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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21화 (21/176)

21.

대부분의 귀족 아이들처럼 나 미카엘 에른하르트도 말문을 떼자마자 가정교사를 들였다. 어린 몸은 쉬이 지쳤으나 마냥 누워 쉬는 것보다는 무엇이라도 배우고 싶어 안달이 나 있던 시절이었다.

또래보다 일찍이 맞은 가정교사는 글을 읽는 법과 쓰는 법을 중점으로 가르치는 자였는데, 내가 스스로 글씨가 손톱만 한 서책들을 찾아 읽을 즈음 해서 예법과 악기 등의 교양을 가르치고 싶어 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에는 새로이 얻은 가족과 친지들의 숨이 꼴딱 넘어갈까 안달이 나 있었다.

차마 문맹으로 살 수는 없다고 여겨 말과 글 익히는 것이야 죽어라 배웠다. 허나 악기를 뚱땅거리거나, 절조 없이 여인네 허리를 껴안고 빙빙 도는 춤을 추거나, 멋들어진 맵시로 인사를 주고받는 것 따위에 시간을 쏟을 일은 없을 것이라 단호히 선언하여 거절했다.

다만 추후 가문을 건사하는 데에 필요할지 모른다 하여 백작가 내정 운영과 관련된 서류를 보는 법을 익히고 계산식과 화폐 단위, 이 세계의 지리와 각 구역의 수확물 따위에 대한 것을 외워 익히는 것으로 수업 시간을 채웠다.

하여 나는 동화책에 나올법한 이 땅의 신화까지는 익숙하게 알았으되, 그 이상은 알지 못했다.

그 탓일까. 역사 교과서를 처음 들여다봤을 적에는 이것이 사람 말이 맞는가 싶어 어안이 벙벙했다.

전생에 정치는커녕 가문 내의 세력 구도도 잘 알지 못하여 멀리 떨어져 지낸 터라 세상을 이루는 데에 이렇게 많은 약속이 필요하다는 것을 몰랐고, 또 그 약속을 어기고, 분쟁을 조율해 나간 것들이 모조리 다 기록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 장하고 신기했다.

그리고 이 수많은 조약을 다 순서대로 외워야 한다는 사실에 까무러치게 놀랐다.

“칠백 년 전에 율란과 비반의 혼인 동맹이 깨어져 그로 인하여 소금 무역로가 바뀌었다는 것은 알겠다. 허나 백이십 년 전에 다시 왕자와 공주를 혼인시키고 본래의 길을 통해 무역을 하기로 다시 약조하여 지금껏 지키고 있는데, 이전에 약조가 깨진 것은 어째서 외워야 하느냐⋯?”

얼이 빠져, 나오는 말씨가 평소 쓰던 것보다 연배가 높았다. 저도 모르게 어린아이 같지 않은 말투로 물었으나 필기에 정신이 팔린 쉐이든은 개의치 않았다. 쉐이든은 교과서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심드렁하게 대답하였다.

“역사는 반복되기 때문에 이전에 잘못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가, ‘너 그때에도 잘못했지, 또 그렇게 하려는 거 아니야?’하고 혼을 내주려고 그러지.”

“그건 그때 되어서 생각하면 되는 것 아니냐.”

“몰라, 그냥 외워.”

“⋯허어⋯.”

기사나 마법사가 아니기에 넓은 강의실의 끝에서 속닥이는 목소리까지는 전해 듣지 못하는 브리아나 카사블랑카 교수는 열정적으로 진도를 나갔다.

설명 중간중간에 어여쁜 글씨로 판서를 하고, 일전에 그랬던 것처럼 책의 어느 부분을 다 함께 읽게 하거나 두어 명의 학생을 콕 짚어 일어서서 낭독하게 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는 동안 색색의 잉크를 사용하여 카사블랑카의 판서를 노트에 정리하는 쉐이든도 사람처럼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자고로 글씨란 죽간이나 흰 화선지에 짙고 검은 묵으로 적는 것이 마땅했다. 곧고 균일한 필체로 용의 기운과 호랑이의 자태를 담는 것이 대단한 글씨라고 여겨지고는 했다.

정갈한 자세로 한 자 한 자 심혈을 기울여 적는 것이 글씨고, 청색 적색 꽃물로 색을 입히는 것은 그림에나 하는 짓이었다.

그렇게 여기며 사십 년을 넘게 살았다.

그렇기에 반듯하지 않은 필체로 어떤 문장은 중요한 것이라며 크고 붉게, 어떤 문장은 사족이라며 작고 푸르게 적는 쉐이든을 보고 있자니 영 마뜩잖았다.

마치 제가 갓 태어나 쪼글쪼글한 성성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젓고 다시 제 노트를 보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균일한 크기에 잘생긴 글씨였다.

