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금요일 아침에는 편지를 무더기로 받았다.
학생들의 편지를 모아두었다가 매달 넷째 주 금요일에 한 번에 전달하게 되어 있다는 설명은 편지를 전해 준 시종에게 들어 알았다.
아카데미 수업 교과 과정은 3년 만에 끝내기에 벅찬 감이 있었다. 그렇기에 공부할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매달 말일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에는 편지가 오가는 것을 금지한다는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시급한 소식은 어찌하나 물어보았더니, 학생에게 곧장 전달해야 할 필요가 있는 편지는 전달하는 이에게 미리 말해두거나 편지 겉봉에 붉은 표식을 하여 보내면 정해진 날이 아니더라도 편지를 빨리 받아볼 수 있도록 한다 하였다.
편지만 받은 것이 아니었다.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고급 편지 용지와 실링 왁스 따위의 문구류 일체를 함께 받았다.
다음에는 직접 시전에 나가 구매해야 하지만 입학 첫 달이기 때문에 답장하기 위한 도구를 아카데미에서 제공하여 준다 하였는데, 그 세심함에 한 번 더 놀랐다.
오전 수업을 듣는 중에 물어 알았는데,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학생들이 매달 마지막 주 금요일과 주말을 편지와 씨름하는 시간으로 보낸다고 하였다.
어쩔 수 없이 오후 내내 편지를 읽고 답장을 쓰며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마엘로 샌슨 교수도 나의 오후 계획에 크게 기뻐하며 찬성하였다.
편지를 보낸 이름자와 보낸 편지의 개수를 보아하니 시어런 아카데미에서 편지를 한 달에 한 번 전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던 것은 나뿐인가 하였다.
부친과 모친이 각각 한 통씩, 미하엘과 막내 아스델은 각각 네 통씩을 보냈다.
일주일에 한 차례씩 적어, 한 번에 모아 보낸 태가 났다.
조부모와 외조부모가 보낸 것도 있었고, 외숙부가 보낸 편지도 하나 있었다. 칼립스 아그리젠트 교수의 수업 시간에 외숙부가 부친을 보자마자 여동생의 짝으로 점지하였다는 이야기가 문득 생각나 소식이 궁금하였기에, 외숙부의 편지를 먼저 뜯어보았다.
외숙부, 오스카 발렌티아는 현재 이 몸의 모친인 세이른 에른하르트보다 아홉 살 더 나이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어릴 적부터 여동생을 무척 귀하게 여겼다는데, 수업에서 들은 전 세대의 가십들은 지금의 외숙부를 보면 떠올리기 어려울 만큼 낯설고 과격한 것들이 많았다.
내가 아는 외숙부는 1남 1녀를 슬하에 둔 의젓한 가장이었다. 그는 늘 짙은 보라색의 머리칼을 단정히 뒤로 넘겨 정리하였고, 옷차림이 흐트러지는 일이 없었다.
눈매 또한 날카로워 차가운 말 한마디로 상대를 움츠러들게 만들 법한 기세를 지녔다.
그래서일까 그가 난폭하게 손을 쓰는 장면은 좀처럼 상상이 가지 않았다.
보낸 편지 또한 평소와 크게 다를 바 없이 단정하고 엄격한 필체로 작성된 것이었다.
필요한 물건이나 가지고 싶은 것은 수도의 상단 몇 군데에 미리 일러두었으니 발렌티아나 에른하르트의 이름을 대고 가지고 가라, 조카에 대한 애정을 근엄한 방식으로 표현한 내용이었다.
외숙부의 은혜에 대한 감사, 외숙모에 대한 염려, 외사촌 형제들의 근황과 안부를 묻는 전언 따위를 담아 간단한 답신을 적은 뒤 봉투에 넣어 한켠에 밀어두었다.
