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그러한 이유로 나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
오후 수업을 맡은 세드릭은 오십 대 초반의 여성이었는데, 갈색 머리와 갈색 눈을 한 것이 에른하르트 소백작저에 남은 유모를 떠올리게 했다. 다만 세드릭이 순박한 유모와 닮은 것은 머리터럭과 눈의 빛깔뿐이다.
세드릭은 무척 짓궂은 눈매를 가지고 있어 자유로운 성품과 행실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특히 큼직한 남성용 셔츠와 베스트를 입고, 셔츠 소매를 팔뚝까지 둥둥 걷어 올린 모양새가 그랬다.
“만나서 반가워, 우리 꼬마 친구들. 아니, 아니. 이제 사교계 데뷔는 했으니까 어른인가? 적당히 절반씩 섞지 뭐. 그럼, 우리 꼬른 친구들. 일단 이것부터 하나씩 챙겨 가 볼까?”
인사말부터가 경쾌하고 톡톡 튀었다. 세드릭 교수는 끙, 하고 미리 교실 앞쪽에 준비해 둔 듯한 수레를 끌어 오더니 학생들을 향해 손짓했다.
이곳에는 검술부가 아닌 학생들도 섞여 있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허약한 몸을 하고 있었다. 나는 오전의 깨달음으로 기분이 무척 좋은 상태였기 때문에 마땅히 먼저 나서 수레에 있는 가방들을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을 도왔다.
얼떨떨하게 가방을 받거나, 환하게 웃거나, 꾸벅 인사하거나 하는 학생들의 몫을 모조리 나누어 준 뒤에 나도 가방 하나를 챙겼다.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몰라도 꽤 묵직한 배낭은 하나하나가 내 골반에서 머리꼭지만큼을 다 가릴 수 있을 만큼 큼지막했다.
“생각보다 힘이 세네. 도와줘서 고마워, 에른하르트 경.”
“예.”
“생각보다 더 과묵하기도 하고.”
무슨 의미지? 대답할 말을 지어내지 못하여 그냥 입을 다물었다. 내 곁에 서 있던 쉐이든이 익숙하다는 듯 인자한 미소를 지어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교수의 지시에 따라 각자 배정받은 너른 책상 위에 가방의 내용물들을 펼쳐 늘어놓았다.
가장 먼저 가방의 위쪽에 매달려 있는 것을 살펴보았다. 침낭이었다. 중원에서는 그저 흙바닥을 내공 실린 검으로 한 번 훑어 배기는 것만 없애고 드러눕거나, 오래 자란 고송에 등을 기대어 앉아 잤기 때문에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은 없었다.
침낭은 고치마냥 양옆과 아래를 막아 둔 이불처럼 생겼는데, 손으로 쓸어보면 보들보들했다. 젖지만 않는다면 꽤 따뜻하겠다.
가방을 열자 신기한 재질의 병들이 있었다. 유리처럼 투명하였으되 좀 더 가벼웠다. 슬쩍 그것으로 테이블을 두드려보았더니 통통, 빈 소리가 났다. 애초에 깨트릴 생각이 없기도 했지만, 생각보다 단단한 모양이었다.
그 아래로 네모난 상자 하나가 들어 있었는데, 그것은 또 얇게 펼친 철로 되어 있었다. 고운 면포로 서로 부딪히지 않도록 구획을 나누어 놓은 것에는 약물의 이름이 각기 적혀 있었다. 그 사이에 부싯돌 하나가 끼어 있는 것이 신기해 한참을 보았다.
상자의 아래쪽에서는 주머니가 세 개, 물병이 두 개 나왔다. 놀랍게도 하나의 주머니에는 납작하게 말린 빵과 비스킷이, 두 번째 주머니에서는 육포가, 세 번째 주머니에서는 소금이 나왔다. 물병 두 개 중 하나는 맑은 물이 가득 차 있었으나, 하나는 비어 있었다.
학생들이 적당히 확인을 마친 것 같자, 세드릭 교수가 곧장 설명에 들어갔다.
“침낭은 경량화 마법과 방수 마법이 새겨져 있는 침낭이야. 꾸러미 중에서 가장 비싼 거니까 찢어지거나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해. 한 학기 내내 사용할 거야. 세탁을 하고 싶다면 마법부 친구들에게 슬쩍 부탁해서 클린 마법을 걸도록 하렴. 물로 세탁하면 이 보들보들한 감촉이 사라지더라고.”
