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18화 (18/176)

18.

마엘로 샌슨은 내게 마검을 쥐어 본 적 있냐고 물었고, 더글라스 머스탱은 내게 드래곤이 아니냐고 물었다.

존경하는 스승에게 마검 운운하는 말을 듣자마자 아카데미 도서관을 뒤져 여러 전승을 확인한 나는 현재의 시어런에 마검도, 드래곤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어 표정 관리가 쉽지 않았다.

현생에서 새로 만난 나의 부모는 나처럼 어린아이를 가까이에서 제대로 본 것이 내가 처음이라 하였다. 부친인 윌리엄은 외동이었고, 모친인 세이른은 제 위로 오라비만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섯 살 이하의 어린 아해들을 집 밖에 내돌리지 않는 사회 풍조로 인해 그들은 내가 태어나기 전까지 아이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러한 까닭에 내가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덜 운다든가, 조금 일찍 말문이 트였다든가, 말을 떼자마자 아비를 불러 네 부인에게 잘하라 훈계한다든가 하는 행동들에 어어, 하며 순순히 끌려올지언정 그것들이 이상한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둘째 미하엘과 셋째 아스델이 태어난 이후에야 우리 첫째가 조금 비범하긴 했지, 하고 조용히 저들끼리 속닥거릴 뿐이었다.

어찌 되었건, 그런 연유로 이 몸이 요대(*허리띠)에 검을 찬 이들을 본 이후 꾸준히 기사가 되겠다 주장하는 것을 들은 에른하르트 소백작 내외는 기사가 나오는 동화책 수십 질을 도토리 모으는 다람쥐마냥 모아 서재를 채웠다.

시어런의 무인들이 어떻게 행세하고 어떤 삶을 사는지가 궁금했던 당시의 나도 친절을 거절치 않고 탐욕스럽게 책을 읽었다.

동화 내용은 다들 엇비슷하여, 시어런의 대단한 용사들이 소드 마스터가 되어 용이나 악마를 사냥하고 공주와 결혼하는 것이 기본 골조였는데, 이들은 용을 드래곤이라 부르며 이지가 있는 몬스터라 정의하였다.

동화 속의 드래곤은 내가 아는 용과 달리 배가 퉁퉁하고 뒷발이 강건했으며 뿔이 없었다. 드래곤은 진정한 용과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예?”

“드래곤 하트 정도면 그런 작용을 할 수 있을 수도⋯.”

“아닙니다.”

그래, 용은 중원의 것이 더 나았다.

사슴의 뿔을 달고 뱀처럼 맵시 있는 몸에 날카로운 매 발톱을 단 중원의 용은 갈기터럭도 웅장하여 위엄있는 형상이었으나, 내가 책에서 본 드래곤들은 죄다 통통하고 굴러다닐 것처럼 생긴 것이 아기 돼지 같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색하고 부정하자 머스탱도 멋쩍어하며 손을 내저었다.

“으음, 농담이었어요. 사실 드래곤 하트라고 하기에는 에른하르트 영식의 기운이 약하기는 해요. 에른하르트 백작가는 드래곤과는 조금도 연관이 없는 가문이기도 하고요. 도대체 이걸 어디에서 배워서 어떻게 익혔어요?”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혀 어찌 대답해야 할지를 궁리하다 대꾸하였다.

“⋯그, 당연히 다들 이렇게 하는 줄로만 알고⋯.”

“아니, 그게 왜 당연했는데요?”

왜고 자시고 중원에서는 다들 그렇게 했다.

강호 무림인으로 행세하는 자라면 누구나 단전을 가지고 있다. 위대한 문파와 세가는 저들만의 비밀스러운 심법을 저들끼리 공유하는 것으로 무리를 지었다.

소림 문하생은 대승반야선공과 달마역근경을 익히고, 화산파 문하생은 건곤신공과 대라신공을 익히는 식이었다.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창궁대연신공을 사용했다.

서로의 내공의 기파를 견주어보고 그 짜임새와 기운의 색을 보아 어느 문파인지를 알아맞힐 수도 있었다.

