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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20화 (20/176)

20.

지학을 넘기면서부터 이렇게 분주하고 성실하게 하루를 쪼개어 생활한 적이 또 있나 싶었다.

협객행이란 것은 횟수가 거듭될수록 단조로운 일상이다. 악인을 쫓을 적에는 나흘이고 보름이고 잠도 자지 않고 경공을 써 내달리는 일도 자주 있었으나, 지표에 남은 흔적을 훑어 내달리는 일은 여염집 황구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보고 듣고 쫓고 죽이고, 성공한 날에는 객잔에 들어 죽엽청 한 병을 마시고 잠에 들었다.

그런 날에는 부족한 잠을 메우려 느지막이 일어나기도 했다. 들여다볼 이가 없어 게으르다 한소리를 들은 적도 없었다.

그러니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손발이 좀 더 강건해지도록 미래의 어느 순간을 대비하여 심신을 훈련하고, 겨우 밥때 한 번 놓치는 것을 염려 받고, 또래 무인 수십과 배울 것 많은 스승을 모시어 듣고 배우는 근래의 오전 반나절은 뜨끈한 온천에 몸을 지지는 듯한 평온과 안도를 동시에 가져다주었다.

긴장은 낯선 것을 코앞에 두었을 때 찾아왔다.

월요일은 마법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쉐이든에게는 괜한 염려가 될 것 같아 에드윈 키아드리스의 행패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으나, 나는 그가 걸어 온 대련 신청을 잊지 않고 있었다.

허나 내 배움의 끈이 짧아 마법에 대하여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와 힘을 겨룰 방법은 아직 찾지 못하였다.

서책에서 읽은 바로는 기사와 마법사의 싸움에서 검수는 근거리 공격을 하고 법사는 원거리 공격을 하니 서로의 간합이 강약을 가리는 데에 중요하다 하였으나, 막연히 그것이 해답이 아닌 줄은 알았다.

오러 수업에서 더글라스 교수가 사용한 단어를 마음 한켠에 담고 있었다. 비물질계. 눈으로 보아 알 수 없고, 손으로 잡아 만질 수 없는 오러와 마나의 세계를 떠올리며 교실에 들어섰다.

무어라 떠들어 대던 아이들이 동시에 입을 닫아 공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나는 잠시간 의아하다가, 일전의 수업에서 내가 토악질한 것을 치우지도 않고 제일 먼저 교실을 빠져나갔던 것을 떠올렸다.

“⋯음.”

그러나 누가 치워 준 것인지 알지 못하니, 누구에게 감사 인사를 하면 좋은지도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주변을 휘 둘러보고 자리에 앉았다.

멀찍한 한켠에서 눈에 익은 자색 머리통이 보였다. 붓꽃처럼 진보랏빛을 띤 소녀의 머리칼은 어깨 조금 아래에서 짤따랗게 잘려 있었다. 마리앤 필로덴도르, 야영 수업에서 새로이 알게 된 녀석이었다.

간단히 눈짓으로 아는 체하자 이쪽을 바라보는 눈이 잘게 떨리는 것이 의아하여 고개를 기웃하는데, 곧 교수가 들어와 앞을 보았다.

앤젤라 스팅 교수는 인사도 하기 전에 내 얼굴색을 살폈다. 나는 빙긋 웃었다.

화산에서는 어린 제자들에게 절벽 기어오르기를 시킨다 하였고, 소림에서는 얼음장 같은 폭포수 아래에서 면벽하는 것을 밥 먹듯 시킨다 하였다.

남궁가에서도 어린 제자들의 수련에는 고행이 필요하다 여겨 팔다리에 철근을 매달고 죽창 위에 올라서서 버티게 하는 일을 대대로 소일거리 삼아 하였는데, 겨우 기혈 조금 뒤틀린 것을 가지고, 심지어 곧바로 치료해 준 뒤 칠 주야가 넘는 이때껏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 고맙기도 하고 면구스럽기도 하였던 탓이었다.

“아카데미에서의 첫 주는 어떠했나요⋯? 다들 건강한 얼굴로 인사하게 되어 기뻐요. 지난번에는 서클의 전개 방식과 구동 방식에 대해 설명했었죠.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현존하는 마법 수식을 직접 익히고 사용하면서, 그 회로의 구성 원리에 대하여 배울 거예요.”

