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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28화 (28/176)

28.

주말에는 미리 약속했던 대로 쉐이든과 함께 도서관으로 향했다.

이제 일주일만 더 머무르면 아카데미에서의 생활도 꽉 채운 한 달이 되었다. 엊그제 처음 도착한 것 같기도, 일 년은 이곳에서 산 것 같기도 하였다.

수업을 듣고 훈련에만 열중하였다 생각했는데 의외로 구석구석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 도서관이 특히나 그러하여, 이런저런 책을 찾아보느라 하도 돌아다녔더니 이제는 제 침실처럼 익숙하였다.

일전에 앉아 공부한 적이 있던 그 너른 탁자 자리가 비어있기에 같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쉐이든에게 교양 세계사 판서 노트를 빌려 중요한 표시가 적혀 있는 것을 옮겨 적다 보니 이 먼 땅에서 무슨 부귀영화를 보자고 이 나이에 남의 나라 역사서를 무공비급인 양 달달 외우고 있나 싶어 울컥 서러워졌다.

엄지로는 지끈거리는 태양혈을, 검지와 중지로는 자꾸만 찌푸려지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이제는 제 나라말처럼 익숙해진 지 몇 해가 넘은 대륙 공용어를 들여다보았다.

신문이나 서책에는 매우 익숙해져서 문맹은 벗어났다 생각하였는데, 법전 용어가 나오기 시작하니 차라리 장강수로채(*장강을 활동 구역으로 삼는 수적 단체) 토벌을 하지 싶었다.

일반 산채를 토벌하는 것과 달리, 넓디넓은 장강의 어드메에 박혀있는지 알 수 없도록 매번 은신처를 바꾸는, 수상하게 개조한 나룻배와 범선들로 잔뜩 무장한 수채는 일단 배가 없으면 찾아가기 힘들다는 아주 큰 단점이 있었다.

그래도 한때, 황보 그 친구가 쓸데없는 데에 내기를 다 걸어 깜빡 속아 넘어갔을 어느 여름 때에⋯.

“미카, 자?”

“⋯아니, 안 자.”

이곳에서 몇 해를 살았는데도 제 나라 역사라는 생각이 안 드는 건 그저 세월의 풍파를 덜 맞아서일까, 아니면 이 해괴한 연회 풍습 탓일까.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의 어느 데뷔탕트에서는 사교계 입문하는 처자들이 같은 색의 옷을 입어야만 했는데, 어느 왕녀가 제 권위를 앞세워 다른 색의 드레스를 입어 돋보이려 하였다가 난리가 나, 법정 싸움까지 옮겨갔다는 대목을 보고 있자니 이런 미친 세상이 다 있나 하였다.

영 죽상이었던 모양인지 쉐이든이 힐금힐금 보며 어쩔 줄 몰라 하였으나, 그가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바로 어제 지나치게 돕지 말라는 소리를 제 입으로 한 터라 도움을 청하기도 멋쩍고 민망하여 모르는 체하였다.

후, 길게 숨을 몰아내고 다시 한번 심기일전하여 펜을 드는데, 테이블의 맞은편에서 슥 노트 하나가 이쪽으로 밀려왔다. 학생들 돌아다니는 것이 당연한 장소라 구태여 다가서는 인기척을 신경 쓰지 않았던 터라 의아하여 고개를 들었다.

또 그 갈까마귀 같은 놈이었다.

“요새 자주 보는 것 같네.”

“⋯안녕하세요, 선배.”

“카사블랑카 교수님의 교양 세계사 수업 맞지? 작년이랑 수업 내용 같다고 들었는데.”

“예, 맞긴 한데⋯.”

“나 필기 열심히 해 뒀어, 이거 써.”

서로 무언가를 교환할 만큼 친밀한 사이가 아니어서 잠시 멈칫했다가, 일단 제 손에 들어 온 노트를 천천히 한 장, 한 장 넘겨보았다.

