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소년은 흰 낯으로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단정히 빗어넘겨 느슨하게 묶은 머리는 등 뒤로 길게 늘어뜨렸고, 양 귀 앞으로 길게 내려온 귀밑머리가 쇄골을 가로질러 아래로 뚝 떨어지는 모양새가 중원의 것과 흡사하였다.
그러나 에드윈의 연보랏빛 머리터럭도 적금빛 눈알도 그 색이 유난하였다. 막 수업이 끝난 시각이라 저물어가는 햇빛을 받아 더욱 오묘한 빛이었다.
“내가 너랑 싸우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아닙니까?”
제 입으로 아니라는 말을 못 한다. 녀석을 도발할 생각은 없었기에 그저 단단한 자세로 서서 녀석을 바라보았다.
에드윈과 내 사이의 거리는 딱 여덟 보였다. 내 간합에 들어 온 것이다. 도움발을 딛고 천풍의 묘리로 쏘아 발검하여 휘두르면 일 초에 녀석은 목이 베일 것이다.
나 또한 녀석의 간합에 들어 있을지가 궁금하였다.
아마 그가 생각한 내 반응은 이런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곳에 나를 데리고 오는 동안 녀석의 걸음은 앞꿈치나 뒤꿈치가 먼저 닿는 대신에 용천혈이 눌리도록 바닥을 꾹 딛는 걸음이었다. 분기가 이는 것을 참으려 지르밟는 걸음을 걷는 아해가 할 말이야 빤한 것이다. 어떻게든 분을 풀어내려 했겠지.
그러나 나는 말로 싸우는 것에는 자신이 없었다.
“저도 궁금하긴 합니다, 선배.”
대답 없는 소년을 올려다봤다. 어린 아해들에게 한두 살의 나이 터울은 꽤 큰 차이를 빚어냈다. 나는 녀석보다 시선이 낮아 그의 금안을 올려다보아야만 했다. 그래서 녀석이 고개를 숙여도 그 얼굴과 표정이 똑똑히 보였다.
거추장스럽게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다시 손으로 빗어 쓸어올렸다. 녀석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뭐가.”
“선배가 어떻게 싸우는지.”
소년, 에드윈이 고민하는 기색을 손으로 잡아챌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녀석은 정당한 대련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태어나자마자 제 형을 눈앞에 보이지도 않는 적으로 두었고, 비꼬고 비아냥대면서도 주먹질할 수 없는 상대들을 적으로 두었다. 돈을 가지고 가문의 위세를 부리는 것을 두고 어찌 싸움이라 할 수 있겠나.
소년이 대꾸가 없고 얌전하여 그냥 나 궁금한 것이나 묻기로 했다.
어쩐지 순순히 대답해 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서클이 몇인데요.”
“5서클.”
“5서클이면, 검술에 비유하면 어느 정도입니까?”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
“몇 서클이 끝인데요?”
“너 지금 나한테 수업 듣니?”
잘 대답해주다가 휙 사나워지는 눈초리에 그만 웃음이 났다. 아뇨. 대답하며 적당히 고개를 내젓자 에드윈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는 또 무언가 생각하는 기색이길래 그러라고 두고 그 앞에 서서 주변 구경이나 하였다.
검술부의 나무들이 죄다 높고 커다란 것들이라면, 마법부의 것들은 그 키가 낮았다. 다년생이라도 검술부의 것보다 흔한 것을 가져다 두었다.
누가 이곳에서 불놀이라도 했는지, 여기저기 동그랗게 그을린 자국이 보이기도 하였다.
모닥불을 피워 놀이판을 벌였을 이들을 떠올려 보았다.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고민하던 녀석이 똑바로 나를 응시하였다. 무예를 수련하지 않은 일개 소년의 시선 정도야 기감을 펼치지 않아도 곧장 알아챌 수 있기 때문에 나도 곧장 그 눈으로 시선을 두었다. 녀석은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대로 겪어봐야 그 건방진 태도를 고치겠지. 그래, 하자. 싸움.”
“예.”
“⋯대련 아니라 싸움이라고, 알아들어? 네 그 머리털부터 발끝까지 싹 태워 버릴 거야.”
“날짜는?”
“⋯교수님 허가가 떨어진 다음에 알려줄 테니까 작작 좀 물어봐. 짜증 나게 굴지 말고.”