앤젤라 스팅이 엄지와 검지를 부딪치자 탁과 딱 사이 어드메의 소리가 났다. 조금 전까지 아무것도 없던 내 책상 위에 얹어져 있는 유인물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허어, 탄성이 절로 새는 것을 참아 누르며 그 유인물의 오른쪽 하단을 만지작거렸다. 이것이 도대체 어떤 마술인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불쑥 일어 옆자리 아해를 흘깃 보았으나, 집중하는 모습에 방해하기가 저어하여 시선을 바로 했다.

하얀 것이 종이요 검은 것이 글씨일 줄로만 알았는데, 놀랍게도 적혀 있는 술식의 어느 한 부분이 익숙했다.

정화 술식이었다.

스팅은 해당 주문은 흐름이 간결하고 기초 술식에 들어가는 마흔여덟 가지 꼬임 중 일곱 가지를 간략화하여 살펴볼 수 있는 데다가 주문의 위력이 강하지 않아 코스트도 적게 바칠 수 있다고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마법의 코스트는, 말하자면 주문의 대가나 제사의 제물 같은 것인가 보다 하고 눈치껏 이해했다.

귀에 낯선 단어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수업의 절반은 이해하고, 절반은 이해하지 못하였다. 쉐이든 로제가 내 시간표를 보고 왜 그렇게 경악하였는지 이해가 갈 듯 말 듯 하였다. 중원의 언어와 사뭇 다른 시어런 제국어를 익힐 적과 같이, 새 언어가 귀에 설었다.

설명을 끝마친 교수는 여전히 끝이 나른한 목소리로 실습을 권한 뒤, 내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우리 검술부 학생은⋯ 이해가 가나요⋯?”

“⋯어, 음.”

제때 대답하지 못하자 뒤통수에 닿아오는 시선들이 따가웠다. 내가 아직 키가 높지 않아 앞자리 언저리에 앉아 있기 때문에 아해들이 어떤 얼굴을 하고 나를 바라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술식의 초반부에서 먼저 마나를 분해하기 위하여 감마 수식을 사용하고, 그것의 유속을 늦추기 위해 베타 수식을 넣었다 하셨습니다. 평온과 평안을 위해 침묵의 주문을 꼬인 형태로 넣고, 그리고 이게⋯, 이것이.”

“발음이 조금 어렵긴 하죠⋯? 오프-자이눙⋯ 푸르름과 녹음의 술식이에요.”

“예, 어⋯ 옵자이논을 넣고 이런 형태로, 다시 분사와 증폭을 걸고 닫는 술식으로 알파를 썼다고 하였습니다.”

“⋯으응⋯. 이전에 어느 부분에서 실수하였는지 기억하고 있나요, 에른하르트 영식?”

“분사 술식의 두 번째 꼬임에서 흐름이 틀어 막혀 밖으로 퍼져야 할 오러가 역류하여 베타 술식을 역주행한 것이 가장⋯ 문제였다고 봅니다. 느려져야 할 오러가 빨라지고, 구슬 앞쪽 일 번에는 알파 수식이 없어 끝맺음을 못 했으니까⋯.”

답을 맞힌 것인지 몰라 말꼬리가 자신 없이 흩어졌다. 두눈박이 마을에 들어선 외눈박이가 된 기분이었다. 안 그래도 시어런 제국의 모든 언어는 중원에 비하여 흐느끼듯 늘어지는데, 귀에 낯선 단어를 입으로 읊는 것이 떠듬떠듬한 행태가 연배에 맞지 않게 느껴졌다.

그러나 내가 말을 끝맺을 때를 잠자코 기다리던 스팅 교수는 사르르, 큰 눈을 완전히 휘어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검술부 학생을 마법부에서 만난 게 오늘이 처음은 아니에요, 하며 말문을 연 교수는 제 앞에 직접 술식을 띄웠다. 그리고 술식을 순서대로 전개하는 양상을 보여 주며 차근차근 설명한 뒤, 말미에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잘 이해하고 있네요⋯? 직접 마나 술식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술식의 형태를 알고 있으면 이후 갑작스럽게 마법과 맞닥트렸을 적에 당황하지 않고 상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어요⋯. 다만 마법에서 사용하는 마나와 오러는 비슷해도 다른 개념이라는 것을 머릿속에 기억해 두고 오용하지 않도록 해요⋯?”

“예, 교수님.”

그래도 한고비 넘겼다 하여 절로 큰 숨이 나왔다. 교수는 내게 서클을 전개하는 방식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 보라는 과제를 내고는 다른 학생들이 정화 술식을 펼치는 것을 하나하나 봐주었다.

