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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16화 (16/176)

16.

최근 꽤 인상 깊게 들었던 이야기가 있어서 착각했다. 경영부 데미안은 얼마나 단비 소리를 듣고 다녔을지 모르겠다. 민망하여 멋쩍은 얼굴을 한 손으로 대강 문질러 가리고, 서 있는 순서대로 대답한 이들을 향해 내 소개를 했다.

이것도 중원과 퍽 다른 점이었다. 중원에서는 남궁정연이오, 하고 이야기할 일이 없었다. 늘 내가 읍하여 나를 소개할 적에는 남궁에서 왔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였으니.

“미카엘 에른하르트라고 하고⋯ 검술부에서 왔습니다.”

자색 머리 소녀부터 회색 머리 소년까지, 서 있는 순서대로 이름을 소개하고 나니 할 것이 없어 멀뚱히 앉아만 있었다.

무어라 더 말을 붙여야 할지 모르겠다. 닭들 사이에 들어간 망아지가 된 기분이었다. 아니면, 남의 집 병아리들 사이에 끼어든 멧돼지 정도.

그러고 있자니 아까 자기소개를 주도했던 회색 머리 데미안이 후, 한숨을 쉬며 날 보며 입을 열었다.

“에른하르트 영식이라고 부르면 되겠습니까?”

“으음⋯ 아닙니다. 제니 양도 계시고, 다들 짧게 부르는 편이 좀 더 편할 것 같습니다. 미카엘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좋습니다. 그럼 저도 데미안이라고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아, 그럼 저도 이름으로.”

“예. 그럼 마리앤, 제니, 아⋯ 아이던.”

“이반.”

“이반, 데미안.”

“예, 맞습니다. 우리 그렇게 부르도록 하죠.”

이름을 틀린 것이 미안하여 슬쩍 바라보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까닥하여 괜찮다 전하는 밤색 머리칼 소년의 눈짓에 마음이 편해졌다.

기후가 온화하고 국가가 풍요로운 탓일까, 아니면 다들 어린 연치의 잘 배운 자식들을 모아 둔 탓일까. 대부분의 아해들의 성정이 온후하고 다정한 것이 흡족하여 마음이 기뻤다.

“그 유명한 미카엘 영식을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사이가 되어서 기뻐요. 소드 익스퍼트 상급이라고 하셨죠?”

“음. 별것 아닙니다.”

“⋯하하, 그렇게까지 겸양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원래도 말수가 좀 적으신 분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오해하지 않겠습니다.”

무슨 오해를? 하고 고개를 퍼뜩 들었다. 무엇인지 몰라도 심기가 상한 쪽은 애써 나를 변호하여 설명하는 데미안 쪽이 아니라, 먼저 말을 건 마리앤인 것이 분명했다.

대강 눈치를 보다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음⋯ 낯을 가린다기보다, 또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모르는 편입니다. 알려 주시면 감사히 배우겠습니다.”

“아아, 그, 아니에요. 저도 괜한 것을 물었다는 생각은 했으니까요⋯.”

쉐이든이 시간이 날 적마다 일곱 어절, 일곱 어절 노래를 부른 까닭을 대충은 눈치채고 있었기에 내 예의에 문제가 있었음을 알았다.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는 것이야 어렵지 않으나, 사내를 다루는 법은 알아도 여아는 어색하여 대하는 법이 서툴렀다. 어린 여아들은 나를 볼 적마다 울음을 터트리는 일이 많았고 검을 가르칠 차례가 내게 돌아오는 일도 없었기에 영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두 분은 원래도 알고 지내던 사이셨나 봐요.”

“인근에서 파티가 있을 때마다 몇 번 얼굴을 본 정도입니다.”

내가 참석한 연회라고는 이 몸의 생일 연회밖에 없으니, 단비가 아닌 데미안도 나의 생일을 축하해주러 온 소년들 중 하나일 터였다. 알아보지 못한 것이 미안하여 음, 하고 다시 흘긋 바라보며 얼굴을 외우려 노력했다.

비둘기를 닮은 잿빛 머리에 다갈색 눈동자가 전체적으로 흐릿한 인상을 주는 소년이었다. 자리에 앉아 있어 자세히는 알 수 없어도, 소녀 둘은 나보다 키가 자그마했고, 소년 둘은 나보다 조금 더 키가 컸다.