파문 제자의 무공을 폐하거나 위험한 무인을 죽이지 않고 가두어 둘 적에 단전을 깨부수어 범인(凡人)으로 만드는 것은 불가결한 일이었다.

단전이 없으면 무공을 사용하지 못한다. 이건 삼류에서부터 일류무인까지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강호의 상식과도 같은 일이었는데도 몬스터 취급에 뒤이어 상식 없는 인간 취급까지 받게 되는 것이 어쩐지 조금 서러웠다.

내 표정을 본 머스탱이 깜짝 놀라 아이 달래는 행세를 하는 것이 기가 찼다.

“아니, 아니. 탓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냥 신기해서 그래요. 묻고 싶은 것이 정말 많은데, 무엇부터 물어봐야 할지 모르겠어서요.”

“아, 예에⋯.”

“언제부터 이렇게 해 왔는지는, 혹시 기억해요?”

“⋯아마, 태어났을 때부터⋯ 인 것 같습니다.”

그의 얼굴에서 또다시 드래곤, 하고 말하고 싶어 하는 기색을 읽고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장난스러운 기색을 지운 교수가 다시 한번 허, 허 참, 하고 다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

“이건 나도 당장 대답해 주기는 어려운 일이라서요. 좀 더 찾아보고, 자료를 정리해 보고⋯ 그리고 무언가 알게 되면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게 좋겠어요. 지금은 장소도 그렇고 이런 이야기를 하기에 좋은 곳은 아니니까, 나중에 제가 준비가 되면 제 사무실로 부르도록 할게요.”

“감사합니다.”

조금 진이 빠져 꾸벅 인사하고 돌아섰다. 시어런의 무공이 나의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기사들마다 비전으로 삼는 검법이 다르고 땅덩이가 넓어 그런 줄로만 알았지, 아예 이 땅의 사람들 모두가 단전을 사용하지 않을 줄은 상상도 못하였다.

또다시 다른 이들에게 내공심법을 전수하고 싶은 욕심이 불쑥 일었으나, 서로 사용하는 언어와 언어구조가 완전히 달라 심법의 구절을 고스란히 전수할 수 없는 현 상황에서 각 혈도의 의미와 구결의 풀이까지 덧붙이면서 운기조식하는 방법을 가르칠 자신은 여전히 없었다.

금강경에 나오는 시조 한 자락 흥얼거렸을 적에 ‘샨항신힌소우이엔’이 무엇이냐 묻던 가문 호위를 생각하면 아직도 명치께가 체한 것처럼 답답하고 아득하였다.

아카데미의 교수들이 세외 은거기인과도 같아 내가 운기하는 것을 엿보고 그것을 어찌어찌 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가도 사그라들었다.

안법이 특출나다고 하여 가문의 비기인 심법을 눈으로만 보고 해석하여 이끌 수 있었다면 개나 소나 달마역근경이나 자하심공을 익혔을 것이다.

오러 전문가가 분명한 더글라스 머스탱도 내가 설명하며 기운을 일으키기 전까지는 단전의 존재를 상상도 못한 것처럼 굴었기에 더욱더 그러했다.

어쨌든 땀을 흘렸으니 씻기 위하여 기숙사 방향을 향해 걷는데, 묵묵하니 옆에서 이야기를 들으며 서 있다가 나와 함께 걸음을 옮기게 된 벤자민 클라우디안이 불쑥 입을 열었다.

“전 에른하르트 영식이 드래곤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예?”

“핑크색 드래곤은 없으니까요.”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

나는 대답할 말을 고르고 고르다가 때를 놓쳐 그냥 대답하지 않기로 했다. 다시 올려다본 벤자민은 언제나처럼 묵묵한 표정을 하고 있어, 나는 무언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저어하여 귀를 한 번 쓸어 닦았다.

이후 잠자리에서도 문득문득 핑크 드래곤 소리가 떠올라 어안이 벙벙하였다.

