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전생의 나는 어느 경지에 도달한 뒤로 늘 배움에 목이 말랐다.
동시대, 혹은 전대의 고수들이 건네는 가르침과 깨달음은 그들끼리만 주고받는 토막이기에 그랬다. 경지가 높은 이들은 경지가 높은 만큼 고고하여 쉬이 인세에 내려오지 않았다. 내가 다가설 길이 조금도 없었다.
그들이 같은 문파의 후인들에게 얼마나 다정하였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당장 남궁세가의 전대 가주의 가르침도 그의 아들 손주면 모를까, 내게까지 올 만큼의 여분이 없었다.
그러니 마치 동네 어린아이들을 돌봐주는 보육 무관처럼 손짓 하나 발짓 하나를 고심하여 살펴주며 불면 날아갈까 놓치면 깨어질까 유심히 지켜보는 화경의 무인을 마주한 나는 갈급하게 매달리게 되었다.
초반 며칠이야 죄송한 일이 될 수도 있지만, 내게 쌓인 세월과 경험이 마중물만 있으면 혼자서도 보를 틔울 수 있다 졸라댔다.
연무장에 마엘로 샌슨과 둘이 나왔다.
주변이 고요한 것은 아니었다. 여유시간에 개인 훈련을 하는 학생도 있었고, 그저 적당한 그늘에 동무와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학생도 있었다.
얼굴이 익숙한 이도 있고 아닌 이도 있는 걸 보아하니 여러 학년이 섞여 있는 모양이었다. 어느 건물로 가는 길을 가로질러 가려는지, 연무장을 대각선 방향으로 가로질러 걷는 학생도 있어 조금 놀랐다. 무척 자유로운 행태였다.
그런 연무장의 한켠을 차지하고 서서 샌슨이 먼저 시범을 보이고, 내가 그를 따라 했다.
그는 총 다섯의 검식을 보였다. 이것은 어느 지역에서 유래한 어떤 검식이고 어떤 특징이 있다, 이 검의 요체는 어디에 있으니 그 부분을 생각하여 움직여라, 하는 등의 상세한 설명이 조곤조곤 뒤따랐다.
한 번 본 검의 형식을 눈에 먼저 익히어 그대로 따라 하면, 그는 자세와 속도, 시선을 두어야 할 곳 등 몇 가지 수정을 보아주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총 다섯을 알려 주는 데에 한 시진이 꼬박 들었다. 내가 검을 오래 휘둘러 온 무인이 아니었다면 따라갈 수 없었을 방법이지만, 샌슨은 내가 곧잘 따라 한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자, 여기까지. 이제부터 삼십 분 휴식!”
“예에?”
“두 시간을 물도 안 마시고 움직였잖아. 무리하면 키 안 커.”
화경의 무인이 겨우 한 시진의 검술 시연으로 지칠 리 없어 의아했다가, 문제가 내 쪽이라는 것을 알고 순순히 수긍하며 건네주는 물병을 받았다.
한참 이쪽을 구경하던 학생들 쪽으로 휘적휘적 걸어간 마엘로 샌슨은 저 앉을 자리를 만들고, 그 옆을 툭툭 두드리며 나를 불렀다.
검식과 검형만 익혀 딱히 내공을 소모하지 않은 나도 운기조식을 시작하는 대신에 얌전히 앉았다. 여력이 남을 때에 샌슨과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마엘로 샌슨의 곁에 나란히 앉아 있던 아해 둘은 낯선 얼굴이었다. 한 학년 위의 아이들인가 싶어 고개만 까닥하여 인사하자, 녀석들도 웃는 낯으로 고갯짓하여 인사를 받아주고는 까르르 웃었다.
무언가 말을 꺼낼까 싶어 얌전히 있자, 앉은 소녀 중 하나가 샌슨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이 친구가 그 친구죠. 리틀 키아드리스.”
“어어, 맞아. 금요일인데 오후 한 시부터 지금까지 쉬지도 않고 이러고 있었다니까?”
“몇 시까지 할 건데요?”
“오후 여덟 시.”
“와아!”
