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그리하여 발렌티아 가는 필릭스 왕의 청혼서를 반려하기 위하여 윌리엄 에른하르트와 혼약을 맺어, 필릭스 왕이 시어런 제국에 도착하기 전 사흘 만에 황족에 비견될 만큼 성대한 결혼식을 치르게 됩니다.”
발렌티아 공작가는 나의 외가였다. 내 어미가 필릭스의 왕과 혼인할 뻔했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다. 칼립스 교수는 시종일관 덤덤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결국 필릭스 왕은 발렌티아를 대신하여 맥플로린 백작가의 케니아 맥플로린과 혼인하였으며, 필릭스 왕국은 현재 시어런의 훌륭한 우방으로 행세하고 있습니다.”
내 얼굴에 꽂히는 시선들이 따가웠다. 그러나 이 몸이 태어나기 전의 일에 대하여 알면 얼마나 알 것이고, 들으면 또 얼마나 들었겠는가. 성년이 되기도 전에 선대의 결혼과 관련된 뒷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알게 될 줄은 몰랐다.
다른 학생들의 앞에서 들을 이야기로는 적절치 않았고, 내가 정녕 지학이 되기 전의 어린 소년이었다면 부끄럽기도 하였겠으나, 다시 태어난 초반에 서먹한 부친과 모친을 살갑게 만들기 위하여 골머리를 싸맨 기억이 있어 까닭이 궁금하였다.
철의 그림스베인의 어린 후계자가 방계와의 후계 정쟁으로 인하여 몸을 피신한 채 때를 기다리고 있으나 그 행방이 명확하지 않으니 이후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를 지켜보라는 말을 끝으로 교수가 수업을 마쳤다.
언제나처럼 칠판 오른쪽 끝 의자에 앉은 그가 미간을 한껏 찌푸리고 있는 모양새를 보다가 예의상 노트와 펜을 들고 그에게 다가섰다.
“방금의 수업 내용 중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수업 시간 중에는 자유로이 질문을 받는다 하였으나 가족사를 전 학생들에게 퍼트리고 싶은 마음이 없어 평소보다 목소리를 작게 내었는데, 칼립스 아그리젠트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까닥하고 갈라진 목소리로 질문하세요, 하였다.
“발렌티아 가와 에른하르트 가의 혼약 당시, 당사자 간의 합의가 없었습니까?”
“⋯처음부터 그런 것을 물어볼 줄은 몰랐지만, 네, 없었습니다. 윌리엄 에른하르트는 당시 수도로 올라온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은 사내였거든요. 그는 가문의 일로 어린 시절부터 거의 평생을 지방에서 살았습니다.”
아그리젠트 교수는 서늘한 표정으로 고개를 까닥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윌리엄 에른하르트가 처음으로 참가한 무도회에서 곧바로 발렌티아 소공작의 눈에 들어 세이른과 사흘 만에 혼약을 맺고 신방에 들어가게 된 일로 한동안 수도가 떠들썩했습니다. 윌리엄 에른하르트와 세이른 에른하르트는 결혼식 날 처음 상대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음.”
“워낙 결혼식을 치르기까지 일정이 촉박하여 서로 인사를 나눌 시간도 없었지요.”
“에른하르트는 백작가인데, 왜 발렌티아 공작가는 공후작가에서 상대를 고르지 않았습니까?”
“쓸만한 놈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 당시 공후작가의 영식들 중에 외모만 뛰어나거나 성격만 좋거나 능력만 좋은 사내는 있었으나, 세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괜찮은 이는 모조리 태중 약혼이나 조기 약혼을 하여.”
“아.”
“에른하르트 영식이 직접 보아 알겠지만, 발렌티아 가는 당시 유난스러울 정도로 발렌티아 공녀를 싸고돌기로 유명하였습니다. 필릭스 왕가와의 혼담을 거절한 것도 사실은 국가 간의 조약과 세력 경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유뿐 아니라, 세이른 발렌티아를 타국으로 보낼 수 없어 그랬다는 설이 더 유력하였으니까요.”
“⋯.”
“더 궁금한 것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중원에서도 신방에 들어서서야 얼굴을 확인하는 부부는 수없이 많았다. 중매로 혼인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던 탓이다. 동네 마을에서 적당한 청년과 처자가 눈이 맞아 식을 올리고 아이를 낳는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이 그러했다.
특히 귀한 가문의 처자들은 무인이 아닌 이상 외부 사내들에게 얼굴을 보이는 일이 드물었다.
강호를 떠돌며 본 수없이 많은 종류의 면사를 덮어쓴 여인들을 떠올리고는 뒤이어, 나의 걱정 많고 소심한 부친이 당혹하였을 만하다 여겨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데 나는 혼인식 바로 이듬해에 태어나지 않았던가?
