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에드윈은 월요일이나 되어야 볼 녀석이고, 생각보다 마리앤과의 대화가 길어진 탓에 부루퉁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쉐이든이 더 강적이었다. 싫은 놈은 무시라도 하지, 가까운 동무는 어찌 달래야 할지 영 방도를 찾을 수 없었다.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녀석을 끌어다 그의 응접실에 마주 앉자마자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고 왔느냐 묻기에, 마법부 내에서 일이 좀 있었는데 밖에 내돌릴 이야기가 아니다, 하고 말을 않았더니 이렇게 부루퉁하여 서운한 티를 못내 흘리는 것이었다.
허어, 탄식에 가까운 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중원보다 시어런이 갑절로 살기 좋고 평화로운 곳이기에 나 또한 그 유순한 모습을 닮아가는 와중이라지만, 그래도 전생에서는 내내 무인다운 단호함으로 흉악한 악도들을 처벌하는 일을 소일거리 삼아 돌아다니던 나였다.
대개 칼 차고 강호 떠돌아다니는 것들이 그렇듯이, 가지고 있는 동무들도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하며 연락이 없어도 잘살고 있겠거니 하다가 큰일을 당해 몸을 잃고 머리만 덜렁 돌아오고 나서야 쓰린 애도를 건네는 편이었다.
이렇게 겨우 몇 시간을 저 아닌 다른 동무와 함께 보냈다고, 저 모르는 이야기를 만들었다고 하여 입술 삐죽 내밀고 버티는 것이 낯설고 괴이했다.
응접실 소파는 가운데에 테이블을 두고 이 인용 소파가 마주 보고 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었는데, 내 맞은편에 팔짱을 끼고 앉은 쉐이든은 찻잔에 손도 안 대고 테이블만 노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 갑갑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결국 참아 내지 못하고 엄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쉐이든.”
“⋯연무장 가게?”
“아니, 말을 해 보란 소리였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는데.”
“뭔가 말하고 싶어서 버티고 있는 거 아니야?”
녀석이 대답을 못 하기에, 시선이라도 끌 요량으로 검지를 굽혀 테이블 가운데 어림을 툭툭, 두드렸다. 그제야 시선이 서로 맞았다. 연한 풀빛 눈이 서운함을 한껏 담아 그렁그렁했다. 단단히 혼을 내어야 할까 싶다가 그 울 듯한 눈을 보고서 생각을 고쳐먹었다.
“네가 날 많이 챙겨준 것을 안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의 보호를 받기 위하여 이곳에 온 것이 아니야. 내 어떤 부분이 네 눈에는 서툴러 보였을 수 있겠지만, 내게는 너 또한 그렇게 보일 때가 있다. 친구라는 것이 그렇지, 저 할 일 잘하다가 필요할 적에 부르면 도와주고, 도움받고. 그리하면 되지 않겠어.”
옳은 말을 하였더니, 듣기 싫단 소리는 하지 않고 입술만 꾹 깨물어 씹었다. 다시 시선을 아래로 떨구는 꼴을 보아두지 않으려고, 눈을 피하는 녀석을 부르려 다시 한번 테이블 가운데를 툭툭, 두드렸다.
응? 그렇지 않아. 하고 잘못한 미하엘 녀석을 어르는 것처럼 다정한 소리를 내자, 그제야 짓씹은 입술을 벌려 나는, 하고 소리를 낸 녀석이 또 한참을 아무 말 않기에 슬쩍 재촉하였다.
“응, 너는.”
“⋯나는 네가 날 친구라고 생각 안 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
“⋯왜?”
“넌 네 얘기를 하지 않잖아. 난, 그냥 너에 대해서 알고 있을 뿐이고.”
“넌 내가 원래 이보다 더한 놈이라는 것도 알고 있겠지.”
“⋯.”
녀석이 또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녀석이 싫은 마음을 감추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내 말을 듣고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주었다.
기다리면서 다른 생각을 했다. 이제 일곱 살 난 미하엘. 그 아이를 양육하는데 한 손 보탠 적 없는, 십삼 년 전의 남궁정연이라면 지금 이런 것을 반 각도 버티지 못하고 달아났을 텐데, 그래도 제가 전쟁이 끝나고 세월을 흘리며 마음 넓히는 공부를 하였구나, 하는 생각 따위를.
한참을 그러다 보니 겨우 대답이 돌아왔다.
“⋯응.”
“그래, 나는 원래 더한 놈이다. 사람 이름 외우는 것도 못 해, 얼굴 외우는 것도 못 해, 어울리고 말을 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사실 지금도 내가 옳게 말을 하는 것인지 스스로 알 수가 없다. 나는 사람을 상대하는 것보다 검을 상대하는 게 더 편해. 그냥 이번 생에는 그렇게 태어났다.”