생각보다도 더 상세한 조언이었다.
“가방 안이 거의 비어있는 것처럼 보이지? 너희들이 들고 있는 건 앞으로 생존 배낭이라고 부를 거야. 꼭 필요한 건 내가 미리 채워 두었지만, 자기 자신의 근력에 맞게 물건을 더하거나 빼는 것은 자유롭게 해.”
“네에.”
“우리는 이번 학기 동안 교실에서는 어떻게 야영할 장소를 선정하고 바닥을 고르는지, 또 어떤 방법으로 식사를 하는지, 야생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먹을 수 없는 것은 무엇인지를 배우게 될 거야.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기간을 피해서 두 차례 야외수업도 진행할 건데, 알레르기나 신체 문제가 있는 학생은 오늘 수업 시간이 끝나고 내게 알려주면 돼.”
알레르기가 뭐야? 쉐이든에게 슬쩍 묻자, 그런 것도 모르냐는 듯 못 먹는 음식이 있다면 신경 써주겠다는 거야, 하는 대꾸가 돌아왔다.
야영을 한다면서 먹을거리의 호불호도 배려해준다니, 이건 야영이 아니라 피크닉 아닌가. 자연스럽게 여름마다 에른하르트 가문의 사람들과 함께 돗자리를 깔고 햇빛을 쐬던 여름 언덕을 떠올렸다.
“겸사겸사 어떤 재료가 값어치가 있는지, 또 채취 방법은 어떻게 되는지를 교실 안에서 학습한 뒤, 직접 구한 재료들로 연금술 기초 실습을 마치는 것까지가 한 학기. 다음 학기에는 매주 수업 일정을 이틀 연이어 잡아 둘 생각이니, 흥미 있는 학생들은 미리미리 계획적인 삶을 살아 두도록 하렴. 시수가 늘어난다고 학점을 더 많이 배정해 주지는 않을 거란다.”
나는 세드릭 교수의 말의 태반을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에, 그저 묵묵히 있었다.
시간표를 짜거나 하는 일은 쉐이든이 도와줄 테고, 지금까지 들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 수업에 대한 흥미도가 올랐기 때문이었다. 숲에 들어갔을 적에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 안력을 돋웠다.
“침낭은 꽤 부피가 큰 물건이야. 하지만 갑작스럽게 조난당하는 것이 아니라, 야영을 계획하고 있다면 꼭 챙겨야 하는 물건 중 하나이기도 해. 대개의 야영은 걷고, 걷고, 또 걷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거든. 중간에 몬스터라도 만나 봐. 힘이 쪽 빠져 있는데 잠까지 설쳐서야 다음날 지나가던 오크에게 휙ㅡ 잡혀가도 모르는 일이잖니.”
세드릭 교수는 어흥, 하고 호랑이를 흉내 내듯 갈고리 손으로 허공을 휘젓고는 다시 저 혼자 말을 이어갔다. 대답해 주는 학생이 없어, 대답을 해야 하나 싶다가도 마치 가면극이라도 하는 양 연극적인 어조로 말하는 것을 보니 원래 이런 사람인가 싶어 잠자코 있었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게 바로 불이지. 만약 토끼나 사슴을 사냥하는 데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불이 없으면 절대 먹어서는 안 돼. 제대로 익히지 않으면 어떤 병에 걸릴지 아무도 모른단다. 나무상자의 시약과 그 위의 플라스크들은 시료 채취를 위한 것들이야. 학생 개인의 힘으로는 구하기 힘든 것들이니 잃어버리지 않게 잘 챙겨 둬.”
“물병 중의 하나가 비어있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요?”
“좋은 질문이야. 행정학부 플러스 십 점. 물은 꽤 무거운 짐이기 때문에, 필요하다고 식수를 바리바리 챙겨 갈 수가 없어. 그래서 어딜 가나 물길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지. 아주 급할 때에는 계곡물을 그대로 벌컥벌컥 마셔야 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간단한 정화 기구를 사용할 수도 있지. 빈 물병의 아래쪽에 있는 뚜껑을 열어 볼까?”
무슨 점수를 받은 건지는 모르지만, 일단 질문한 학생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시키는 대로 물병의 아래 뚜껑을 열자 물이 차 있는 물병의 입구와 꼭 맞는 크기의 주둥이가 보였다.