조부모와 외조부모의 편지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일상적인 안부, 선물을 주고 싶다는 암시, 새로이 사귄 친구들에 대한 궁금증, 뭐 그런 친숙한 내용으로 가득하였다.
새로이 태어난 이후 나는 한 가문의 장손으로 태어났다는 의무감에 가문 어른들에게 깍듯하게 예와 격식을 차렸다.
대개 응접실에서 얼굴을 보며 꼬박꼬박 정중히 답변했던 말들을 편지로 전하니 두 시간 넘게 걸렸던 일이 이십 분만에 끝이 나 편하기는 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편지에도 별다를 것은 없었으나 좀 더 세심한 염려가 가득하였다.
나는 답장에 쉐이든과 벤자민의 이름자 등을 적고, 또 마엘로 샌슨 교수와 더글라스 머스탱 교수의 이름자를 적었다.
친밀한 관계를 맺은 좋은 어른과 동무들이 있고 그 이름자를 외웠다 하면 분명히 기뻐할 것을 알아 부러 적은 것이었다.
집안 어른들의 편지를 그렇게 대충 치워두고 나서야 제 동생, 미하엘과 아스델의 편지를 열어 보았다.
미하엘의 편지는 ‘형이 보고 싶습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었다.
아직 글씨를 쓰는 게 익숙하지 않은지, 글자가 어른들의 것보다 크고 획이 간결하였다. 또박또박 쓰기 위해 힘을 꾹 주고 쓴 것이 느껴져 가슴 한켠이 사르르 녹아들고, 더워졌다.
어여쁜 마음에 입가에 미소가 절로 스몄다. 녀석은 요즈음 얼른 아카데미에 가고 싶다, 자신도 조기입학을 하겠다 하며 여러 가르침에 푹 빠져 사는 모양이었다.
아이가 책을 너무 오래 보아 건강을 해칠까 부모님이 염려하시어, 내가 그랬던 것처럼 연무장 돌기도 시작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 아이란 자고로 신나게 뛰고 많이 먹고 궁금한 것을 물어 배우는 것이 마땅하다.
흐뭇한 마음이 들어 편지 하나하나를 참 오래, 연거푸 읽었다.
중원에서 제가 맡았던 조카아이들은 이미 제 어미와 유모의 손을 타고 자란 놈들이었다. 나이 다섯이 넘어, 막 기마 자세를 배울 놈들이었다. 데려다 단련할 필요가 있는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저를 존경하기도 하였고, 두려워하기도 하였고, 의지하기도 하였으나, 저는 숙부이지 아비 어미는 아니었기에 이런 식의 무조건적인 애정을 받아 본 기억이 전무했다.
미하엘, 이 조그만 것은 갓난쟁이 손아귀 잼잼 하는 것부터 제가 보고 키워 온 놈이었다.
고 작고 새근대는 것이 품에 안기고 아양을 부리는 일을 밥 먹듯 하니, 그 어찌 그립지 않고 어여쁘지 않을 수가 있겠나.
키아드리스 가문 이야기가 마음 한켠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저는 절대 이 아이 속상할 일을 만들지 않겠다 속으로 다짐도 했다.
아이가 읽기 편하도록 다른 것들보다 큼직한 글씨로, 흘리지 않고 단정하게 적었다.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네 생각을 한다, 얼른 너와 함께 아카데미에서 수학하고 싶다, 네가 잘할 것을 믿고 있다, 하는 둥 입에 단 소리를 꼬박 채운 편지가 대여섯 장이 넘었다.
미하엘이 나와 나이 터울이 크기 때문에 같이 아카데미를 다니는 일이 없을 것을 빤히 알면서도 그리 적었다. 편지를 읽은 아이가 기뻐할 모습이 눈에 선했다.
“⋯보고 싶다.”
그 말이 툭, 튀어나왔다.
수학을 위해 집을 떠나면서도 이런 마음을 품을 줄은 좀처럼 예상치 못하였는데, 살면 살수록 알면 알수록 이곳에서 새로이 얻은 가족, 친지들에게 정이 꽤 들었구나 하였다.
