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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22화 (22/176)

22.

고급 검술 시간은 늘 그렇듯 두 명을 무작위로 뽑아 대련하는 모습을 보고, 마엘로 샌슨이 직접 고칠 점을 지적해주고, 질의응답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이번에는 2황자 루베르 안티 시어런과 일전에 나와 겨룬 적이 있었던 발터 오르겐의 차례였다. 똑같은 일류 무인이라고 하더라도 루베르가 발터보다 실력이 높은 것을 다들 알고 있기 때문에, 결과의 승패는 반 내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엘로 샌슨은 일류는 일류끼리, 이류는 이류끼리 대련시킨다는 법칙은 어기지 않았으되 그 실력이 온전히 같은 이들끼리만 대련을 붙이는 일이 없었다.

더 강한 자도, 더 약한 자도 서로를 제대로 상대하는 법을 알아야 하는 것이 첫째 이유고, 작은 깨달음으로 언제든 순위가 바뀔 수 있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때문에 발터 오르겐은 수비 위주의 대련을 하기로 마음가짐을 단단히 먹은 듯 보였다. 앞쪽 발보다 뒤쪽 발에 힘을 실어 검이 부딪힐 적에 무게를 분산시키고, 시간을 오래 끌어 틈을 노리려는 것이 쉽게 읽혔다.

반면에 루베르 안티 시어런은 오른쪽보다 덜 발달되어 취약한 발터의 왼쪽 어깨를 약점으로 삼아 집요하게 공격하여 빠르게 대련을 끝내고자 하였다.

보고, 배우고, 보완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검법을 익히 알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미리 짠 듯한 속도의 빠른 공방이 쉴 새 없이 계속되었다.

검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였으나 구경하는 이들 중 단 한 명도 귀를 막는 법이 없었다. 안법을 최대한 돋워 그들을 구경하느라 넋이 나간 탓이었다.

한 번 초절정에 닿아 본 내가 보기에도, 고절한 검이었다.

매서운 검의 간격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발터가 왼쪽으로 몸을 낮춰 빠져나갔다.

제 어깨를 보호하기 위한 수작으로 불필요한 동작이 없었으며 이전에 발터가 보인 적 없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루베르는 그를 잠시 놓쳤다.

곧 다시 빠르게 다가서려는 순간, 새까만 눈동자가 정확히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멎은 듯했다.

어쩐지 귀가 먹먹하여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단지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어린 아해의 얼굴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마치 잘 그려낸 한 폭의 그림처럼 미동도 하지 않는 소년의 모양새가 숨을 몰아쉬는 발터와 대비되어 무척 기이하였다.

어째서 움직이지 않는 것일까 의아하던 중에 마엘로 샌슨의 목소리가 침묵을 깼다. 꽤 긴 시간이 흐른 줄 알았으나 탄지경이었다. 어느새 승부가 나 있었다.

“잘하다가 갑자기 왜 딴생각이야? 거기에서 바로 멈추면 어쩌자고.”

몸을 낮췄던 발터가 틈을 놓치지 않고 아래에서 위로 검을 찔러 올려 루베르의 턱 아래에 검 끝을 가져다 대는 데 성공한 것이다.

마엘로 샌슨은 늘 그렇듯, 승부가 난 바로 그 순간 두 사람을 오러로 단단히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한 채로 마지막 승부가 갈린 지점에 대하여 해설을 시작했다.

나는 여태 루베르와 눈이 마주친 채 있는 것이 이상하여 눈을 끔벅였다.

“상대의 약점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약점을 잘 알고 있는 것도 중요하지. 특히 이번에 발터는 일부러 자신의 약점을 노리게 만든 뒤 방심한 틈을 타서 그 약점을 눈앞에서 없애버리는 식으로 움직인 것이 아주 멋졌어. 호흡을 짧게 가져갈 수 있도록 그동안 연습한 것 같은데, 미카엘의 심법인가 뭔가를 따라 한 모양이지. 효과가 꽤 좋은 걸.”

제가 무슨 짓을 했기에 저 갈까마귀 같은 소년이 이리 황망한 표정으로 대련하던 것도 잊고 허둥지둥하였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알 길이 없어 제 뒤를 한번 돌아보았다.

왼편 반 치 뒤에 서 있던 벤자민이 마엘로의 설명을 마저 들으라는 듯 턱짓하여 다시 앞을 보았다.

“⋯그러니까 발터는 호흡을 무조건 짧게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손과 발이 움직이는 사이 무게중심이 이동하는 이 중간축의 속도를 어떻게 정할지를 생각하고 움직인 거야. 대련이 시작하기 전부터 계획했던 일이겠지? 다음에는 상대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로는 어떤 식으로 대련하면 좋을지 고민해 보도록 하자.”