그래도 커다란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난 도리를 하겠다고 글씨체가 유려해질 때까지 연습하고 수련한 덕분이었으나, 어째서인지 검은 글씨만 빼곡한 노트를 여러 번 들여다보면 볼수록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렇다고 잘 공부하는 아해를 괴롭힐 수 없어 아랫입술을 꾹 한 번 깨문 뒤, 고개를 들어 다시 뒤통수만 보이는 교수를 바라보며 불러주는 것을 받아 적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헛되이 시간을 보낼 수는 없다 여긴 탓이었다.

이후 쉐이든이 판서한 것을 보여 주겠다 언질을 주어 마음이 조금 놓였다.

노력한 것이 퍽 가상하게도 칼립스 교수의 수업에서 본 쪽지 시험은 만점을 받았다.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주말 이틀 내도록 검 휘두르는 시간을 줄이고 그 종잇장과 씨름한 덕분이었다. 시험을 끝마치자마자 그 내용을 다 잊은 듯하였으나 종잇장을 들여다보면 아른아른 기억에 남는 것이 공부한 보람이 있었다.

제국의 계보 수업이 끝날 즈음 해서는 쉐이든의 친구이자 지인이라는 이들과 짤막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 중 일부는 제 생신 연회에 왔던 이들이고, 몇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말로만 듣던 단비를 마주하게 되었는데 제가 왜 그를 단비라고 불렀는지는 얼굴을 보자마자 알았다.

매끈하게 생긴 외양에 머리가 동그란 놈이었다. 윤기가 도는 금색 머리털이 목을 다 드러내고 찰싹 붙어 있었다. 동그란 머리의 소년은 큰 눈의 동공이 유독 커서 유순해 보였다. 수달이나 담비를 꼭 닮은 소년이었다.

다른 과의 데미안을 데미안으로 부르고 너는 계속해서 단비라고 불러도 되겠냐 하니 웃으며 쉽게 허락하는 것이 성격도 좋아 보였다.

하긴, 성격이 까칠하거나 다정한 것이 의미 있지도 않았다.

제가 전생부터 삶을 계속 이어갔다면 제 나이 마흔 줄에 태어났을 어린 아가들이다. 뾰로통한 모습을 보아도 가엾고 이쁠 것이고, 까르르 웃는다면 마냥 기껍고 좋을 것이다.

어쩌다 보니 저녁 식사 자리는 그렇게 여덟이 넘는 이들이 모두 모이게 되었는데, 떠들썩한 것이 나쁘지 않았다.

그들의 이름을 몇 번 실수하였으나 아무도 탓하거나 신경 쓰지 않아 저도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저 마주하면 이름자 몰라도 반가이 웃어달라 하기에 손가락을 건 약속도 나누었더니 아해들이 크게 기뻐하여 마음이 흡족하였다.

* * *

이후로 이어지는 초급 검술 시간부터는 새로이 익힌 검식을 연습하는 데에 골몰했다.

처음 검을 쥐어서부터 지금까지 남궁의 검 외에는 손에 쥐어 본 적이 없어, 잘 나가다가도 절로 하늘을 품어 가슴이 떡 벌어졌다. 몇 번이나 지적을 받아도 고쳐지질 않았다.

한참을 골몰하였다. 팔에서부터 허리까지는 새 검식을 쓰겠다 하면서 다리와 발은 남궁의 보법을 따라 천리호정과 천풍신법을 번갈아 밟고 있는 것이 까닭인가 싶었다. 그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더니 덩달아 한참을 고민하던 마엘로 샌슨이 납득하지 못하고 물었다.

“네 말은 그러니까⋯ 숨을 쉬는 법, 검을 쓰는 법, 걷는 법, 뛰는 법이 각기 다 따로 있고 잠을 자는 방법까지 정해져 있다는 말이냐⋯?”

“예, 그 각각을 따로 익혀 한 박자에 맞도록 조합을 시키고 모든 경우의 수에 대응할 수 있도록 훈련을 하였기 때문에 검식만 다른 것을 익히니 어긋남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혹시 새로이 배운 검법들에 대응하는 걷는 법이나 숨 쉬는 법이 있는지가 궁금합니다.”

“아니, 그게 사람이야?”

“예?”

“눈 깜빡이는 법은 없어? 침 삼키는 법은?”

“예?”

“⋯아니, 자, 봐. 팔을 이렇게 뻗어서 검을 여기서 여기까지 휘두르잖아. 왼쪽에 적이 있다고 가정하였을 때, 검로가 이쯤에 닿으면 무릎이 여기까지 나오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아? 몸이 이만큼 틀어지게 되니까 이 앞까지 움직이면 베어 내렸을 때는 이런 동작이 되는 거고.”

