시험공부는 어떻게 하라고⋯.”

“저 교수는 우리가 이 수업만 듣는 줄 아나 봐⋯.”

원래도 흐릿한 인상으로 생겨 먹은 회색 머리칼의 데미안이 우리 팀 팀장답게 부산스러운 분위기를 정리하여 애썼다.

그는 한숨을 폭폭 내쉬며 아카데미 수첩을 꺼내어 달력이 표시된 앞쪽 페이지를 펼쳤다.

데미안의 수첩에 법학부의 다른 과목들의 시험 일정이 색색으로 빼곡하게 적혀 있는 것을 슬쩍 보았기에, 내심 검술부라 참 다행이라 생각하였다.

“⋯일단, 어떻게든 빈 일정을 맞춰서⋯ 우리 팀끼리 야영 순서와 실험 순서를 맞춰 보기로 해요. 기본 골조가 정해져 있으면 그 사이사이 소감을 적는 일은 그나마 쉬울 테니까.”

“그래요. 누가 무슨 일을 했는지 적고, 각자 그것에 대해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순서대로 정리부터 해 봐요. 그래도 부족하면 감상으로 참 재미있었다, 즐거웠다, 기뻤다 적으면 되고.”

“전에 받은 연금술 실험 순서 설명서 다들 가지고 있기는 하죠? 언제 모일까요.”

“저번에 놀러 갔을 때도 그렇고 우리 금요일 오후면 전부 시간 나지 않아요? 밤에 과제 하는 것보다는 해 떠 있을 때 모이는 게 다들 편할 것 같아요.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겠고요.”

다들 척척 무어라 말하는데 나는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었다.

그저 막막하기만 하여 토론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얌전히 앉아 있는데, 마리앤이 내 팔뚝을 툭 건드렸다.

“미카엘, 토요일에 바로 대련이 있는데 금요일에 과제 해도 괜찮겠어요?”

“⋯대련보다 이 과제가 좀 더 어려울 것 같으니, 이것부터 해치웁시다.”

“좋은 생각이에요. 그럼 이번 주 금요일에 다들 모이는 걸로. 그 전에 할 수 있으면 다들 각기 어떤 순서로 뭘 했었는지 기억나는 대로 메모해 왔으면 좋겠어요.”

“좋아요.”

“그럽시다.”

우리는 빠르게 합의하고 해산하였다. 나는 저녁을 먹고 야영 때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메모를 하다가 무복으로 갈아입고 연무장으로 나갔다.

밤이 깊도록 검을 휘두르며 심신을 평안하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왜 선배들이 시험 기간에 그리도 피골이 상접하여 휘청대며 다니는 것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새로운 깨달음이 전혀 기쁘지 않았다.

* * *

고급 검술 시간에는 늘 그러했듯이 대련을 했다.

마나와 오러, 오러와 마나 시간에는 늘 오러를 깨우치고 비물질 세계를 엿보기 위해 노력해 왔기 때문에 이 수업에서는 필기시험을 보지 않으리라 생각하였다.

착각이었다.

더글라스 머스탱 교수는 언제나처럼 다정하고 사근사근한 낯을 하고서는 지친 몸을 한 학생들에게 유인물을 나누어주었다.

“다다음 주가 시험인 건 다들 알고 있지요? 지금 나눠준 유인물은 마나와 오러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관한 내용과 시험 문제예요. 시험 문제는 네 번째 장에 적혀 있으니 확인하세요.”

“으아아아.”

“유인물 앞쪽의 내용에 자신의 견해를 추가하여 각 시험 문제에 대한 답안을 미리 작성해보고, 그 내용을 온전히 외워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이번 시험의 목표에요. 시험 문제를 미리 알려드렸으니, 커닝하지 않기로 해요. 시험 당일에는 절대 유인물이나 준비해 온 자료를 참고할 수 없어요. 엄격히 감시할 거예요.”

내가 마흔다섯 나이로 죽어, 지금 내 나이가 열셋이었다. 연이어 살았다면 환갑이 거진 다 되어가는 시간을 보내는 동안 한 번 상상치도 못한 시험 방식이었다.

과거 시험을 이렇게 보던가? 아니, 그건 주제를 그 자리에서 제시하는 것이었나⋯.

마냥 아득하여 눈을 끔벅이며 유인물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야유하던 아이들 중에서 어느 학생이 번쩍 손을 들고 질문하였다.

“분량은 어느 정도가 적절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총 네 문제가 있으니⋯ 한 문제당 열 줄 정도면 개념은 제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래도 미리 답을 적어 두고 기억해두기만 하면 앞으로 삼 년은 물론,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에도 사용할 수 있는 지식의 기본 바탕이 될 테니, 열심히 공부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언제나처럼 단정하고 자상한 어조로 대답한 더글라스가 빙긋 웃었다.