“예!”

“그리고 루베르는⋯. 왜 졌는지 너도 잘 알지? 검을 들고 있을 때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시선을 바로 해야지. 눈앞의 상대가 시야에서 벗어났다지만 기감에서 놓치지는 않았잖아. 늘 주변 상황을 파악하도록 하고. 자, 이상.”

장면 해설이 끝나 두 소년을 묶고 있던 오러가 풀렸다. 둘은 사이좋게 악수하고 대련을 위하여 꾸며진 무대를 벗어났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루베르의 방심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성공한 발터는 큰 칭찬을 받아 희희낙락하며 단단히 땋아 틀어 올렸던 머리의 매듭을 풀었다.

발터가 마구잡이로 비틀려 구불구불한 머리칼을 손빗으로 빗으며 개운해하기에 그 어깨를 주먹으로 툭 치며 잘했다 격려하였다.

그리고, 한 번 더 루베르와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는 확실히 알았다. 그는 나를 보고 있었다. 이즈음 해서는 먼저 말을 걸지 않아도 말을 걸어오는 동기와 선배가 많아 먼저 다가오지 않는 이들과는 대화를 할 길이 요원했기 때문에, 루베르 안티 시어런과는 시선을 교환할 일이 거의 없었다.

잘못한 것이 없어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다만 소리를 내지 않고 입 모양으로 물었다.

왜요.

그는 화들짝 놀라며 제 쌍둥이 누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루실라가 보기에도 이상하였는지 손을 뻗어 루베르의 이마를 짚어 열을 재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을 구경하고 서 있다가, 벤자민이 저를 부르기에 그냥 별일 아닌가 보다 싶어 마엘로 샌슨을 둘러싼 이들과 함께 충분히 검술 토론을 즐긴 뒤 다음 수업을 위해 이동하였다.

* * *

더글라스 머스탱은 오러를 깨친 학생과 아직 오러를 느끼지 못한 학생을 반으로 나누어 진도를 나가겠다 하였다.

오러를 깨친 학생들은 수업 시간 전반부에 자신의 검에 오러를 입히는 연습을 하다가 후반부에는 엎어져 쉬었다. 오러를 깨치지 못한 학생들은 수업 시간 전반부에 죽어라 검을 휘두르다가 수업 시간 후반부에 오러 꼬리로 간질간질 괴롭힘을 당하였다.

누가 더 빨리 오러를 다스릴지 모르는 채로 수강 신청을 받는 입장에서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때문에 나는 수업 시간 전반부에는 내공이 부족하여 절정에 오르지 못한 몸을 이끌고 있는 힘껏 검기를 만들기 위해 내내 끙끙거리다가 수업 후반부에는 그대로 주저앉아 창궁대연신공의 구절을 따라 운기조식을 하였다.

운기조식 중에는 건드리지 말아달라 미리 부탁해 둔 덕에 가까이 오는 이는 없었다. 그저 간간이 더글라스가 안법을 돋워 대주천에 들어선 이 몸을 뚫어져라 살필 뿐이었다. 그에게 운기조식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기도 하였으니, 일석삼조라 하겠다.

대남궁세가의 심법은 푸르른 창공을 담는다. 하늘을 닮았다. 그 검식에 호방함이 서리는 것처럼 신공 또한 그러했다. 내공 자체에 푸른 기운이 서렸다. 오래 수련할수록 더욱더 색이 맑아지는 푸름이었다.

그러다 보니 우연의 일치로, 지금 이 몸뚱이가 가진 눈 색과 엇비슷한 기운을 띠게 되었다.

순서야 대개 비슷했다. 먼저 지친 몸의 혈도가 열을 품고 늘어진 것을 푸른 기운으로 쓸며 달랬다. 가장 굵은 대맥을 따라 소주천하여 피로를 씻어내고 몸 안의 탁기를 물로 씻어내듯이 쓸어 모았다.

그다음에는 좀 더 시간을 들어 기맥을 따라 관조하였다. 무릎에 손을 얹고 가부좌를 틀고 있으니 배꼽을 중심으로 머리부터 어깨, 팔뚝, 손, 무릎, 다리, 발, 그리고 꼬리뼈에 이르러 단전과 심장 머리를 잇는 큰 선이 동그랗게 느껴졌다.

그렇게 기맥을 따라 대주천하면 피로에 젖은 세맥이 사람 손 탄 떠돌이 강아지마냥 기웃거리며 기맥 옆으로 바짝 붙어 푸른 기운을 달게 삼켰다.