“그때 제 호흡이 검식과 맞지 않아 반 박자 빠르게 몸을 숙이게 되어⋯ 반대 방향으로 베어 올리는 것이 자연스럽게 여겨집니다. 원래의 검식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두 초나 더 끼워 넣어야 하는데, 이 부분을 잘 모르겠습니다.”

“⋯듣고 보니 이것도 괜찮은 것 같은데, 반 박자 빠르게 여기서⋯. 그래, 그냥 그렇게 하고 그 두 초는 여기에서 시작해서, 이렇게 끝내는 건?”

“⋯! 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어어, 그래.”

과연 고절한 안법이었다.

마엘로 샌슨은 일찍이 경지에 오른 천재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팔이 움직이는데 어찌 다리가 따라 움직이지 않느냐 짜증을 내는 일은 있었어도, 눈앞에 생겨난 문제를 외면하는 일은 없었다.

손거스러미처럼 신경 쓰이는 일이 생길 적마다 나와 함께 궁리해 주고, 새로운 방안을 떠올려 제 몸으로 실험하거나 차근차근 직접 가르쳐 주며 정성을 쏟았다.

이쯤 되니 강습을 받는 것보다 토론을 하는 일이 잦았는데, 제 검식을 연습하던 옆의 학생들이 궁금하여 기웃거릴 적마다 시범을 보이고 쉬운 초식은 따라 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천풍신법이야 내공이 없어 펼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걸음을 걸을 적에 뒤꿈치의 각을 다르게 하여 끝없이 전개하는 무한보 정도는 검술부 동기들도 익힐 만했다.

진각(*내공을 실은 발로 바닥을 밟아 깊은 자국을 내거나 진동을 전하는 것)을 사용하여 연무장의 구석 잔디밭 어림에 무한보의 발자국을 새겨주었더니 쉬는 시간에 쪼르르 줄을 서 밟아대는 것이 꼭 다람쥐 새끼들 같았다.

이 말을 쉐이든에게 하였더니 이 몸의 나이를 상기시키려 하기에,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 * *

쉐이든 혹은 벤자민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기숙사 식당에 가 자리에 앉으면 마치 내 생일 연회에서 늘 그러하였던 것처럼 각자의 무리가 있는 이들이 옆에 앉아 말을 걸기도 하고, 제 식사가 끝나 먼저 일어나기도 하고, 기다렸다가 함께 차를 마시거나 수업 내용에 대하여 토론하기도 했다.

시어런 아카데미는 소년 소녀들의 교류를 서로 막지 않았다. 기숙사 방에 상이한 성별의 학생이 들어가는 것은 막았으되, 서로의 기숙사 식당은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었다.

여섯 개 식당의 메뉴가 서로 다른 일이 왕왕 있었기 때문에 오늘은 어떤 밥이 더 맛있다 하면 그쪽으로 우르르 인원이 몰려, 나중에 식사하는 이들은 식재료가 떨어지지 않았다는 팻말이 붙은 쪽의 식당으로 가야만 했다.

몇 번은 다른 학년들과 어우러져 식사할 일도 있었다. 마엘로 샌슨과 따로 검식을 수련할 적에 낯을 익힌 소녀들이 반가이 인사하며 맛있는 반찬을 나누어주기도 했다.

그들은 제 앞에 앉아 턱을 괴고 먹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을 종종 즐겼는데, 남 먹는 구경이 재미있나 싶어 의아하였지만 한창 배고플 시기라 주는 것은 가리지 않고 받아먹었다.

성실히 몸을 단련하고,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해내기 위해 노력했다.

셋째 주에 이르렀을 때에는 마법 수업을 들을 적에 에드윈이 저를 노려보지 않아 마음이 편했다.

세계사 수업 시간에는 글자 크기를 바꾸어 적는 것을 포기하고 빨간 잉크로 동그라미나 밑줄을 긋는 방법을 사용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제국의 계보 수업에서는 지난번과 다르게 두 문제를 틀렸으나, 철자 몇 자의 문제였기에 마음을 편히 먹고 신경 쓰지 않기로 하였다.

야영을 배우겠다며 아카데미 뒤편의 산으로 가 조별로 모여 불을 피우고 불침번 서는 흉내를 내기도 했다.

평탄한 땅을 고르는 법, 알람 마법을 걸거나 경계조를 세우는 법, 불에 달궈도 터지지 않는 돌을 고르는 법, 야외에서 음식을 조리하는 법 따위를 실습하고 다 같이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이때 같은 조의 이반이 양고기를 챙겨 온 덕분에 가장 맛있는 스튜를 끓여 호평을 받았다.

대수롭지 않은 일들이 총천연색으로 반짝이며 추억으로 남는다.

그렇게 평탄한 시간 끝에, 이상한 일은 아카데미 입학 후 세 번째 주 목요일, 고급 검술 시간에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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