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본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에드윈을 불러 대화를 나눌 생각이었으나, 오늘따라 꼴이 지저분하여 안 그래도 저를 싫어한다는 아해를 부르기가 저어하였다.
수업 중간중간 마법부의 학생들이 제 쪽을 자꾸만 바라보는 것을 알았다. 이제 무시하기 작전은 그만둔 것이 분명한데 이다음 작전이 무엇인지 도저히 눈치를 챌 수가 없었다.
설마 안 보는 것으로 괴롭혔으니, 이번엔 바라보는 것으로 괴롭히겠다는 발상인가?
조금도 괴롭지 않았다.
날 괴롭히는 방법을 굳이 꼽자면 직접적인 타격을 주거나 아니면 물리적으로 어딘가에 가둬버리는 것 외에는 효과가 없었다. 물론 그런 함정이라면 아무리 상대가 마법을 써도 파훼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무림맹 용봉지회에서 잠시만 기다려 달라 하더니 연무장 위에 네모난 돌 넉 장과 나뭇가지, 그리고 옥돌 스무 개로 안개를 불러일으킨 제갈 아무개를 떠올렸다. 녀석은 일 각 만에 엄청난 안개를 피워냈으나 긴장한 숨소리를 숨기지 못하여 내게 패했다.
그러나 곧, 숨 쉬듯 불과 물을 일으키고 뒤흔들린 기혈을 회복시킨 앤젤라 스팅 교수도 떠올랐다. 마법 공격이라⋯.
금일도 시키는 대로 대기의 마나를 불러 쓸데없이 중단전을 휘돌게 하였다가 내보내는 행동을 하면서 다른 학생들의 시연을 봐주는 앤젤라 스팅 교수를 기다리다가, 문득 궁금한 것이 있어 옆자리 학생을 툭 건드렸다. 제게 그 수정 구슬을 건넸던 학생 중의 하나였다.
그가 소스라치게 파드득 떨어 떨며 놀라 도리어 제 쪽이 의아할 지경이었다.
“왜 그렇게 놀라?”
“어? 어어. 아니, 아무것도. 뭔데?”
“에드윈 키아드리스가 몇 서클인지 알아?”
소년은 입을 딱 닫았다.
저를 바라보는 시선의 수가 늘어났다는 걸 알았다. 여태 흙과 먼지로 헝클어진 머리칼을 대강 쓸어 넘기며 주변을 한 바퀴 빙 둘러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학생들 중 몇은 시선을 피했으나, 몇은 그대로 저를 보고 있었다.
물론 그 시선 중에 가장 열렬한 것은 제게 에드윈의 시꺼먼 속내를 명명백백하게 밝혀 알려 준 마리앤 필로덴도르의 것이고, 두 번째로 열렬한 것이 제가 화두로 삼은 에드윈 키아드리스의 것이었다.
“⋯그건 왜?”
“아니, 그냥 궁금해서. 몰라?”
“⋯모, 몰라.”
“그래?”
제게 해를 끼치지 않은 다른 학생을 겁먹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수업 중에 몸을 일으켜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도 않았다.
일전에 에드윈이 펼쳤던 적금빛의 서클이 아직도 뇌리에 선명히 박혀있었으나, 보이는 것이 서클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배워 알게 된 지금은 어쨌든 꽤 강한 편이겠거니 할 뿐이었다.
그가 빚어낼 공격 마법이 궁금하였다.
시어런의 동화책에서 읽은 바에 따르면 공격 마법은 불덩이나 물덩이를 날리고, 바람을 불게 하고, 땅을 흔들리게 하는 것이라 하였다.
중원에서는 그런 것이 가능한 이를 신선이라고 불렀다. 도사 중의 도사라던 곤륜파 장문도 그런 일은 꿈을 꾸지 못하였는데, 참 신기한 세상이었다.
씨도둑질은 못 한다고 하지 않는가. 제 형에게 비교되는 것이 싫어 검술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지만 비범한 자질을 지닌 놈이 악에 받쳐 파고들어 연구하였을 마법이다.
만약 불덩어리가 날아온다면 검으로 받아낼 수 있을지 궁금하였다. 불덩이는 아니더라도 너른 강호에 검기를 화살처럼 쏘아내는 놈은 본 적이 있었다.
강은 강으로 부딪혀 깨뜨리고, 유는 유로 돌려 밀어내는 것이 답이다. 마나를 이리저리 꼬고 감고 휘어 불을 빚어낸 것이라면, 또 마나 혹은 내공으로 깨뜨리거나 밀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고심하였다.
지난 수업에 과제로 내주었던 수식을 모두 점검한 뒤, 스팅 교수가 단상에 섰다.