앞자리에 앉지도 않고 선 채로 책상 위에 손을 짚은 루베르가 검지를 곧게 펴서 파란 펜으로 표식을 남긴 부분을 하나하나 짚어주었다.

“이거랑 이건 시험에 나왔던 부분들 표시해 둔 건데, 지금 보는 메리사 플로이드 왕녀 사건은 다 외울 필요 없이 국가명이랑, 노란색 염료의 가격이 폭락한 것. 이 두 개만 기억하고 넘기면 돼.”

“⋯!”

⋯또다시 제가 아직 뭘 몰랐구나 하였다. 체기가 가셨다.

그래, 이 아카데미의 모두가 한 문파라면 한 항렬 낮은 동문에게 이 정도 배려는 누구나 해 줄 수 있는 범위의 것일 터였다.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는 노트가 구원처럼 여겨졌기에 감사합니다. 까닥 고개 숙여 인사하며 노트를 받아 챙겼다.

그러나 그 뒤로도 한참 나를 내려다보는 까만 시선이 떨어지지 않아 의아했다.

“왜요?”

“⋯어, 그냥 입 닦는 거야?”

“예?”

“⋯아, 아니야. 그, 시험 잘 봐.”

“예, 감사합니다.”

아직 시험 때는 한참 남았는데, 미리 준비하라고 챙겨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일류무인인 루베르가 그럴 리가 없는데도 어쩐지 멀어지는 걸음이 균일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져 잠깐 걱정이 들었다. 몸이 어디 안 좋은가.

하긴, 요새 은근히 기가 약한 모습을 자주 보이는 것 같기도 하였다. 날이 급하게 따뜻해지니 감모(*감기)라도 든 모양이지.

옆에 앉아 있던 쉐이든이 눈 뜬 채로 넋이 빠져 있기에, 조금 전 당한 물음의 보복으로 그 어깨를 툭 건드리며 물었다.

“자냐?”

“너 미쳤어?”

“갑자기?”

차마 도서관에서 큰소리를 낼 수 없다느니 하며 공부하겠다고 챙겨온 것을 바리바리 싸서 나가자 하는 쉐이든을 따라 짐을 챙겼다.

오늘 내내 판서를 옮겨적을 생각이었다가 공으로 좋은 노트가 생겨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쉐이든의 변덕 정도는 좀 맞춰 줄 요량으로 별말 없이 따라 나왔다.

다만 도서관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잔소리가 시작되는 것에 제가 뭘 그리 잘못하였나 싶어 또다시 얼이 빠졌다.

몇 번의 멍청한 질의응답이 오간 뒤, 이렇게 개인이 적은 노트는 아카데미 내에서도 무공비급 취급을 받는 것이고, 심지어 그것을 베푼 쪽이 루베르 안티 시어런이기 때문에 좀 더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든가, 무언가 대가를 베풀었어야 한다는 설명을 듣고 나서는 또 기분이 묘해졌다.

아니, 본인이 주고 싶어서 준 걸로도 감읍하여야 하나. 정작 루베르는 별 불만 없이 평소처럼 비실비실하게 잘 돌아가지 않았나. 황자면 예비 소백작인 저보다 돈도 많아 특별히 받아 갈 것도 없을 터인데.

바로 전날 제 내공심법을 타인에게 전수하는 것을 포기하였기 때문에, 제가 알고 있는 것 중 쓸만한 무공을 뽑아낼 생각도 나지 않아 시들하였다.

대강의 중요한 이야기는 다 들은 것 같아 뒤에 이어지는 잔소리를 적당히 흘려듣기 시작하자, 이미 그런 태도에 익숙한 쉐이든도 금방 화제를 바꾸어 물었다.

“2황자님이랑은 어떻게 친해진 거야?”

“⋯친한가?”

“갑자기 찾아와서 판서 노트 챙겨 줄 정도면 친한 거지, 그럼.”