마엘로 샌슨이 화경의 무인답게 뛰어난 안력으로 동시에 검술을 봐준 것과 달리, 스팅은 한 학생, 한 학생의 자리까지 찾아가 코앞에서 술식을 보며 전개 속도와 손짓, 주문의 언어를 읊조리는 태도, 소모하는 마나의 양까지 차근차근 보고 교정해 주었다.

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지난한 작업이었는데도 학생들은 자신의 차례가 올 것을 기대하고 긴장하며 열심히 술식을 살피었다. 교수 또한 성실하고 꼼꼼한 모습을 보여 과연 존경할 만하다 싶었다.

그 순간, 다시 뒤통수가 따끔하여 고개를 돌렸다.

이쪽을 바라보는 연보랏빛 머리칼의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허리까지 오는 반듯하고 곧은 머리카락을 반묶음으로 묶어 귀밑머리를 늘어트린 소년의 눈을 보고, 나는 혹여 서클이라는 것이 사람의 눈 색을 닮는가 하였다.

불그스름한 기운이 도는 샛노란 금안이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죽일 듯⋯ 노려본다는 말은 조금 과할지도 모른다. 소년의 단단히 굳은 얼굴에는 분함이 어룽어룽 맺혀 있었으나 이전의 장난질과 꼭 같이, 살기가 없었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하니 저 얄쌍한 눈매가 무척 익숙했다.

어디에서 보았더라, 찬찬히 기억을 더듬었다.

아주 까마득하게 오래전의 기억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무림맹 용봉지회에 첫 번째 참가하였을 적의 일이다. 모용세가에서 왔다던 모용 아무개도 에드윈 키아드리스처럼 긴 머리를 단정히 반묶음하고 배추 나비처럼 흰 장포를 어여삐 차려입은 청년이었다.

그치가 예선을 겨루는 중에 한 끗 차이로 내게 밀려나 승부가 갈린 찰나에 꼭 저런 표정을 했더랬다.

그는 나이 서른다섯을 채우지 못하고 협객행 중에 저승길을 건넜다.

젊은 시절 어쩌다 보니 함께 어울릴 일이 많아 속으로 친밀하게 여겼기 때문에 그의 장례식까지 찾아갔던 기억이 있었다.

녀석도 나처럼 직계가 아닌 방계 출신으로, 낭창한 생김새에 꼭 어울리는 연검(*잘 휘어지는 얇은 검)을 자랑으로 삼아 제 무덤에는 꼭 같이 묻어달라 사방에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산산조각이 난 검병(*검 손잡이)이나 겨우 넣어 노잣돈 석 냥과 함께 보냈다.

오래 산 이는 새것을 보더라도 옛것을 추억하는 것이 다반사다. 언제나 그를 모용공자, 하고 불렀기에 그 이름자도 기억나지 않았다.

어쩐지 애달픈 기분이 되었을 즈음 교수가 제 이름을 불러 정신을 차리니, 어쩐지 당혹스러운 표정을 한 에드윈과 먼 곳에서 시선을 맞대고 있는 중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키아드리스 영식이랑 무슨 일 있었니⋯?”

제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눈을 느리게 깜박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잠시 다른 생각을 좀 하였습니다. 수업 중 한눈을 팔아 죄송합니다.”

“으응⋯ 그래⋯.”

그 뒤로는 성실하게 교수가 알려주는 대로 어여쁜 노래곡조를 닮은 주문이나 웅얼거리며 마나를 끌어와 중단전 어림을 휘돌았다가 멀리 흩어 보내는 서클 연습을 하였다. 자꾸만 단전 안쪽에 고여있던 내공이 움칫거리며 왜 저를 두고 시앗질을 하느냐고 투정을 부렸다.

바깥의 마나를 끌어온다는 개념이 익숙지 않은 탓에 제 기분으로는 헛짓을 마냥 반복하는 것 같았으나, 어쨌든 마나를 인지하고 끌어당기는 법을 안다는 데에서 스팅 교수가 만족하는 듯하였기에 수업 시간이 끝날 때까지 그 행위를 반복하였다.

저녁 식사 시간, 저를 보는 동기들마다 혹 좋아하는 사람이 있냐며 물어보는 통에 어안이 벙벙하였으나 풋사랑에 예민할 나이의 아해들이기에 시답잖은 일이라 여겨 신경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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