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14화 (14/176)

14.

침소에 들기 전에 얼굴을 깨끗이 씻기도 하였고,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 꼬박 연무장을 돌고 운기조식을 끝마친 덕분에 쉐이든과 함께 하는 아침 식사 시간에는 이전과 같이 멀끔한 얼굴을 할 수 있었다.

부식으로 나온 포도를 한 알 한 알 똑똑 따 먹으면서, 어쩜 이리 풍요로운 땅에 다시 태어났을까 하며 감탄하고 있자 앞에서 허어, 하는 소리가 들렸다.

“왜?”

“일곱 어절로 말해 줄래?”

“⋯왜 그렇게 남 먹는 걸 보고 있어?”

“아니, 이건 걱정을 해 줄 필요가 없네⋯. 어떻게 이렇게 하나도 안 붓지?”

뭔가 이상한 것이라도 묻은 양 아침부터 흘긋대는 것이 신경 쓰였던지라, 이어지는 말이 우스워 소리죽여 웃었다.

이곳의 기사들은 운기조식을 따로 하지 않았는데, 비슷한 것으로 마인드 컨트롤인가 하는 명상술이 있다고 하였다. 그들이 이끄는 마나는 심장이나 주요 장기를 감싸 강화하고 흩어지는 것이 고작이었기에 저처럼 부기가 가신다거나 하진 않았다.

언젠가는 이것에게도 내공심법을 전해주고 싶은데, 이곳 언어로는 발음도 안 되는 그 많은 혈도 자리를 어떻게 설명하고 번역하여 전달한단 말인가. 잘못 실수하면 그대로 주화입마로 흘러가는 길임에, 중원에 살 적에 의서 한 권이라도 읽어 볼 걸, 싶어 가슴 한켠이 갑갑했다.

“그냥, 원래 그랬어.”

뻔뻔하게 대답하자 이번에는 하,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자, 수업이나 들으러. 저를 이끄는 좁은 등이 어쩐지 든든했다.

* * *

금번 초급 검술 수업은 지난 수업 때에 지적받았던 것을 얼마나 교정하였는지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모두가 한 차례 검식을 펼치고, 다시 한 사람 한 사람 교정을 받은 뒤, 또다시 몸에 익은 검로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새로운 땅에 와서 새로운 몸을 입었는데, 이전의 검술을 고집할 이유가 있는가?

에른하르트의 목련 기사단에서야 제대로 된 검법을 구할 수 없어 다른 길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저쪽에서부터 아해들의 하는 양을 보아주다가 내 쪽까지 가까이 다가온 샌슨의 소매를 덥석 잡으려 들었더니, 그가 내 손을 휙 피해버렸다.

나도 놀라고, 마엘로 샌슨도 놀랐다. 내가 놀란 것은 저도 모르게 펼친 수법이 금나수(*손을 갈고리처럼 하여 상대를 잡아채 제압하는 무공)였기 때문이었다. 생각 없이 다가오다가 제자가 뻗은 손을 야멸차게 피한 모습이 되어버린 마엘로가 허허, 웃으며 말을 걸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게 하고 있나?”

“제가 사용하고 있는 검법에서 살기를 지우고 부족한 부분을 덧대어 기우는 것과 더 좋은 검법을 새로이 배우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좋겠습니까?”

“⋯흐으음⋯.”

그로서도 뜻밖의 화두였는지, 샌슨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나는 이때 문득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제국 소유의 기사를 만들어내는 아카데미에서 뛰어난 무공을 일괄 교습하지 않는 연유가 궁금해진 것이다.

군문(*군대)의 사람이라면 모두가 일괄적으로 같은 검식을 배워 익힐 수도 있을 것인데, 어째서 그리하지 않는 것인가. 한 사람의 영웅이 세상을 구해내는 동화가 너무 많은 곳이기 때문인 걸까.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고 있으니, 마엘로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가지고 있는 걸 좀 더 고치는 게 좋지?”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가 가진 검법이 샌슨 교수님이 가진 것들과 비교해서⋯.”

“아니, 그런 문제는 아니고. 일단⋯ 잠깐, 자리 좀 옮기자.”