곧장 대답할 수 없는 일을 물어 민망했던 모양이다. 녀석이 작게 시근거렸다. 그러나 단둘이 되는 그 순간부터 언제 공격이 날아올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기감을 북돋아 둔 내 귀에는 그 숨소리가 크고 사납게 들렸다.
대련 한 번 하기 전에 대련장을 빌린다 하는 모습을 보니 당장에 공격할 것 같지 않아, 고개를 까닥하여 인사하고 뒤돌아 자리를 떠났다. 내가 얼마나 싫은 것인지 눈앞에 더 있다가는 그대로 꼴딱 숨이라도 넘어갈 것처럼 보였던 탓이다.
궁금하던 찰나에 좋은 대련 기회를 얻을 수 있어 마음 한켠이 흐뭇하였다.
남들 하는 이야기만 듣고 아닌 줄로만 알았으나, 역시 에드윈의 하는 말이나 행세 따위가 모용공자를 똑 닮았다. 그도 꼭 저렇게 앵돌아서 시근거리며 짜증이란 짜증은 다 부리고, 대련 한 번에 마음이 사르르 풀리는 사내였다.
연치 어린 소년들은 원래 다 싸우면서 자라게 되어 있는 법이다.
저녁 식사 시간이 끝난 뒤, 마리앤이 조용히 찾아왔기에 둘이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에드윈이 저를 불러 힘든 일은 없었는지를 한껏 걱정하며 묻기에 별일 없었고 대화로 잘 풀었으니 걱정할 것 없다 하였다. 그 얘기를 들은 마리앤이 한참을 이쪽에서 저쪽까지 왔다 갔다 하며 수선을 부리다가 이상한 물음을 하였다.
“그, 미인계가 정말 통한 거예요?”
“미인계라니, 그 무슨 해괴한 말입니까.”
“아니 오늘 갑자기 그랬잖아요. 막 평소처럼 안 들어오고, 문을 쾅 열고 들어오는데 머리칼은 축축하고 얼굴은 반짝거리고, 어디서 성수라도 맞고 온 사람처럼 해서는 자꾸만 막 숨을 이렇게 쉬고 막 옷도 딱 붙어서⋯."
"무슨 소리예요. 안 그랬습니다."
"아니, 그, 막, 하아⋯ 하고 손으로 얼굴 쓸고, 막 그러더니 갑자기 머리는 또 쓸어 넘기고!"
"거추장스러워서 그랬습니다. 머리가 젖어 눈에 걸리기에. 애초에 아무리 내가 어리다 해도 사내인데 미인계가 말이 됩니까. 얼굴은 땀이 나기에 닦은 겁니다. 이상한 소리 말아요."
아이 말에 따르면 오늘 하루 수업 시간의 내가 음탕함이 지나쳐 사람의 간을 빼어다 먹는 요괴와도 같기에, 질색하며 내 연치를 생각하라 꾸짖어 깍듯한 사과를 받았다.
단둘이 대화할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어도 본디 마리앤이 동무들 중 유달리 호들갑스러운 것은 알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아도 한숨 쉬어 넘겼다.
어떻게 동편 제3 연무장에서 그 교실까지 뛰어올 생각을 했냐, 몇 분이나 걸렸냐, 당신이 사람이긴 하냐 수선부리는 것을 적당히 받아주며 막 꽃이 움트기 시작하는 정원 사이를 걸었다.
말 많고 웃음도 많은 아해를 옆에 달고 걸으니 적적하지는 않아 좋았다.
* * *
고급 검술 시간, 루베르를 마주쳤을 적에 내게 무엇을 원하고 노트를 준 것이냐 물었더니, 뭘 바라고 준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달라 신신당부하였다.
역시나 쉐이든의 말이 늘 옳은 것은 아니었다.
루베르가 이르길, 꼭 내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싶어 애써 정성 들여 다시 정리한 노트라 하기에, 충분히 많은 도움이 되었다 대답하였다. 그가 황자라고 일부러 위세를 부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자 마음이 낙낙하고 흐뭇하였다.
이미 완성된 노트를 갖고 있기는 하였으나 제 공부하는 것과 시험공부를 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이라, 교양 세계사 수업을 듣는 중에는 딴짓하지 않으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전보다 해이한 마음을 갖는 것은 어쩔 수 없어 교재에 나와 있는 섬세한 그림들에 시선을 빼앗겼다.
시어런은 중원과 시서화를 다루는 방식이 전혀 달랐다.