* * *

그래서일까. 간밤에는 분홍색 괴물이 나오는 괴이한 꿈을 꾸었다.

아침에 씻다가 말고 동경을 한참 들여다본 것도 꿈 탓이다. 시어런 대륙에서 마주한 이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눈이 크고 코가 높으며 입술이 통통한, 젖살이 덜 빠진 찰떡같은 아해의 얼굴이 동경에 고스란히 비쳤다.

강호 무림을 떠도는 내내 동경은 기생이나 보는 것이라며 사내다움에 몰두하였기에 내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는 버릇이 들지 않아 어색하였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쉐이든도 내 머리 색에 대해서 뭐라 뭐라 이른 적이 있었다.

처음 이 땅에 떨어졌을 때, 색들의 이름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해 연자색인 줄로만 알았던 모친 세이른의 머리도 나와 꼭 닮은 연분홍색이다.

허나 만나는 이마다 머리 터럭이 파랗거나 금빛이거나 백발이거나 녹색이거나 하는 식으로 무지개마냥 번쩍번쩍하였으니 그저 이 땅의 인물은 모두가 이런가 보다, 당연하게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가 싶어 저어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연한 물빛의 눈동자도 외탁을 하였다.

둘째 미하엘은 아비와 어미를 나누어 닮아 검은 머리칼에 물빛 눈을 하고 있었고, 이제 다섯 살이 되는 막내 아스델은 반대로 핑크빛 머리터럭에 흰토끼마냥 붉은 눈을 하고 있었다.

분홍빛 머리가 신기한 것이었으면 제 어미의 이름자도 제국 도성에 유명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어 억울한 마음이 일었다.

갓 씻어 젖은 머리칼을 손빗으로 빗어 넘기고, 동경을 가까이에서 보았다가 멀리서 보았다가 하여도 그저 얼굴에 눈코입이 온전하게 붙어 있으니 사람은 사람인가 보다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꾸준히 무인의 몸을 가꾸며 창궁대연신공을 연마하였기에 미간과 코를 기준으로 양쪽의 대칭이 잘 맞아 삐뚠 버릇이 없는 것이 그나마 마음에 들었다.

이제 내 나이가 열셋인데 이만큼 자랐으니, 스물이 될 즈음에는 전생과 흡사할 만큼 성장하는 것을 기대해 보아도 좋겠다.

그래도 전생에 어릴 적에는 이 나이 즈음하여 마음이 수런거리고 괜히 붉은 치마폭이 부끄러워 동년배 여인이 있으면 멀찍이 멀어져서 괜히 제 얼굴을 한 번 씻고 오거나 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제는 나이를 먹어 그런지 몸의 균형이나 팔다리의 길이, 건강 따위가 더 중하게 여겨지는 것이 우습다.

괜히 시간만 빼앗겼다 혀를 차며 옷가지를 챙겨입고 방을 나섰다.

오늘은 아침 준비가 좀 오래 걸렸는지 묻는 쉐이든에게 별일 아니라 대답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연무장으로 걸어 나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던 중에 쉐이든이 왁, 하고 놀란 기색을 보였다.

“그래서, 오늘 오전도 검술 수업인데, 오후에도 내내 연무장에 있겠다고?”

“샌슨 교수님께서 연무장을 열어 두는 시간까지는 봐주신다고 하셨으니까⋯?”

“아니,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 되지. 금요일 저녁은 주말과 붙어 쉬는 것인데.”

“왜 안 돼?”

“아니, 그게 상도덕이⋯ 으음, 교수님이라면 좋아하실 수도 있겠네⋯.”

* * *

“그래서, 오늘 오후 여덟 시까지 새 검법을 수련하고 싶다고⋯.”

“예!”

“으응, 그러자. 새로 검식을 익힐 때에는 봐줄 사람이 필요하니까, 당연한 일이지⋯.”

“예, 감사합니다!”

“어어. 고마워해.”

그쯤 되어서는 나도 샌슨의 떨떠름한 기색을 눈치채었으나, 방긋 웃는 것으로 갈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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