속이 복잡한 것이야 내 사정이다. 까닥 묵례하여 감사를 표하자, 아그리젠트 교수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다시 손에 들린 서류들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뒷덜미에 보랏빛으로 선명하게 찍힌 멍이 보였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걸음이 멎었다.
“다치셨습니까?”
교수가 대답 대신에,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들어 날 응시하기에 내 목덜미를 오른손으로 짚어 보여 주며 알렸다.
그의 경추 중간부터 두어 개 남은 멍 자국은 하나는 보랏빛으로 시뻘겋고, 하나는 푸르스름하게 나아가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꼬집히거나 얻어맞은 자국인가 싶었는데, 목은 이렇게 한 점을 강하게 내려치기에 좋은 부위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 깐깐한 사내가 얌전히 얻어맞고만 있었을 리 없다. 오늘 앓아누울 기세로 골골거리는 것이 그 탓인가 하였다.
칼립스 아그리젠트 교수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무언가 알아챈 양 쯧, 하고 혀를 찼다.
“벌레에게 물린 흔적입니다. 신경 쓸 것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제야 안도하여 내 자리로 돌아왔다. 아그리젠트가 제 목덜미를 손으로 덮어 문지르는 것을 보았다. 내가 지적하여 간지러운 것이 도로 생각난 모양이지 하고 안쓰럽게 보았다.
어쩐지 일전에 함께 야영 수업을 듣는 동무들과 쉐이든이 벌레 쫓는 약을 그리도 소원하더니, 아카데미 내에 벌레가 많긴 한 모양이라 신경 쓸 것을 다짐했다.
함께 저녁을 먹는 동무들에게 아카데미에 출몰하는 벌레의 생김새를 물으니 식사 중에 밥맛 떨어지는 소리를 하지 말라 꾸중을 들었다.
밥에서 벌레가 기어 나온 것도 아니고 그저 이야기만 하는데도 사색이 되는 놈들을 보고 어리둥절했다. 하여간 곱게 자란 티가 난다고 혀를 차려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벌레가 유독하여 살이 녹고 뼈가 삭는다면 기겁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싫어하는 아해들을 붙잡고 좀 더 자세히 물으니 몇몇 놈들이 벌레의 생김새를 설명해주었는데, 그중에 손가락 하나 크기를 넘어가는 것도, 독이 강한 것도 거진 없다 하여 의아하였다.
그럼 대체 왜 무서워하는 것이냐 물으니 그저 외양이 징그러워 꺼림칙하다는 대답이 나왔다. 귀엽고 우스워 픽 웃었다.
내가 중원에 있을 적에는 길거리 거지들 중에 머리에 이나 벼룩 하나 얹지 않은 놈을 찾을 수 없었고, 벌판에서 푹 자고 일어나면 옷자락에서 팔뚝만 한 지네가 툭툭 떨어지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독물에 물리면 독공의 고수가 아닌 이상에야 물린 부위가 퉁퉁 부풀어, 칼로 째어 그 피를 짜내느라 고생하기도 하였다.
그나마 사내놈들끼리 있다가 일이 생기면 서로 도와줄 수라도 있었는데, 일행 중에 끼어 있던 여인이 그러한 해를 입으면 다 함께 곤란하여 낯을 붉혔다.
모용 아무개의 두 살 터울 여동생 모용연화가 섞인 대여섯 정도의 인원으로 산채 토벌을 나간 때가 문득 떠올랐다.
모용연화가 독뱀에 종아리를 물렸을 적에, 그 수라장에서도 내내 흰 옷만 입고 다니며 깔끔을 떨었던 제갈 아무개가 덥석 무릎을 굽히고 상처에 직접 입을 대 그녀를 구명하여 결국 혼인까지 하였더랬다.
혼인식에서 정작 신부는 말짱한데 제가 잘하겠다 찔찔 울어대던 제갈 놈이 손주를 보고 죽었던가, 아니면 그 전에 세상을 떠났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였다.
모용연화는 그 후에도 제 다리에 흉으로 남은 상처를 오래 속상해하였으나, 제갈 그놈이 그 덕분에 혼인하였으니 어여쁜 흔적이라며 입에 발린 소리를 해대어 다 늙어 마련한 술자리에서 술도 더 넘기지 못하고 토하는 시늉을 하며 난리를 쳤던 친우들의 기억이 선연하였다.
제가 다시 살아났으니 그들도 좋은 곳에서 다시 그들의 삶을 살고 있겠지 하며 그리운 마음을 애써 달랬다.
* * *
수요일. 초급 검술 시간에, 마엘로 샌슨은 세드릭 교수에게 받아왔다며 어린애 머리통만 한 시계를 단상 위에 올려두고 수업을 시작하였다.