그리운 글씨를 떨리는 손끝으로 훑었다. 눈가에 습한 기운이 어릴 것만 같아 고개를 들었다. 서재 의자가 몸을 푹신하게 떠받쳤다. 구름 위에 앉은 듯 편안하였다.
전생의 자신이었다면 이런 푹신한 의자를 보면 침상도 의자도 아닌 것이 이상하다 여겨 무슨 신선놀음이냐 비웃었을 터인데, 이제는 마냥 익숙하여 거리낌이 없었다.
긴 한숨으로 애끓는 마음을 밀어두고 막내 아스델의 편지를 펼쳤다. 곧바로 웃음이 나왔다.
어린아이 손바닥에 잉크를 묻혀 찍어낸 듯, 손바닥 여럿이 치덕치덕 찍힌 종잇장이었다.
그래, 아직 제 글을 온전히 짜낼 나이가 아니었다. 작달막한 손바닥 옆에 조금 큰 것이 찍힌 것은, 제 동생 하는 것을 제가 그러했듯 지켜보고 있었을 미하엘의 것일 테다.
그 옆에 또박또박한 글씨로 아비와 어미, 저, 미하엘, 아스델의 이름자가 적혀 있었다.
편지에는 꽃도 그려져 있고, 별도 그려져 있고,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무언가가 그득 그려져 있기도 하였다.
또 다른 편지에는 연습이라도 한 듯 내 이름자가 가득하였는데, 서툰 솜씨로나마 따라 그린 기색이 역력한 필체를 보니 아해의 노력이 무척 기특하고 흐뭇했다.
기쁜 마음에 편지 읽기를 그치지 않아 저녁은 쉐이든이 방으로 가져다주었다.
마지막 주 주말은 친우들이 염려를 담아, 전날 쓴 편지들을 직접 시어런의 표국(*무림의 물류 유통 단체. 산적과 도적을 피해 물건과 편지를 전달하는 데에 주로 사용한다)에 전달하고 푹 쉬기로 하자 청하기에 그러기로 하였다.
이 즈음해서 나는 처음 아카데미에 입학할 때보다 다급한 마음이 많이 가셔 있었다.
에른하르트 소백작저에서 보낸 십삼 년은 풍요롭긴 하였으되 모든 기사들이 기껏해야 이류에서 일류 남짓의 실력을 지닌 데다가 그 수도 오십여 명밖에 되지 않아 늘 걱정이 많았다.
시종 시녀 하녀 하인 할 것 없이 거느리는 사용인이 많아 내 한 손으로 식솔 모두를 지키기에 어려울 것 같았다.
외적이 담을 넘는다면 어찌해야 하는가를 구상하며 홀로 불안해하며 지형을 살폈던 것이 다 헛짓이었다는 걸 알게 되어 마음이 놓였다.
안에서 볼 적에 알 수 없는 것은, 물러나 바깥에서 보아야만 알 수 있다.
일전에 쉐이든 로제가 에른하르트 백작가의 풍요에 대해 말하며 나를 달래려 군 적이 있었다. 과연 역사를 알고 수업을 들으니 그 말이 옳았다.
에른하르트는 포도 등의 과실 농장이 있는 넓은 땅의 주인이었다.
대대로 백작가를 이어야 할 자는 어릴 적부터 과실들이 병충해에 입으면 어찌 되는지, 어찌 과실을 기르는 것이 옳고 합당한 것인지, 또 그 과실들로 빚어내는 병 통조림이나 술 따위가 어떤 향기를 가져야 가장 비싼 값을 치를 수 있는지 따위를 배워 익힌다 하였다.
미하엘이 편지로 지금 나처럼 배우고 있다고 알린 것들이었다. 나는 그러한 것을 배운 적 없고 흥미 또한 없었다. 미하엘이 대신해 주는 것을 내심 다행으로 여겼다.