듣다 보니 궁금하여 앞으로 고개를 불쑥 내밀어 무릎을 끌어안고 웅크렸다.
마엘로 샌슨을 사이에 두고 앉았기 때문에, 교수의 큰 체구를 피하여 상대의 얼굴을 보고 대화하려면 그 수밖에는 없었던 탓이다.
소녀들이 그 모습을 보더니 또다시 까르르 웃으며 호의를 보였다.
“리틀 키아드리스가 뭡니까?”
“딱 16년 전에 웨슬리 키아드리스 경이 이 아카데미를 졸업했거든. 그분이 그렇게 연습벌레로 유명했어. 새벽 다섯 시부터 밤 열두 시까지 연무장에서 살았다는 거 있지!”
“그래, 지금 연무장 사용 시간이 정해진 것도 다 그 녀석 때문이지. 교사 부임 초년에 덕분에 고생 좀 했어. 지금 너처럼 졸졸 쫓아다니면서 눈이 번쩍번쩍해 가지고.”
“그래도 좋아하시잖아요. 맨날 자랑하시면서.”
“그럼, 내 제자가 나처럼 되고 싶어서 열심히 했다는데 좋아야지.”
“웨슬리 경은 식사도 엄청 전투적으로 했대. 한 끼에 식판을 세 번 비웠다지 뭐니. 너도 몸 축나지 않게 많이 챙겨 먹어. 잘 먹고 얼른 소드 마스터도 되고, 그랜드 소드 마스터도 되고.”
당연하다는 듯 반말을 하는 것을 보니 선배임이 분명하여, 나는 네, 하고 짧게 대답하여 수긍했다.
처음 샌슨의 곁에 앉을 때에는 오늘 익힌 검식에 대하여 물어볼 생각이었으나, 이렇게 새로운 일행이 생겼으니 화두로는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고민하다가 애써 자아낸 물음을 입에 담았다.
“선배는 제가 경지에 오르길 바라시는 거예요?”
“어⋯ 이왕이면?”
“왜요?”
“어어?”
소녀 선배는 잠시간 고민하는 듯하다가, 장난스럽게 눈을 휘어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에는 조금의 질시도 섞여 있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별 이유는 없는데⋯. 그냥 열심히 하니까 응원하는 거야. 누가 열심히 사는 걸 보면, ‘아, 나도 열심히 살아볼까?’ 하는 생각이 들거든. 넌 장래가 기대되는 얼굴이니까 제국기사단 단복 정도는 입혀보고 싶기도 하고⋯?”
“⋯흐음.”
“같은 아카데미 선후배이기 때문도 있고. 네가 잘되면 언젠가 내게 좋은 인맥이 될지 어떻게 아니. 졸업한 후에는 너도 분명 아카데미 출신들끼리 몰려다닐 텐데.”
“어⋯ 그건 또 어째서입니까?”
“이곳은 여러 의미로 상향평준화가 되어 있어서, 천재가 흔하거든. 아무래도 대화가 잘 맞는 친구들끼리 놀고 싶지 않겠어?”
마엘로 샌슨을 포함하여 이곳의 모두가 제 검식을 보이고, 서로를 도와 나아가려 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던 일에 대한 해답이 여기 있었다.
내 평생 검술은 외인부전이라 남에게 쉬이 가르쳐 주지 않는 것으로 알고 지내어 당장 코앞의 기회를 놓치면 배움을 잃을까 전전긍긍 마음 졸인 것이 우스웠다.
이 아카데미 자체가 하나의 문파이기 때문에 그 내부의 인원들끼리의 교류가 좀 더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니 이제야 납득이 되었다. 나만 해도 남궁의 후배가 창천무애검식을 손보아달라고 요청하면 바쁜 시간을 쪼개어 도와주었을 터다.
내가 수긍한 기색으로 잠잠해지니, 선배들과 샌슨은 또 저들끼리 웃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두런거렸다. 그 모습이 퍽 친밀해 보였다. 그렇게 한참을 노닥이는 동안 고개를 끄덕이거나 한두 마디 첨언하여 묻는 것에 대답하며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이 각이 온전히 지나고 내가 물 한 통을 다 비운 뒤에야 샌슨 교수는 일어나 다음 교습을 이어가자 하였고 나는 그를 따랐다.