이전 시간에 수업 시간을 과하게 넘겨서 아이들이 밥도 못 먹고 다음 수업이 있는 교실까지 달려가며 고생을 하였는데, 몇몇이 수업에 늦은 것으로 샌슨 교수가 아카데미 교장에게 혼이 났다고 하였다.
그는 수업을 듣기 싫어하는 놈들은 있어도 이렇게 기를 쓰고 날뛰는 것들은 또 처음이라며 낄낄 웃었는데, 아무리 보아도 기분이 좋아 보였기에 나 또한 흡족하였다.
아침저녁으로 운기조식하여 내공을 꾸준히 쌓고는 있었으되, 내공심법을 시어런의 사람들에게 전수하는 것을 포기한 뒤로 내가 가지고 있는 남궁의 검식을 버리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어차피 경지에 이르면 버리게 될 형이고 식이었다. 미련을 잊기 위해서 나만의 검식을 창안하고자 하였다.
새로운 검법을 만드는 일은 대종사(*각 무술 문파에서 한 시대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위대한 스승)의 자질이 없으면 힘들다 하여 중원에서는 시도할 생각도 못 하였지만, 지금 이곳에서는 화경의 스승을 옆에 끼고 수십과 함께 골몰하는데 못할 것이 무언가 싶었다.
새로운 검술 유파를 만들게 되면 그 이름은 남궁도 버리고, 이미 먼 땅에 두고 온 연 자도 버리고, 내 이름 머무를 정(停) 자만 오롯이 남겨서 ‘정검’, 머무르는 검이라 부르고 싶다는 생각을 속에 품고 있었다.
치기 어린 꿈이었다. 나잇살 먹고 입 밖에 내기는 부끄러운 말이라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내진 않았으되, 새로운 검식을 만들기 위해 내가 골몰하는 것을 다들 눈치채고 한 손이라도 보태려 애를 썼다.
그 모습이 귀엽고 어여쁘기만 했다.
의외로 이 작업에서는 묵묵히 그림자처럼 나와 함께 다니는 벤자민 클라우디안, 시꺼먼 머리에 금색 눈을 한 그 곰 같은 친구가 꽤 도움이 되었다.
이미 지학의 나이에 일류의 경지에 다다른 고수인 그는 시어런의 많은 검술 유파들을 이미 몸으로 익히고 머리로 배워 알고 있었다.
단단하게 단련된 팔다리를 보아 외공에 힘을 쏟고 있는 줄로는 알았으되 머릿속에 든 것이 이리 많을 줄은 몰랐기에 적잖이 놀랐다.
연무장 흙바닥에 선을 몇 그어놓고 각 검식을 분류하며 골몰하니 우리 하는 것 보던 마엘로 샌슨 교수가 다음 수업은 실내 강의동에서 필기구를 갖추고 하자 하여 그러기로 약속하였다.
연금술 수업에서는 마리앤이 내 멱살을 잡았다.
“대화로 잘 풀었다면서요! 무슨 대화예요, 그게! 몸의 대화?!”
“아니, 잠깐, 마리앤. 왜 이래! 미안해요, 미카엘! 얘가 자주 미쳐서!”
“아, 좀 놔 봐, 제니! 미카엘 정말 죽으려고 환장했어요?!”
“손, 손은 좀 놓고! 마리애앤!”
무슨 일 때문인지 모르는 연금술과 야영 수업의 같은 조 인원들이 쩔쩔매며 마리앤을 떼어 내려 애를 썼다. 제니는 마리앤의 허리를 뒤에서 끌어안아 당기고, 데미안은 내 멱살을 잡아챈 마리앤의 손목을 잡아 풀어내려 애쓰는 식이었다.
그러나 힘이라고 해 봐야 병아리 날갯짓만 한 셋이 아무리 매달리고 날뛰어봤자 꿈쩍할 이 몸이 아니었다. 오히려 손 뻗으면 아해들이 다칠까 봐 묵묵히 서서 펄펄 뛰는 마리앤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냐고 묻지는 않았다. 까닭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별 대단한 일도 아닙니다.”
“그럼 뭐가 대단한 일인데요!”
“수업 시간에 보라색 단발머리 남작가 영애가 백작가 영식의 멱살을 잡아 흔드는 일?”
“이이이익⋯!”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니까, 놓으세요.”
흥분한 짐승도 상대가 계속해서 침착한 태도를 보이면 곧 진정이 되기 마련이다. 별말 없이 피하지도 않고 목소리도 높이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더니, 결국 마리앤은 내 멱살을 놓았다.
당황한 데미안이 내 옷깃을 정리해주는 것을 손등으로 밀어 막았다.
멀거니 서서 구경하던 이반이 이마를 짚으며 두통이 있는 척하는 것이 퍽 우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