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두 번째 달의 수업이 시작되었다.
아카데미의 1학기는 2월에 시작되어 5월 말에 끝난다. 6, 7월은 여름 방학으로 휴식하며 보내고, 8월부터 11월까지 2학기를 지낸 뒤, 12월과 1월에 또 한 번 쉬었다. 때문에 각 학기의 두 번째, 네 번째 달에는 시험이 예정되어 있었다.
나 또한 이번 주 수업 내내 중간고사 대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거라는 설명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여 오전에 기초 검술 수업에 들어갈 때에는 적잖은 긴장을 했으나, 학생들의 중간고사는 어찌 보느냐 하는 질문에 마엘로 샌슨은 씩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걸 한 학기에 두 번 어떤 방식으로 평가할 건데? 검은 오른손으로 쥐는지, 왼손으로 쥐는지 시험이라도 볼까? 아서라, 아서. 너희 하는 건 내 머릿속에 다 들어가 있어.”
“와아!”
“점수는 학기 첫날과 마지막 날 얼마나 실력이 늘었는가를 기준으로 한다. 검술은 절대적인 기준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야. 늘 어제의 너희들보다 내일의 너희들이 더 강하고 단단할 수 있도록 노력해라. 알겠나?”
“예!”
과연 좋은 스승이었다. 대답하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유난히 밝고 우렁찼다. 나도 소리 내어 대답하고는 조금 웃었다. 이후로도 오전 시간은 내내 이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즐겁게 보낼 수 있다는 것이 내심 다행스러웠던 탓이다.
그러나 오후에는 사정이 판이하였다.
“⋯자아, 오늘 배운 것까지 해서 총 다섯 개의 수식을 배웠고, 우린 그것을 전부 펼칠 수 있게 되었어요⋯. 지금 내어주는 유인물의 수식을 제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해석하여 시험 시간에 직접 제 눈앞에서 시연하는 것이 본 수업의 중간고사예요⋯.”
내어준 유인물의 수식을 해석할 재능이 없는 나는 멀거니 넋을 놓았다.
“마법은 아주 오래된 학문이고 대부분의 마법식은 서면으로 가장 먼저 접하게 되니까⋯ 적혀 있는 식을 스스로 해석해서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는 아주 아주 중요한 일이에요⋯. 다음 주 수업은 없고, 다다음 주에 시험을 볼 테니까 모두 정진하길 바라요⋯. 궁금한 것이 있다면 오후 세 시부터 네 시 사이에 교수실로 오세요⋯.”
나는 숨도 제대로 쉬지 않고 앤젤라 스팅 교수를 똑바로 응시하였다. 그녀가 나의 존재를 알아차려 주기를 기다렸다.
나의 욕심으로 마법 수업을 신청한 것도 맞고, 수업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한 것도 맞지만, 그래도 매번 열심히 출석하였는데 시험을 못 봐서 낙제점을 받기에는 어쩐지 억울하였다.
그녀가 보기에도 그러했는지 내 쪽을 보더니 옅은 한숨을 한 번 쉬고, 내 책상 위에 또 다른 유인물을 만들어주었다.
나는 눈앞에 새로 나타난 유인물을 보았다. 기초 마법 수식들이 적혀 있는 종이였다.
왼편에는 마법 기호가, 오른편에는 발음과 해석이 적혀 있었다.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그것들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에른하르트 영식은⋯ 따로 쪽지 시험을 볼 거예요⋯. 빈칸 채우기를 해서 수식의 70% 이상을 맞히는 데 성공한다면 기본 점수를 주겠어요⋯. 여기 다른 학생들은 모두 외우고 있는 거니까, 이 정도는 읽을 줄 알아야 수업을 들었다고 할 수 있겠죠⋯?”
어째서 검술부 학생들이 일제히 수업에서 달아났는데도 교수가 에드윈 키아드리스를 의심하는 일이 없었는지 깨달았다.
내가 알고 있는 검술부의 그 어떤 학생이라도 이 중간고사 대체 유인물을 받으면 곧장 일어나 인사하고 사라졌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다음 학기부터 마법부 수업은 듣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깍듯하게 대답했다.
“예. 배려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
“으응⋯ 열심히 해요⋯. 아, 그리고⋯ 토요일에 시간 있나요⋯?”
“예? 괜찮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 대련⋯ 제가 심판을 봐 드리려고 하거든요⋯. 토요일 오후 두 시에 봐요⋯.”