서로에 대해 알기 위한 몇 가지의 질문과 몇 가지의 대답이 친밀하게 오갔다. 처음 말 꺼내기를 저어하던 제니도 곧 웃는 낯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냈다. 서로의 가족관계나, 취미, 특기 따위의 이야기가 술잔처럼 몇 순배 돌았다.

마리앤은 남작가 출신이며 손위 자매도 마법을 한다 하였고, 제니는 평민이지만 단승 작위를 얻어 황궁의 관리 중 하나로 들어가는 것이 꿈이라 하였다.

이반은 말수가 없는 편이라 맞장구를 치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데 주력하였는데, 그에게 화두가 돌아갈 때마다 두툼한 눈썹꼬리가 슬쩍 처지는 것이 순해 보였다.

데미안의 경우에는 그 모든 대화를 조율하고 서로의 기분을 맞추어주는 데 아주 능했다. 내가 입을 열 적에 설명이 부족하면 한 마디를 덧대어주거나, 말실수를 고쳐주는 등의 행동을 하는 것이 쉐이든을 닮았다.

쉐이든보다 더 침착한 기색으로 언성을 높이는 일이 없어 절로 그에게 의지하는 마음이 들었다.

세드릭 교수가 각 조의 책임자를 뽑으라 하였을 때, 우리는 만장일치로 데미안을 추천하였다. 그는 수긍하며 짧은 한숨을 한 번 내쉬었으나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수업이 끝나자 쉐이든과 데미안이 친밀하게 인사하는 모습을 보고 새삼 내가 그간 얼마나 무심했는지를 깨달았다.

둘은 수도 인근에 사는 귀족가의 영식과 영애들은 본디 서로에게 관심이 많은 편이라 그런 것이고, 내가 특별히 이상하거나 못난 것이 아니라고 달래 주었다.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공후백 영식 영애가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니 꼬박꼬박 인사만 잘하면 내 탓을 하는 놈이 없을 것이라 호언장담해 주기도 하였다.

쉐이든과 둘이 저녁 식사를 하면서도 주고받을 이야기가 이전보다 많았다.

마음의 거리가 가까워진 탓인지, 오늘 새로운 동무를 여럿 사귀게 된 탓인지. 쉐이든도 자신의 조에 괜찮은 아이들이 많아 마음에 든다 하였고, 나 또한 알게 된 아이들의 근황을 전하며 이름은 다 외웠으되 성씨가 헷갈린다는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렇게 식사가 끝난 뒤, 쉐이든은 오늘 내가 마주한 녀석들의 이름을 직접 내 아카데미 수첩에 적어주었다. 머리 색과 눈 색을 함께 적어 준 덕에 적잖이 안심이 되었다.

내가 모르는 것을 많이 알고 있는 쉐이든이라, 함께 수첩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궁금한 것을 불쑥 물었다.

“마법 수업에⋯ 그 주의해야 한다는 사람 있잖아.”

“에드윈 키아드리스?”

“그래, 이 사람. 나보다 위 학년이라고 하였는데 어째서 기초 수업을 들어?”

“음, 그건⋯ 아마 에드윈이 아카데미의 모든 마법 수업을 다 듣고 졸업하고 싶기 때문일 거야. 그러니까, 앤젤라 스팅 교수님은 마법계에서 마엘로 샌슨 교수님만큼 유명한 분이시거든. 모든 학문에서 스승은 중요하지만 마법과 검술은 유난히 더 그런 편이니까.”

완전히 이해하였다. 마법부 학생들의 빛나던 눈동자와 정중하게 머리꼭지까지만 손을 들어 올려 제 질문 차례를 기다리던 모습들을 떠올리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지 아직 일주일이 다 지나지 않았는데도 마엘로 샌슨에게서 받은 도움이 정말 크고 많았다.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하니 앞으로 마법 수업 시간에는 최대한 조용히 말을 잘 들어야겠다 다짐하게 되었다.

“학교가 넓으니 알아보기 힘들다. 모든 영식, 영애가 이름표를 달고 다니면 좋겠어.”

“으응⋯ 그러면 좋겠네. 이왕이면 눈에 잘 띄게 노란색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었다. 아카데미 노트를 옆에 펼쳐두고 몇 번을 더 반복하여 읽은 뒤, 쉐이든을 옆방으로 보내고 다시 연무장으로 나섰다. 남궁의 무공들을 찬찬히 되짚어보는 것이 내게 깨달음을 안겼으니 새 검술을 익히기 전에 그것을 좀 더 손보아 둘 필요가 있었다.