저 또한 그림에 대하여 아는 것이 하나도 없지만, 중원에서 귀한 그림이라 하여 벽에 거는 것들은 큰 여백에 강인하고 준엄한 필치로 곧게 뻗은 선들이 유난한 수묵화가 많았다. 산과 강의 기운을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거나 혹은 올려다보는 것과 같은 섬세한 농담의 풍경도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곳의 동화책 삽화들은 아기자기한 동물과 꽃을 두꺼운 선으로 그려 놓았고, 만화책이라 하여 그림으로 말을 하는 책자에는 사람인 듯 인형인 듯 동글동글하고 팔다리가 달린 것들이 저마다 자그마한 칸을 차지하여 폴짝대거나 움직이며 재치를 보였다.
또 놀랍도록 섬세하고 우아한 선으로 실제 사람을 그대로 화폭에 박아 넣은 듯 똑같이 그리는 일도 있었다.
그중 가장 신기하고 경탄스러운 것은 마지막, 실물과 꼭 닮은 것들이었다.
나 또한 어릴 적부터 몇 차례 초상화를 그린 적이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장인들이 제 키만 한 화폭에 인물들을 담는 데에는 한 달이 꼬박 걸렸다.
꼼짝도 하지 않고 같은 자리에 같은 동작으로 앉거나 서서 지루한 시간을 소소한 한담을 나누는 것으로 흘려보낸 뒤, 하루에 한 부분씩 완성되어가는 화폭을 구경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었다.
중원에서 화가를 만나 볼 일이 없어 맞대어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사용하는 물감을 일일이 기름에 개어 준비해 온다는 것을 알았을 적에 얼마나 고생스러운 직업인가 하여 경탄했던 기억이 있다.
올해에도 하나 그린다 하였는데 일이 많아 어찌 시간이 날는지 모르겠다.
문득 궁금하여 쉐이든에게 로제 백작가는 초상화가 몇이나 되는지 물으니 수로 헤아릴 수는 없고, 그저 매해 한 장씩 그린다 하였다.
여름에는 날이 무더워 물감을 사용하기가 적합지 않고 화려하게 옷을 입으면 무겁고 더워 힘이 드니 겨울에 주로 초상화를 그린다 하는 것까지 에른하르트의 방식과 똑같기에 이게 이 나라의 풍습인 것 같아 겨울에는 본가에 한번 들러야겠다 마음먹었다.
금번 제국의 계보 시간에는 안 그래도 깡마른 칼립스 아그리젠트 교수가 평소보다 더욱 휘청휘청하며 교실에 들어섰다. 상대를 깔아 내려다보는 듯하던 눈초리도 힘이 빠져 있었다.
악을 써서 제 몸 힘든 것을 가려 보려 하는 듯하였으나 날 포함하여 안력이 좋은 검술부 학생 몇몇은 알아채어 걱정스러운 낯을 했다.
아그리젠트 교수는 평소보다 조금 더 갈라지는 목소리로도 평소처럼 수업을 진행하였다.
그를 보니 이러한 정보를 다루려면 이 정도의 긍지와 사명감을 가져야 하는구나 싶어 감탄이 절로 일었다.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현재 시어런 제국의 공작가는 총 다섯입니다. 숲의 위드로, 검의 키아드리스, 강의 옐디더스, 평야의 발렌티아, 철의 그림스베인. 이렇게 5대 공작가가 327년 전 전 대륙에 두 발을 딛고 선 모든 사람을 위한 개혁을 구상하였고, 42년간의 고행 끝에 지금의 시어런을 만들었습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귀에 설던 이름자들이 이젠 익숙했다. 어쩐지 오른손 검지가 얼얼했다.
“⋯다섯 공작 중 넷은 황궁에 출퇴근하여 현직 재상의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만, 카를로스 위드로 공작은 바로 지난달 은퇴요청서를 제출하였습니다. 현재 위드로의 이름을 받을 수 있는 자는⋯.”
백작가 이하 전원의 정보를 모조리 수집하고 학습하는 것보다 공후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좀 더 마음 편한 모양인지, 아니면 이미 절반 이상은 알고 있는 이야기인 탓인지 학생들의 집중도가 높았다.
시어런에 다섯 공작이 있다는 것은 알았으되 그 이름자에 깊게 신경을 써 본 적이 없어 별생각 없이 노트에 이름자들을 받아적다가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