“글쎄, 방해한 게 미안했나⋯.”

“뭘?”

“새벽에 몰래 연무장에서 수련하다가 들킨 적이 있어서.”

최근 생각나는 것이라고는 저 홀로 달밤에 칼춤 추려는 것을 방해한 것 외에 기억나지 않아 대충 대답했다. 고급 검술 시간에 이야기 해 본 적 있냐 묻기에 아니라 답하고, 함께 식사한 적이 있는지 묻기에 또 아니라 하였다.

정말 달밤에 수련을 방해받고 각기 방으로 돌아간 정도가 다라는 설명을 세 번이나 하게 만들고서야, 쉐이든도 결국엔 찝찌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는 끝끝내 한 소리를 덧붙였다.

“⋯소드 익스퍼트 상급쯤 되면 그런 것도 미안해하고 그러나 보다. 난 아직 잘 모르겠네.”

* * *

일요일에는 도서관에서 2황자를 볼 수 없었다.

또다시 월요일이 돌아왔다.

아침에 연무장을 달릴 적에는 오후에 있을 마법 수업에 에드윈을 어떻게 보나 싶어서 영 머릿속이 혼란하였는데, 마엘로 샌슨의 얼굴을 보자마자 복잡하던 것이 싹 나았다.

새로이 익힌 다섯 개의 초식뿐만 아니라, 제가 가지고 있는 초식들을 전부 꺼내어 마엘로 샌슨에게 선보이기 시작한 탓이다.

남궁의 검이 아닌 것들도, 중원에서 자주 보아 눈에 대충 익은 것들을 그 묘리 없이 검세나 검로만 흉내 내어 보이면서 혹 얻어갈 것이 없는가 하여 먹이 찾는 짐승처럼 헐떡거렸다.

그 덕택에 뜬금없게 초급 검술 수업을 받는 전원이 모두의 앞에서 각자가 가진 검식을 보여주고 설명하는 시연회 비슷한 것이 열렸는데, 샌슨의 설명이 곁들여지자 무척 흥미로워졌다.

새로운 수업방식을 마엘로도 꽤 기꺼이 여겼으므로, 모두가 모두의 검식을 직접 따라 해보는 시간을 가지느라 다들 시간을 잊었다. 원래 끝마칠 시간을 훌쩍 넘어서, 시간을 깨달았을 적에는 마법 수업 시간이 코앞에 닥친 시간이었다.

ㅡ드르륵, 쾅!

내공을 한껏 끌어올려 최대한의 속도로 경공을 펼쳤다.

새 몸을 가진 뒤로 꾸준히 단련은 하였으나 경공을 사용한 지도 오래되었고, 다리 길이가 왕년에 비해 부족하여 숨이 턱에 닿았다.

몸에 힘이 들어가 저도 모르게 거세게 문을 열어버렸다. 문이 부서지지 않아 다행이었다. 제게 쏠리는 시선을 알았으나 눈인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쳐다보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일전에 들었기에 굳이 신경 쓰진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지각은 면하였으나, 앤젤라 스팅 교수가 저보다 먼저 교실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에 면목 없었다. 진심을 가득 담아, 최대한 깍듯하고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사죄하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에요⋯. 어디에서부터 달려왔어요⋯?”

“동편 제3 연무장에서 왔습니다.”

“아아⋯.”

순간 앤젤라 교수가 아주 가여운 것을 보듯이 안쓰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기에, 다시 한번 인사하고 비어있는 제 자리로 가 앉았다.

검술 수업을 마치고 씻을 여유도 없이 달려온 터라 필기구도 없었으나 어쨌든 유인물은 나눠 받을 수 있었기에 상관은 없었다. 자리에 앉아 유인물을 읽으며 심호흡을 몇 번 하자 호흡이 돌아왔다.

이어지는 수업은 언제나처럼 성실한 태도로 공부하는 사람 행세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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