* * *

이번 고급 검술 수업에서는 벤자민이 대련하는 것을 보았다. 상급생의 검법이 난폭하게 쏟아지는데도 묵묵히 허초를 제하고 실초를 찾아내는 능력이 대단하여 적잖이 감탄했다.

수업이 끝난 뒤 벤자민은 쉐이든과는 미리 이야기되어 있다며 나를 끌고 갔다. 식사를 같이 한 뒤, 다음 수업 장소로 함께 이동하였다.

벤자민은 쉐이든보다 말수가 적고 서로의 간격에 신경 쓰는 편이었다. 키가 훌쩍 높아 올려다보기는 불편하였으나 서로의 검식에 대하여 토론하는 것은 즐거웠다. 나는 그에게 내가 알고 있는 중검, 종남의 검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중단세(*칼을 뽑아 몸 앞에 바로 하여 상대를 겨누는 자세)를 유지하며 기운을 일으켜 상대를 압박하는 이야기를 하였을 적에 벤자민은 한참 웃으며 그렇게 기운을 일으키려면 오러가 아주 많아야겠다 하였다.

생각해 보니 내가 아는 종남 고수는 모두 다 내공이 막대하였던지라 그렇다고 하였더니, 순순히 노력해보겠다는 대답이 돌아와 흡족하였다.

<마나와 오러, 오러와 마나> 수업을 하는 더글라스 머스탱 교수는 벤자민과 얼핏 닮은 외양을 한 사내였다.

불혹에 가까운 나이의 남자는 간단한 자기소개를 한 뒤 검과 흡사한 길이의 단봉을 하나 꺼내어 내보였다. 교실이 아니라 연무장을 닮은 너른 공터에서 수업을 진행하였는데 모든 건물이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이 수업 내용을 짐작게 했다.

“여러분이 알고 있다시피, 오러와 마나는 같은 지점에서 태어난 기운입니다. 같은 사과나무에서 태어난 사과도 어떤 것은 사과주스가 되고, 어떤 것은 사과주가 될 수 있는 것과 똑같은 일입니다. 가공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죠.”

교수의 거뭇한 얼굴은 수염 한 톨 없이 매끈했다. 시종일관 웃는 낯이었다. 서글서글한 얼굴을 하고 조용하고 얌전한 말씨로 말하는 것이 어색하게 여겨졌다.

“대부분의 기사들은 집중과 신체 단련을 통하여 오러를 생성합니다. 꾸준한 수련과 수행은 자신을 알게 하고, 비물질계를 인식하는 눈을 트이게 합니다. 이것은 신체 강화와 무기의 절단력 강화에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기사들의 꿈과 목표가 됩니다.”

머스탱 교수는 한 호흡을 정돈하며 학생들을 둘러 살핀 뒤, 이어 말했다.

“반면에 마법사들은 학습을 통하여 마나를 이해합니다. 먼저 머리로 마나의 성질과 비물질계의 존재를 이해하고 정해진 공식에 따라 비물질계에 접촉한 뒤, 몸으로 마나를 정제하여 더 먼 밖으로 꺼내어 현실계에 장악력을 갖습니다. 때문에 마법사는 더 넓고 단단한 심상 통로를 갖는 것을 중요시하게 됩니다.”

머스탱 교수가 끌어오는 기운이 반 갑자도 안 되는 듯하여 수업 시작 전에는 조금 실망하였지만, 말이 끊어지는 사이사이 단봉에 서리는 검기와 단봉 끝에 피어나는 환한 빛이 내 눈을 홀렸다.

안법을 돋우지 않아도 기의 흐름이 선명하게 보였다. 마나로 자수라도 놓는 것처럼 섬세한 작업이 무척 신기하였다.

수업을 들으러 온 서른 명의 학생들 중 대다수는 검술부였다. 마법부의 학생들은 책상물림이 많으니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스탱 교수는 학생들에게 널찍이 거리를 띄우도록 하고, 오러를 사용하지 못하는 이들도 최대한 집중하여 검을 반복하여 휘두르도록 하였다. 무언가 배울 것이 분명 있겠다 싶어 나도 열심히 교수의 말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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