“⋯.”
“난 아버지에게도 내 이야기를 하지 않고, 어머니에게도 내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럼 윌리엄은 내 아비가 아니고, 세이른은 내 어미가 아니게 되나?”
“그건 경우가,”
“같아. 내게는 같다. 이 몸은 아직 연치가 어리고 배워야 할 것이 많아. 그러는 동안 네가 옆에서 계속 도와주면 어찌 되겠니.”
“⋯내가 방해가 된다는 소리야?”
“아니, 방해가 될 것 같다는 소리지. 너는 지금까지 내게 큰 도움을 준 좋은 친구고, 나는 너와 계속 지금처럼 지내고 싶은데. 너는 어떠하냐.”
“⋯.”
“그래도 되겠니.”
“⋯응.”
“그래, 네가 나를 잘 안다 하니 이것도 알겠지. 나는 이런 이야기를 길게 하는 사람이 아니다. 아니 그러하냐. 이래도 내가 너를 멀리하고 서럽게 대하는 것 같으냐. 응?”
녀석이 으으응, 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한숨을 폭 내쉰 뒤 팔을 뻗었다. 테이블 위쪽으로 다시 툭 숙여진 빨간 머리털을 두어 번 쓸어 주고 손을 떼자 미카, 하고 작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 응? 하고 대꾸하였다.
그래도 삐진 동안 계속 너라고 부르더니 다시 애칭을 입에 담는 게 다행스러웠다.
“⋯할아버지한텐 네 얘기 많이 해?”
“음?”
“아버지, 어머니랑 친구들한테는 안 해도 너희 할아버지한테는 혹시⋯.”
“안 한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까 말투가⋯. 아니야, 그, 이상했다는 건 아닌데!”
달래고 어르다 보니 본디 쓰던 편한 말이 나온 모양이다. 저보다 더 당혹하여 안절부절못하는 녀석에게, 대강 저도 긴장해서 그랬던 모양이라며 둘러대었다.
그 말에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표정이 밝아진 쉐이든이 소매로 제 눈가를 꾹꾹 눌러 닦더니, 얼른 나가 연무장이나 돌라며 등을 떠밀었다.
주말 동안 시험공부를 함께 할 것을 약속하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하루 종일 어린 아해들을 달래고 어르느라 정신이 쏙 빠진 것 같은데도 기분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에드윈에서 모용공자로 옮아간 생각들이 전생에 그래도 친우라고 가지고 있었던 놈들을 떠올리게 하여 그럴지도 모른다. 여기 놈들처럼 앵앵거리며 귀엽게 구는 맛은 없었으나 심심할 때 대련 한 판 하자 끌어내면 거절하는 놈이 하나도 없었다.
옷을 갈아입는 것을 잊고 그대로 연무장으로 나온 탓에 평소처럼 달리기는 불편하여, 아예 샛길로 빠져 산책이나 하기로 작정하였다. 온종일 사람에 치인 탓에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아 담벼락 안쪽을 따라 걸었다.
그간 구태여 살펴보지 않았지만, 시어런 아카데미는 그 이름값이 드높은 만큼 건물이 웅장하고 정원이 화려하여 제법 보는 맛이 있었다.
이름 모를 꽃들은 사위가 어둑해지자 더욱 짙은 향을 내며 실바람에 산들거렸고, 멀찍하게 거리를 두고 서 있는 나무는 어찌 다듬었는지 바닥에 닿는 부분부터 가장 높은 곳까지가 길쭉하고 둥근 모양이었다.
에른하르트 소백작저에 살 때도 중원과 다른 화초들을 보며 신선놀음하는 기분이었는데, 세상 밖에는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새로이 깨달았다.
오늘 구경한 수도의 길거리도 무척 화려하고 신기했다. 제국기사단의 이름을 걸고 황궁을 딛는 날을 막연히 상상해 보려 하였지만 영 쉽지 않았다.
나무의 생김과 꽃의 향내가, 그 길의 생김과 하늘의 별자리가 중원과 시어런이 서로 같은 부분이 없는데도 싸르르 싸르르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만큼은 어찌 닮은 듯 여겨져 절로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벌써 벌레가 나올 철인가. 날이 포근하긴 하였다.
문득 마엘로 샌슨이 흘리듯 한 말이 떠올랐다.
제가 신기한 것을 볼 때도, 무언가를 들을 때에도 오러를 끌어올린다고 하였던가.
과연 그 말이 옳았다. 중원에서 협객 놀음을 하며 보낸 시간 동안 여러 차례 마주친 살수들이 떠올랐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대비하는 방법은 퍽 단순했다. 그저 방심하지 않으면 된다.