나는 잠시 놀랐다가,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에드윈에게 전달받을 줄 알았는데. 마법부 전체가 이 대련으로 떠들썩하였다는 말이 정말인 모양이었다. 수업이 끝난 시간이라고 하여도 학생 전부가 앉아 있는 채였는데 단 한 명도 놀라는 일이 없었다.
앤젤라 스팅 교수는 대련 장소까지 향하는 길을 아주 꼼꼼히 알려 주었다. 혹시라도 늦지 않도록 좀 더 일찍 출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기대하던 마법부 동료는 에드윈의 방해로 사귀지 못하였으나, 야영 수업에서 똘똘하고 당돌한 마리앤을 만났으니 처음의 계획에서 절반은 이룩한 셈이었다.
그리고 전투 마법사로 추정되는 에드윈과의 대련이 내정되어 있다는 것 또한 호재였다. 묵직한 유인물 탓에 잠시 마음이 힘들었으나, 이내 검으로 마법을 파훼할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으로 즐거워졌다.
그래, 언제는 쉬워서 외웠나.
이곳에서는 어린 아해들도 익히고 배워 쓰는 말인데 나이 먹어서 못 하겠다고 징징거리는 것도 추한 일이라. 마음을 가다듬고 자리를 떠나는 교수에게 깍듯하게 인사하였다.
* * *
화요일 고급 검술 수업이 끝날 무렵 마엘로 샌슨이 학생들을 모두 모아 놓고 나와 에드윈 키아드리스의 대련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몇몇은 이미 어디선가 들어 알고 있었고, 몇은 처음 듣는 이야기인지 낄낄 웃으며 재미있어하였다.
역시 검을 드는 이는 나이가 많든 적든 똑같았다. 누가 더 강한가, 물으면 사흘 밤낮을 떠들어도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
“마법과 검술, 검술과 마법의 대련에 대한 이야기는 한 세대가 지날 때마다 꼭 한 번씩 나오는 이야기지만 정말로 대련을 하겠다고 나서는 놈은 없었단 말이지. 네가 물건은 물건이다, 미카엘.”
“과찬이십니다.”
“⋯칭찬으로 들어줘서 고맙다. 일단 나는 스팅 교수가 부탁해서 참관하긴 할 텐데⋯. 여기 있는 네 친구랑 선배들도 초대해주는 건 어때? 다들 궁금하지 않겠어?”
“예, 물론 초대하겠습니다. 그런데 대련 장소인 제1강당의 크기는 어느 정도나 됩니까? 다 들어가도 넉넉할까요?”
“그럼. 이 연무장 정도 크기는 될걸. 관람석에는 따로 보호 마법까지 걸어준다고 하니까 맘 편히 구경만 해도 될 거다.”
옆에서 기웃대며 지켜보고 있던 선배들 중 몇이 불쑥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그런데 에른하르트 영식, 우리가 다 가도 에드윈 키아드리스 영식이 괜찮다고 할까?”
“그러게⋯. 둘이 사이가 좋아서 대련을 잡은 것도 아니라면서. 별 소문이 다 있던데.”
“질 것 같아서 몸을 사리는 것이냐 하고 물어보면 허락해주실 겁니다.”
“⋯어? 아니, 와, 아니 그건 좀. 인성이.”
“이번 대 에른하르트는 장난 아니네⋯. 어쨌든, 고맙다.”
사실 내가 대련 당사자가 아니었으면, 나도 어떻게 해서든 내 눈으로 보고 싶어 애를 썼을 것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아니었다. 모두들 흥이 돋은 표정이었다.
시험 기간이라 더 재미있어 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대강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떠나는 내 어깨 위로 웃는 소리가 쏟아졌다. 팔다리나 등허리 따위를 투덕거리고 지나가는 손들이 이제 익숙했다.
그저 예뻐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그러려니 하였다.
적당히 식사를 위해 자리를 옮기려 하는 중에, 황급하게 쫓아 온 루베르 황자가 내 앞에 섰다.
“⋯마음을 너무 급하게 먹지 말고 천천히 가도 괜찮다.”
“예?”
“⋯나는, 네가 다칠까 봐 걱정이 되어서⋯.”
“아아. 저는 괜찮습니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
“에드윈 키아드리스가?”
“예?”