살살 달래듯 푸른 기운을 사방으로 퍼트리는 것으로 운기조식을 마치면, 동그랗게 앉은 몸의 주변으로 푸른 정광이 서리다 사라졌다.

그 기운을 오러라 알고 있는 주변인들의 눈에는 신기한 것이 당연했다.

저를 흘긋흘긋 보고 있는 시선을 알았으나 얼른 보고 무엇이라도 알아줬으면 좋겠는지라 굳이 타인의 시선을 피하거나 숨으려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다만 핑크가 아니라 블루였냐며 묻는 벤자민을 크게 꾸짖어 혼을 냈다.

수업을 마치고 벤자민에게 먼저 기숙사로 가라고 일러둔 뒤, 더글라스 머스탱 교수와 어깨를 나란히 하여 그의 교수실로 향했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였으나 전생에는 더한 꼴로 굴러다닐 적도 많았고, 방에 들일 더글라스가 괜찮다 하니 오래 신경 쓰지 않았다.

“전에 얘기해 준 것을 바탕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자료를 모아보기는 했는데, 이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한 번 봐도 됩니까?”

“그럼요. 그러려고 부른 건데. 뭐 좀 마실래요?”

“냉수면 됩니다.”

별생각 없이 앉은 자리에서 교수에게 물심부름을 시키며 종이 뭉치를 집어 들다가, 아차 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글라스는 아무렇지 않은 기색으로 물을 가득 채운 기다란 유리컵과 야트막한 머그컵을 들고 와 응접실 자리에 앉았다. 나도 엉거주춤 마주 앉으며 사과했다.

“버릇이 없었습니다.”

“아니에요, 제 방이니 제가 챙겨줘야죠. 일단 지금 들고 있는 것들은 제1 마탑과 제2 마탑에서 진행한 공동연구과제의 사본이에요. 신체에 직접 마나를 쌓고 싶다고 주장하는 기사들이 매해 다섯 명 이상씩 꼬박꼬박 나오고 있다는 건 저도 이번에 처음 알았지만요.”

“⋯으음.”

“보다시피 모든 연구는 사 개월간 진행되고, 이 개월의 휴식기를 가졌다가, 다시 사 개월간 진행되는 식이었어요.”

“⋯하지만 실험에 참여한 이들이⋯.”

“네, 기껏해야 소드 익스퍼트 하급의 기사들이죠.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오러를 사용하고 싶어 안달은 나는데 오러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실험에 자원을 하는 거예요. 유의미한 결과를 내기 어려울 수밖에 없어요.”

“⋯.”

“적어도 오러의 운용이 가능한 소드 익스퍼트 상급에 이르러야 몸에 마나를 쌓든 말든 할 텐데. 소드 익스퍼트 상급쯤 되는 기사들은 그대로 잘 닦여있는 길을 가고 싶어 하거든요. 조금만 더 수련하면 최상급 찍을 수 있을 것 같고, 거기에서 좀 더 노력하면 혹시나 소드 마스터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나는 차분하게 보고서를 받아 훑어보았다. 전문용어 몇을 흐린 눈으로 넘기고 인체를 닮은 그림과 날짜별로 진행된 실험, 부작용, 그리고 실패 요인과 치료 후 경과를 차분히 읽었다.

“제 눈에는 다른 실패 요인도 보입니다.”

“어떤 거요?”

“기사들이⋯ 자신을 불신하고 있어서요. 제가 쌓은 내공, 아니, 오러는 제 의지를 담아 움직여야 하는 힘인데 이 실험에서는 마법사의 도움을 받아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을 억지로 눌러 담고 있잖습니까. 사람 몸이 항아리도 아니고⋯.”

이건 단전도 무엇도 아니다. 그 말을 들은 더글라스도 무언가 깨달은 표정으로 자료를 뒤적거렸다.

실험은 실패하였지만, 마법사들은 마나와 비물질계를 학문으로 바라보고 살피는 자들이었다. 나는 지난 수십 년간의 거듭된 실패의 기록을 훑으며 가능성을 보았다. 마법사들이 인체에 마나를 주입하기 위하여 사용한 수많은 통로 중의 어느 일부가 인체의 혈을 닮아 있었다.

순간 눈이 번뜩하여 더글라스에게 펜을 빌려 마법사가 표기해 둔 혈자리들 중 내가 알법한 것들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러나 일각이 지날 즈음 해서 표정이 흐려졌다. 내가 알고 있으나, 자료에 표기되지 않은 혈자리는 표시하기 어려웠다.

결국 펜을 내려놓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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