어린 염소처럼 가엾고 끝이 늘어지는 목소리를 애써 굳게 하며 이번 수식은 절대 혼자 연습하지 말라 단단히 경고부터 하였다. 안 그래도 위험한 마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골몰하여 궁금하던 차라 자세를 추스르고 또다시 책상 위에 절로 생겨나는 유인물을 꼼꼼히 살폈다.
그나마 알아볼 수 있는 것이 몇 있기는 했다.
가장 끝에 있는 것이 끝맺음하는 알파 수식이고, 중간중간에 마나를 끌어모으는 데 필요하다는 결집의 문양이 세 개나 있었다.
이것이 분사, 이것이 증폭⋯ 그렇게 딱 네 가지를 제외한 스물하나의 술식은 전혀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제 길의 것이 아니라 마음이 상하지 않고 궁금하기만 하였다.
“⋯이게, 새 창조의 술식이에요⋯. 마물의 기운으로 흐트러져 상한 대지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고⋯ 풀과 나무가 자라날 수 있도록 하는 술식이에요. 2클래스부터 사용할 수 있지만⋯ 필요한 마나의 양이 무척 많기 때문에⋯ 물약과 보조 도구를 사용하지 않으면⋯ 아주 큰 일이 생길 수 있어요⋯.”
“네에.”
“이 술식은 단독으로는 잘 사용되진 않고, 아티팩트를 생성하는 데에 주로 사용되지요⋯. 혹시 제가 이야기한 아티팩트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학생이 있나요⋯?”
어느 똘똘하게 생긴 소년 하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스팅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소년이 곧장 낭랑하게 대답하였다.
“새 창조의 술식을 사용하는 아티팩트의 이름은 방수림의 근원입니다. 특수 제국기사단이 북쪽 산맥의 마물을 토벌한 뒤 마물의 시체를 거름 삼아 나무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흩뿌려두는 물건으로, 그 크기는 어린아이 주먹만 하고 무척 가볍지만, 근방의 오 미터를 정화할 수 있습니다.”
“⋯아주 훌륭한 설명 고마워요, 그레고리.”
뿌듯한 표정의 소년이 입을 닫자 스팅 교수는 자신의 로브 주머니에서 동그란 물건 하나를 꺼내어 보였다. 엄지와 중지를 맞닿게 하면 나오는 원. 딱 그만한 크기였다. 그 색은 황동을 닮았고 윤기는 탁하여 멀리서 본다면 그저 흙뭉치나 돌덩이로 보일 것 같았다. 교수는 이어 설명했다.
“이것이⋯ 조그만 크기에 스물다섯 겹의 술식이 스물다섯 번 들어간, 문명의 정화⋯ 방수림의 근원이에요⋯. 끝없이 필요로 하는 소모품이기 때문에⋯ 이후 우리 학생들이 급하게 돈이 필요할 때⋯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예요⋯.”
저 조그만 것에 무엇이 들어 있다고? 절로 내 앞에 놓인 유인물과 아티팩트를 번갈아 보게 되었다.
“수도의 제1 마탑, 제2 마탑 뿐만 아니라⋯ 지방 행정 자치구의 3, 4, 5 마탑에서도⋯ 언제나 새 창조의 술식을 새길 마법사를 환영하고 있으니까⋯. 여행을 가서 돈이 떨어지면, 여기 여러분은 마탑을 먼저 찾아가기로 해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이었다.
내 관심이 닿는 곳은 조금 다른 쪽이었다. 이 평화로운 땅에 어쩐지 수준 높은 강자가 많고, 무를 숭상하는 기조를 보이는 단체가 많다 하였더니 내 생각보다도 몬스터 따위의 세가 강성한 모양이었다.
아무리 이 아티팩트라는 것이 조그마한 물건이라도 그렇게 많이 흩뿌리고 다니려면 짐이 무거울 터, 움직이기 거추장스럽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먼저 들었다.
자연스럽게 그 산맥에 있는 제 미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기기묘묘하고 아름다울 황궁의 모습은 상상할 수 없어도, 몸이 반으로 갈린 적들이 늘어서 있는 거뭇한 땅에 이들이 말하는 동그란 구슬을 이리저리 흩뿌리며 동료들을 살필 제 모습은 또렷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자, 그럼⋯ 일단 여기 몬-스테오-오스 형태 분석부터 시작해 볼게요⋯? 위에 찍힌 두 개의 방점에 꼭 주의해야 해요. 이 점이 없으면 술식이 아예 발동하질 않으니까⋯.”