“시험 당일에는 행정동 1층 5번 교실을 빌렸어요. 다다음 주 이 시간에는 이 연무장이 아니라 그 교실에서 다시 만나요.”

나는 받은 유인물을 찬찬히 넘겨다보았다.

과연 이전에 더글라스 머스탱 교수가 몇 번이고 언급했던 내용들이 조금 더 전문적인 용어나 지식을 사용하여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래, 그래도 교양 세계사 수업보다는 나았다. 분량도 정해져 있고, 그 분량이 많지도 않았다. 게다가 내가 관심 있는 분야의 지식이니 외워서 나쁠 것은 없어 보였다.

배워 나쁜 일은 도둑질과 살인뿐인데 나는 이미 그것들을 할 줄 알았다⋯.

애써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하였으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금요일. 기다리고 기다리던 마법사와의 대련을 하루 앞둔 나는 도서관 옆에 달린 소회의실에서 야영 수업 동무들과 모였다.

언제나 쾌활하고 당당한 모습을 보이던 마법부 마리앤 필로덴도르는 단발머리를 쓸어 올려 빗자루 같은 꽁지 머리를 한 채였고, 늘 침착하던 경영부 이반 홀모스는 그간 밤샘 공부라도 한 모양인지 눈 밑이 거뭇거뭇하였다.

그나마 사람 꼴을 하고 있는 것은 회색 머리를 한 법학부 데미안과 푸른색 머리를 한, 학술부의 당돌한 제니뿐이다. 그 둘이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에 의아하여 바라보자 제니가 민망하게 웃으며 슬쩍 말을 흘렸다.

“그으, 원래 암기 과목에 강한 편이라서요. 학술부 수업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는 이미 선배들에게 들어 알고 있어서⋯ 예습을 좀 했어요.”

“법학부는 더 엄청난 것 같던데요.”

“아. 저는 잠을 자지 않으면 공부가 안되는 편이라서요. 하루 세 시간은 꼬박 자고 있습니다.”

데미안의 대꾸에 할 말을 잃었다. 하루 한 시진 반을 자고 공부하면서 사람 꼴을 유지하다니, 이 시어런 대륙의 평화는 이런 놈들이 지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잠시 서로의 근황과 안부를 묻는 시간을 가진 뒤 각자 빈 종이를 꺼냈다.

다들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아는 탓이었다.

“일단 시작점을 어디로 잡을까요? 뒷산 공터에 도착했을 적부터?”

“모든 야영은 준비부터 시작된다고 교수님이 말씀하셨으니까 물건 준비를 시작한 것부터 적는 게 좋겠습니다. 우리 각자 사 온 준비물이 뭐 뭐 있었죠?”

“준비물? 우리 첫 야영한 다음에 사 왔잖아요?”

“뭐든 쓸 수 있는 건 다 쓰는 게 좋으니까요. 그다음 번에는 가지고 왔고.”

“다 같이 금요일에 나가 샀던 게 재사용 장작, 벌레 퇴치제, 그리고 또 뭐였더라⋯.”

“방한 보온 담요?”

“그거 결국 안 썼잖아요. 날이 생각보다 따뜻해서.”

“그렇게 따지자면 침낭은 뭐 썼어요? 그냥 챙겨간 데 의의를 두기로 하죠, 뭐.”

“이반이 챙겨 온 양고기도 써요.”

“아, 그거 진짜 맛있었는데. 그날 교수님이 챙겨 주신 것도 쓸까요?”

“혹시 모르니까 적고, 나중에 노트에 적을지 말지는 자유로. 교수님이 솥이랑 국자 주셨고⋯ 나머지는 알아서 넣으라고 해서 정말 막 뜯어 넣었던 기억이 나는데.”

“숲에서 따 왔던 시약 재료 중에 설명서 목록에 없는 것이⋯.”

그래도 머리가 여럿 모이니까 낫다.

혼자 했다면 이 중의 절반의 절반도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라, 나는 가끔 음. 그랬죠. 음. 하면서 해주는 말이나 얌전히 받아적기로 하였다.

애초에 나는 이 야영 수업에서 힘을 쓰는 것 외의 일들에는 손을 댄 적이 없어, 다른 아해들도 그런 나를 이해해 주며 가끔 내가 적은 메모의 약초 이름에 틀린 글자가 있으면 수정해 주거나 하였다.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에는 초고가 완성되어 다 함께 식사하고 자리를 파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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