“빈 물병의 아래쪽 절반에는 숯, 정화된 고운 모래, 그리고 아주 고운 면포가 층층이 담겨 있단다. 물에 섞여 있을 수 있는 이물질을 걸러내기 위한 구조야. 여과에는 시간이 좀 걸리기 때문에, 여유 시간이 많을 때 시도해 보는 걸로 하자. 일단 오늘은 앞으로 한 학기 동안 붙어 다닐 팀을 꾸려볼까⋯?”
세드릭 교수는 다갈색 눈동자를 장난스럽게 빛내며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야영 수업은 딱 보기에도 어딘가 놀러 갈 것처럼 여겨지는 수업이었기 때문에 학부에 상관없이 사십여 명 정도의 학생들이 뒤섞여 신청한 모양이었다. 벌써부터 함께 수업을 신청한 친구들끼리 서로 우리는 떨어지면 안 된다느니, 함께 해야겠다느니 하며 웅성웅성 팀을 꾸리려 굴었다.
“이것저것 설명했지만, 가장 편하게 야영할 수 있는 법은 말이야, 역시. 마법사랑 함께 하는 여행 아니겠니? 불도 피워줘, 물도 따라줘, 가끔 피곤하면 바람도 선선하게 불어준단다?”
이것 또한 극의 일종일까. 세드릭 교수의 왼손 검지에서 물방울이, 오른손 검지에서 불꽃이 튀었다. 소란스러워진 아이들의 머리 위로 산들바람이 사악 훑고 지나갔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마법은 더 생활 친화적인 무언가일지도 모르겠다.
제갈세가의 진법이 하는 일이야 은신처를 만들어 숨기고, 침입자들을 미로에 가두고, 죄인을 가둔 석굴을 단단하게 유지하는 정도의 일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는 나로서는 무기가 아닌 마법을 접할 적마다 신기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마법부 학생들, 손 들어봐요. 좋아, 학생들은 전부 다른 팀. 손잡은 거 놔요, 안 잡아먹어. 여기에 우리 연약한 마법사를 지켜 줄 검사를 한 명씩 붙이고⋯.”
여기저기서 원망하는 신음이 들렸다. 함께 온 동무들과 영원히 이별하는 것처럼 끌어안거나 손을 잡고 난장을 피우는 아이들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구경했다.
“좋아, 이제 좀 생활력 있는 행정서무부 친구들이 각 팀에 하나씩 들어가면 되겠다. 한 팀당 다섯 명으로 여덟 팀 만들 거예요. 서로서로 왜 이렇게 서먹해. 아직 입학한 지 일주일도 안 됐잖아. 친구 사귄다, 생각하고 맘 편히 움직이라고.”
어, 하는 사이에 쉐이든과 다른 조에 들어가게 되었다.
낯선 두 명의 소년과 두 명의 소녀를 앞에 두고 안녕하세요, 서먹하게 고개를 까닥여 인사했다. 묵례 이상의 것을 하지 말라던 쉐이든의 당부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하나둘 인사하고, 교수가 시키는 대로 책상을 서로 붙여 같은 팀끼리 동그랗게 둘러앉도록 했다.
소녀 둘은 자색, 푸른색 머리를 하고 있었고 소년 둘은 짙은 밤색과 짙은 회색 머리였다. 실수로 다른 조 아해들과 헷갈리지 않기 위하여 그들의 얼굴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몇몇이 시선을 슬슬 피하기 시작하여 멋쩍어졌다.
“무섭게 하려는 건 아니었습니다.”
“아니, 아니⋯ 무서운 건 아니고. 각자 자기소개 먼저 할까요.”
“좋아요. 전 마리앤 필로덴도르. 마법부고, 이제 1서클 마스터했어요. 큰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제니. 성은 없으니 편하게 제니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학술부에서 왔고⋯ 뭐든 열심히 해 볼게요!”
“이반 홀모스. 경영부에서 왔고, 홀모스 자작가 넷째인데⋯ 서무부에 쌍둥이 형제가 있으니 길 가다가 모른 척하면 얘가 이반이 아니구나, 하고 생각해 주시면 됩니다. 반갑습니다.”
“전 데미안 크리스토퍼라고 합니다. 법학부에서 왔고⋯ 생존 여행에 관심이 있는 편이라 수강하게 되었습니다.”
“⋯단비?”
“⋯제가 알기로 단비는 경영부에 있는 데미안 필라로이⋯.”
“음.”
멋쩍고 민망하여 시선을 저 멀리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