성실한 자세로 집중하여 수업을 들었다. 가장 처음 시어런에 태어나 말구유를 닮은 높은 침상에 누운 채로 듣던 유모와 시녀들의 재잘거리는 목소리를 듣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때의 저는 웃는 것은 웃는 것이라 알아보았고, 저를 부르는 것은 저를 부르는 것이라 알았지만, 그들끼리 나누는 이야기의 태반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지금이 딱 그러했다.
강건한 몸이라 수업 중에 졸거나 자세가 흐트러지는 일은 없었으되, 이해할 수 없는 말을 계속해서 듣고 있자니 지루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빼먹거나 흘려 먹으면 안 된다는 부분들의 모양이라도 익혀두려고 칠판에 판서 중인 기호와 유인물의 기호를 번갈아 보며 골몰하였다.
그래서 수업이 끝나고 에드윈 키아드리스가 나를 불러 세웠을 적에는 지쳐 피로한 탓에 의아하기만 할 뿐, 뭘 어째야겠다 하고 생각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미카엘 에른하르트. 잠깐 나 좀 보지.”
“예, 선배.”
어쨌든 한 학년 위의 소년이라 곧장 대꾸하였다.
땀에 젖었다 마른 터라 그 모양이 엉성할 머리칼이 이마를 덮는 것이 싫어 한 번 더 쓸어올렸다. 에드윈이 그런 저를 노려보다가 휙 몸을 돌려 앞장서 걸어갔다.
어딘가 조용한 곳으로 가자는 것이 분명한 태도이기에 그 뒤를 쫓으며 무슨 말을 하려나 고민했다.
마법부 건물과 검술부 건물은 꽤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동편 끝 검술부 이론 수업 강당에서 서편의 마법부 교실까지는 무술을 배우지 않은 사람이라면 한 시간 반은 꼬박 걸어야 겨우 닿을 거리고, 내 걸음으론 오십 분이 걸렸다.
경공으로 내달렸어도 십오 분 안쪽으로는 들어설 수가 없어 오늘도 지각할 뻔하였는데, 더 먼 곳까지 굳이 가 볼 일이 없었다.
마법부 건물 뒤, 울타리를 건너 멀찍이 마탑이 보이는 너른 잔디는 처음 밟아보았다.
검술부에서는 공터란 공터는 조경해 두어도 그 가운데에 흙바닥이나 돌바닥을 깔아 연무장으로 사용하는데, 마법부는 멀쩡하였다. 그저 피크닉을 하기 위한 장소로 사용하는 건가 생각하였다.
그러다 문득 알아차렸다. 제가 에드윈을 부르면 제가 할 말을 골몰해야 했을 것인데, 에드윈이 저를 부른 덕분에 저는 그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옳다 그르다 정도의 판단만 하면 되었다.
마리앤이 저를 붙잡고 에드윈이 위험하다 나쁘다 앵앵거린 소리야 분명히 들었지만, 그가 위험해봤자 제 목을 치겠는가, 팔다리를 자르겠는가.
에드윈이 멈춰 서기에 저도 멈춰 섰다.
그는 이쪽을 바라보지 않고 돌아선 채였다. 그의 곱게 빗어내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머리칼을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그가 화산파 장로도 아니고 저런 식으로 뒷모습을 보이며 선배인 태를 내어야 하나 싶었으나 묵묵히 그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서론 없이 문득 묻는 물음은 대답하기 쉬운 종류의 것이었다.
“내 서클이 왜 궁금해?”
“그 수업을 듣는 학생 중에 선배가 가장 강할 것 같아서요.”
“뭐?”
“지금 계속 배우고 있는 술식은 전부 간지러운 것들뿐이잖습니까. 정화, 보안, 새 창조⋯. 그런데 선배는 싸울 줄 아는 사람처럼 보여서 물어봤습니다.”
상정한 답이 아니었는지 소년이 몸을 돌렸다.
얼굴을 마주 보니 이제야 사람과 대화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저를 바라보는 눈에는 미미한 투기(鬪氣)가 서려 있었으나 그 경지를 가늠하기 어려운 건 매한가지였다.
무인끼리는 대련을 하지 않고도 상대의 경지가 낮은지, 저와 비슷한지, 아주 고절하여 대볼 수도 없는지 따위를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마법사는 다르다.
자연의 마나를 끌어와 제 몸 안에서 굴려 맘껏 사용한 뒤에 또다시 자연으로 흩어 보내기에 몸에 흔적이 남지 않았다. 제가 살펴볼 수 없는 그의 마나 서클이 얼마나 연약한지 얼마나 단단한지는 쓰는 마법을 보아야 알 수 있겠다 싶었다.
결국 나는 한 마디 덧붙였다.
“저랑 싸우고 싶어 하시는 것도 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