기운을, 그래, 이곳의 말마따나 오러를 눈에 보이지 않는 안개처럼 넓게 퍼트리면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도 볼 수 있고, 귀에 들리지 않는 것도 들을 수 있었다.
그럴 적에는 자그마한 풀벌레 소리가 천둥처럼 온몸을 울리는 밤도 있었다.
그런 것도 운치라 여긴 시절이었다.
어젯밤 의외의 시꺼먼 방문자 탓에 되새김질하는 것을 잊었던 더글라스 머스탱과의 대화를 다시 이 밤에 끌어왔다.
그의 말마따나, 이곳 시어런에는 이미 정석적으로 화경에 오르는 길이 있었다.
구태여 고행에 가까운 수련과 내공심법으로 단련하지 않아도 대부분은 제 앞가림하고 잘 살 수 있을 터였다.
중원과는 많은 것이 다를진대, 구태여. 나는. 왜.
⋯제가 가문의 기사들을 속으로 제자라 부르며 내공심법을 가르치고 싶어 안달이 난 까닭을 알 것만 같았다.
잠시 걸음을 멈추어 잘 꾸며진 연못가에 서서 물속에 스민 달그림자를 내려다보았다.
동경을 들여다보는 습관이 여즉 들지 않아 아직도 그 생김이 낯선 소년이 달빛을 등으로 받고 서서 표정을 보여주지 않았다.
어둑한 수면에 물고기가 자아내는 동그라미가 피고 지기를 반복하였다.
아마도, 외로웠던 게지.
세가는 씨족으로 이루어진 세력이다.
마주치는 것이 형이고 아우고 사질이고 사매였다. 그들 모두가 같은 신공을 연마하고 같은 검을 사용하고 같은 옷을 입었다.
남궁의 옷은 하늘을 닮은 푸른색의 도포였는데, 도포 소매에 흰 실로 구름무늬를 수놓아 두는 것이 정석이었다. 저잣거리의 흑도 왈패 따위야 소매의 구름무늬만 보아도 우르르 달아나고는 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적에게 소맷자락이라도 쭉 찢긴 날에는 침방 하녀들에게 도포 손질을 맡겼다. 너덜너덜한 옷을 입고 길가에 나설 수 없다 체면 차리던 시절의 일이었다.
저 말고 다른 남궁의 씨들도 다 저와 같이 소매를 찢어 돌아오는 일이 일상이었기에 하루가 멀다 하고 침방 하녀들을 찾아들었다.
마음 급한 이들은 침방 하녀들에게 당과 한 봉지 쥐여주며 빨리 좀 부탁한다고 하고 똑같은 처지의 사촌 형제 사촌 누이들보다 순서를 당기기 위하여 기를 썼다.
그때, 다 같이 수련하는 연무장에서는 푸른 기운이 가시지 않았다.
새 땅의 마법사들이 각기 다른 색의 서클을 전개하는 것과 달리, 창궁대연신공의 기운은 늘 푸르렀다. 검을 부딪칠 때도 푸르게 튀었고, 숨을 내쉴 때도 푸르게 내쉬었다.
푸르던 것이 붉어질 일은 그 생을 끝마칠 적 외엔 없었다. 그래서 더욱더 푸른색을 애틋하게 여겼는지도 모른다.
나는 내 이기심 하나를 내려놓기로 했다. 못을 들여다보던 시선을 거두고 다시 걸었다.
그래, 창궁대연신공은 중원에서 가장 좋은 심법인 것도 아니었다. 전대 남궁 가주가 화경의 경지에 올랐다지만 그는 천뢰제왕신공을 사용하였지, 창궁대연신공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구파의 것보다도 못한 것을 이 먼 세상에 제 아끼는 사람들에게, 그것도 한참 때를 놓친 뒤에 권하는 것은 욕심이었다.
저도 모르게 그 푸르른 것들이 보고 싶어 과한 욕심을 부렸다.
마엘로 샌슨에게 새 검식을 청할 적에 불쑥, 그것을 버리면 어떠할까, 충동적인 꿈도 꾸었더랬다. 몸에 남은 버릇을 지적받은 것은 다행인 일이었다. 결국엔 떼어놓지 못할 흔적이었다.
늘 단내가 폴폴 풍기던 작은 침방을 떠올리니 먹먹한 기분이 들었다. 그 좁다란 방에 둥그렇게 모여앉아 길쌈하던 이들의 웃음소리가 풀벌레 소리처럼 귓가에 우렁우렁하였다.
제가 아직 사람이라 애달픈 정이 남아, 그 큰 아카데미 부지를 온전히 한 바퀴 걷고 돌아온 뒤, 차가운 물로 피로를 씻어내는 시간이 지난밤보다 조금 더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