그 땅의 인근은 서로 친한 가문의 영지가 사근사근하게 어깨를 맞댄 채 있었다.
어릴 적부터 동무로 지내어 얼굴을 곧잘 보았던 로건의 세르벨 백작가, 지금 제 옆에 늘 붙어 다니는 쉐이든의 로제 백작가, 한 영지를 건너서 푸르른 녹음의 땅, 끝없는 평야를 가진 외조부의 발렌티아 공작가⋯.
경계할 외적을 가지고 있지 않은 평탄한 곳에서 제가 그리도 사방에 가시를 세우고 있었구나, 생각하면 멋쩍기까지 했다.
중원의 땅에서야 일신의 무력, 힘이 강한 것이 전부였으나 이곳에선 그렇지 않았다.
법과 수를 셈하는 이들이 서로의 사이에 말과 서면으로 끈끈한 다리를 놓았다.
더러는 빚어낸 신의를 꺾기도 하였고 속이기도 하였으나, 이곳의 복수는 상대의 사지를 꺾고 단전을 부수고 목을 베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계약서를 들이미는 것이었다.
좀 더 배워 알아야겠다.
책으로 배워 아는 것이 아니라, 뭉뚱그려 아는 것이 아니라, 직접 걷고 보고 살펴 눈으로 알고 손으로 만져 배워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애써 조급증을 내려놓았다.
당장의 안전이 보장되어 먹을 수 있는 마음이었다.
이날은 쉐이든이 직접 옷을 골라주지는 않고, 스스로 고르면 한 번 보아주겠다 하여 그렇게 하였다.
센스가 나쁜 것은 아닌데 왜 머리부터 발끝까지 같은 색으로만 맞추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다며 녀석이 크라바트를 다른 것으로 바꾸라 권하기에 그러마 하였다.
* * *
야시장이 열리지 않는 날에도 수도의 길거리는 북적북적하였다.
길거리의 양켠에 늘어서 있던 좌판들이 사라져 안 그래도 넓던 길이 더 넓어진 덕분에 먼젓번보다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의 간격에 여유가 있어 좋았다.
가장 먼저 소중히 품에 안고 나왔던 편지들을 각자의 주소로 부치고 나니 두 손이 가벼워 무엇을 하여도 좋을 것 같았다.
이번에 달고 나온 것은 쉐이든과 벤자민 두 사람이었다.
나는 요사이 새로운 검식을 창안하는 데에 있어 동급의 무인인 벤자민 클라우디안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어 그를 친근히 여기고 있었다. 거기다 벤자민은 소란스러움이 덜하고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없었다.
함께하자는 말을 듣자마자 거절하지 않고 데리고 나왔다.
그러나 비밀스럽게 홀로 생각하기로는, 쉐이든이 나쁜 동무는 아니지만, 쉐이든과 둘이서만 나왔더라면 귀찮은 마음을 다 숨기기 어려웠을 것이 분명했다. 아해가 하는 말을 모두 내가 상대해 주어야 하는 것이 어려워 꼭 누구 하나 끌고 나오고 싶었던 터에 잘되었다 싶은 마음도 있었다.
“이왕 나왔으니, 필요한 것들 한 번에 다 사서 들어가자.”
“물건이야 시종을 시키지 않고.”
“그래도 직접 보고 고르는 것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마침 저도 이번에 실수로 검을 둘이나 부러트려 무기 상점에 한번 가 봐야 합니다.”
그냥 아무렇게나 사용하는 소모품을 떠올리고 한 말이었는데, 벤자민의 대꾸에 아차 하였다.
내가 마법식을 자아내는 방법대로 검에 오러를 싣는 방법을 해 보자, 하여 둘이 실험하다가 깨어 먹은 검이 벌써 두 개였다. 내게는 여분의 검이 없어 그의 것을 사용하였던 기억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