* * *
주말에는 오전 단련을 마친 뒤 밀린 공부를 하기로 했다. 쉐이든 로제의 오해가 내심 억울했던 탓이다. 사람 이름자 좀 못 외우겠다고 목놓아 울었다는 오해를 산 이후로 녀석은 종종 자장가가 필요하진 않냐는 등의 소리를 하며 놀려댔다.
여전히 보모처럼 구는 쉐이든은 새로 사귄 동무들과 볼일이 있는 모양으로, 아침 식사 자리에서 자기가 없어도 점심과 저녁 식사를 꼭 챙겨 먹으라 몇 번의 당부를 했다. 내가 그렇게 어리지 않다는 것을 언제쯤 이해시킬 수 있을지 몰라 절로 한숨이 나왔다.
공부할 장소는 개인 서재가 아니라 도서관으로 정했다. 내 방의 서재에는 검과 무복, 그리고 각반 따위가 널려있어 가만히 앉아 있는 도중에도 울쑥불쑥 난 문관이 아니라 무관이다 외치며 연무장으로 달려 나가고 싶은 기분이 든 탓이었다.
시어런 아카데미의 다른 건물이 그러하듯, 도서관 또한 거대하고 높은 공간을 정갈하게 구획 별로 나누어 둔 곳이었다. 사람의 키를 훌쩍 넘는 책장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고, 그 앞에는 거대한 테이블이 몇 개 놓여 있었다. 저 멀리 한켠에는 소회의실과 대회의실이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붙어 있었다.
나는 연습지로 사용할 노트와 유인물, 흑연 심이 박혀 있는 연필을 챙겨 들고 도서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먹을 갈아 글을 쓰는 대신에 이미 갈려있는 먹에 깃펜을 찍어 쓰는 것도 나쁘지 않았으나, 오늘 해야 할 일은 단순 암기였기 때문에 굳이 먹까지 들고 오는 번거로움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 여겼다.
흑연이 종이 위를 사각이며 스치는 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도서관 내에는 괜한 초침 소리가 나 집중을 깨트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시계가 없어 헤아리기 어려웠다. 창문 밖으로 해가 높았다.
집중이 잘 안되어 찌뿌둥한 몸을 쭉 길게 펼치는 찰나에, 내 앞자리에 시꺼먼 것이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쪽에서 먼저 소리 없이 고개를 까닥하여 인사해왔다. 아는 얼굴이었다.
“안녕하세요, 선배.”
“응, 안녕.”
배운 대로 인사하자 소년은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되돌려주었다. 그제야 도서관 내에서는 조용히 해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아 입을 닫았다.
새까만 머리에 새까만 눈.
그 소년이었다. 고급 검술 수업을 함께 듣는 루베르 안티 시어런, 시어런 제국의 2황자.
앞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자 처음처럼 삭삭 소리를 내어도 되나 싶어 어린아이가 글씨 연습하듯 빈 종이를 채워가던 손을 좀 더 느리게 하였다.
언뜻언뜻 고개를 들 적마다 눈이 마주쳤다.
처음에는 신경 쓰지 않으려 하였으나 펼쳐둔 책은 안 보고 남 하는 것을 들여다보고 있는 모양새를 보니 신경이 쓰여 결국 연필을 내려놓았다.
“왜요?”
“⋯아니, 조금 놀라서. 내 이름 알아?”
“예.”
“아⋯ 그래.”
별 싱거운 물음이 다 있다.
쉐이든이 미리 알려 주지 않았다면 루베르의 이름자 첫 자도 쓰지 못했을 것을 알았지만 지금 이때에는 당당하였다. 내가 남들 이름자 적는 모습을 보니 제 이름을 자랑하고 싶었나보다 하여 적당히 수긍하고 유인물에 시선을 두었다.
점심시간이 되기 전까지 소년은 그 자리에 있었고, 식사하고 돌아오니 그 자리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