“⋯아, 아니. 말이 헛나왔다. 왜 에드윈 키아드리스 영식이었는지⋯ 궁금해서. 아직 순서가 오지 않았지만 나도 에른하르트 영식과의 대련을 기대하고 있는 입장이라 물어보았을 뿐이야.”
“음. 그냥 마법사와 검사 중 누가 더 센지 궁금해서 적당히 수준 맞아 보이는 상대를 고른 것뿐입니다. 교수님께 대련을 청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약한 마법사와 싸워봤자 괴롭히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요.”
“⋯그래⋯.”
“그래도 걱정해주신 건 감사합니다. 안 다치고, 이왕이면 이겨서 돌아오겠습니다.”
요사이 영 허약한 것 같더니, 마음도 심약한 소년이었다.
무엇보다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나와 대련할 일을 기대하고 있다는 말이 귀에 달게 들렸다.
고급 검술 수업 시간에 함께하는 일류무사 스무 명 중에서도 꽤 높은 순위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루베르 황자였다. 아직 몸이 덜 자라 말석을 차지하고 있는 내게 관심을 두고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 그가 왜 그리 나에게 잘해주려 노력하는지도 이해가 갔다.
보는 눈이 좋아야 쓸만한 무인이 된다. 녀석이 크게 성장할 조짐이 보여 마냥 흐뭇하였다.
기실 소년의 말마따나 마음을 급하게 먹지 않아도 되는 일이긴 하였다.
루베르의 말대로, 지금 에드윈과 결투를 하면 내가 지거나 다칠 가능성이 높았다.
중원에서 이미 초절정의 경지를 밟아본 덕에 동급의 무인보다 안법이 뛰어난 나였다.
허나, 지금의 나는 한창때보다 훌쩍 짧은 팔과 다리 탓에 간합을 재는 것에도 손해를 보고, 덜 자란 근육과 질겨지지 못한 피부 탓에 근력과 내구력에서도 손해를 보았다.
상대를 꼭 이기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이라면 지금이 적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또한, 이것저것 따져보고 몸을 사리며 산다면 경지에 오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수많은 사선을 건너본 자의 경험으로, 괴로운 일은 괴로운 만큼 나를 성장시켰다.
그렇게 믿고 살아 온 시간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렇기에 에드윈과의 대결은 지금이 아니면 안 되었다.
한편으로는 뿔 달린 망아지 같은 에드윈 키아드리스가 이에 박힌 가시처럼 거슬리게 굴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지금 해치워야만 하는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은원은 뒤에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앞에 두는 것이다. 생각지 못한 때에, 방심했을 때에 내 등을 노리는 이는 곁에 두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죽어 나간 이가 어디 한둘이던가⋯.
문득 입 안이 쓰게 느껴져 입맛을 다셨다.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이 떠오른 탓이었다.
후회는 한 번으로 족했다. 나는 같은 실수를 두 번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중원에서도 그러했으니, 지금도 그럴 것이다.
* * *
⋯사람은 매번 같은 실수를 하는 생물임이 틀림없다. 나는 빠진 넋을 도로 잡아 오는 법을 찾지 못한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교양 세계사 수업의 브리아나 카사블랑카 교수는 일전에도 언질을 준 대로 중간고사 시험으로 다섯 왕조의 왕실 계보와 시어런 황실 계보의 빈칸을 채우게 할 것이라 하였다.
내 배움의 끈이 짧아 나 죽던 때 명나라 황제가 몇 번째 놈이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시어런 천 년 황조의 이름자뿐만 아니라 옆 나라 왕실 계보까지도 머릿속에 집어넣어야 하는 것이 기가 막혔다.
그러나 이는 알고 있던 것이고 단순 암기이기에 그리 경악할 일은 아니었다.
추가로 지금껏 한 달간 나간 진도 중 다섯 개의 주제를 꼽아 서술하게 할 것이라는 말에 교실 안에 긴 탄식이 휘몰아쳤다.
시험 범위라도 좁혀주면 좋으련만, 모든 주제가 동등하게 중요해 몇을 꼽아줄 수 없다는 말에 눈이 시리고 뒷골이 당겼다.
그나마 제국의 계보 수업은 예고한 대로 중간고사, 기말고사, 과제가 없었다.
칼립스 아그리젠트 교수는 매번 해 오던 그대로 쪽지 시험만 볼 것이며, 수업은 그대로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천만다행인 일이었으나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