마엘로 샌슨은 나를 이끌어 조금 더 학생들과 먼 곳으로, 그러나 시야에서는 벗어나지 않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등나무가 가까웠으나 꽃이 피는 계절이 아니라 향기롭지는 않았다. 멀뚱히 눈을 깜박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검법, 어디에서 배웠어? 이름은 알고 있고?”

“창천무애검법이라고 합니다. 가르쳐 준 이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언제 알게 되었는데?”

“어, 아주 어릴 적에⋯.”

“네가 연무장을 빙빙 도는 취미가 생기기 전에?”

“네.”

그가 나를 신기한 것을 보듯 본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내 스승 앞에서 거짓을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본디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뒤에 들킬 것이 두려운 탓도 있었다.

“네가 이상한 건 아냐. 아닌데⋯ 아니, 이상한데 이상하다고 말하는 게 이상한가?”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어. 내 표정이 기묘해지자 남자는 허어, 하고 제 턱을 쓸며 잠시간 더 고민했다. 한 손에 꼽는 만남으로도 그가 직설적이고, 명쾌하게 내게 해답을 내려 줄 것을 알아 얌전히 기다렸다.

“버릇이 들었어.”

“나쁜 버릇은 고치면,”

“아니. 검법에 들어있는 몇몇 버릇 같은 게 아니야. 숨을 쉬는 법부터가 달라. 너는 이 검법을 수행하기 위해 검을 사용하지 않는 동안에도 일정한 규칙에 따라 숨을 쉬고, 손을 뻗고, 무릎을 굽히잖아.”

“⋯.”

“흥미로운 것이 생기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눈을 사용하는데, 넌 오러부터 끌어올리려고 하지. 앞을 볼 때도, 무엇을 들을 때도, 심지어 생각을 하는 것까지도 모조리 다 전투적이야. 네 나이를 볼 때, 어린 시절 잠깐 만나 검법을 가르쳐 준 죽은 전인 정도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성취와 행동들이 계속해서 보이는데⋯.”

헉, 나는 숨을 들이켰다. 낯빛이 희게 질리진 않았으면 좋겠다. 그가 대단한 무인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동시에 전생의 나를 어떻게든 밀어내 보려고 결심한 당일에 전생을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손아귀에 땀이 들어찼다.

마엘로 샌슨은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이것만큼은 거짓말을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미카엘 에른하르트. 너 혹시⋯.”

“⋯.”

“마검을 쥐어본 적 있니?”

“네?”

마검?

그가 보기에도 눈을 끔벅이는 내가 무척 당황스러워 보였는지, 멋쩍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이 세상에는 그런 식으로 살기 어린 검법을 전수하는 방법도 있는 걸까.

마교 교주가 사용한다던 천마신검의 전승과 비슷한 형태인가 싶어 심각해진 나와는 정반대로 샌슨은 도리어 마음이 가벼워진 모양이었다.

“아니, 네가 너무 동화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구니까 혹시나 해서⋯ 아니라면 됐어. 어쨌든, 그런 상태이기 때문에 네가 굳이 몸에 익은 검법을 버릴 필요는 없어. 애초에 검법은 하나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야. 세상에 가장 완벽한 검법 같은 것이 존재했다면, 이렇게 많은 검법이 존재하지 않았을 거다.”

“⋯.”

“검법이란 그저⋯ 검을 잘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도구일 뿐이지. 네가 사용하고 싶을 때 사용하고 싶은 걸 택일하면 돼. 밥을 먹을 때 숟가락을 사용할지, 포크를 사용할지 정하는 것처럼.”

“⋯제 식탁에 아직 나이프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 커틀릿 포크와 디저트 스푼도 없는 것 같고.”

내가 그의 비유를 받아친 방법이 마음에 들었는지, 마엘로 샌슨은 서글서글하게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음에 언제 시간 한번 맞춰 보자. 지금은 다른 친구들도 함께하는 수업 시간이니까, 네게만 시간을 쓸 수는 없다, 에른하르트. 그건 알지?”

“물론입니다! 저, 저 금요일⋯ 금요일 오후가 통째로 비어있습니다.”

“엄청나게 적극적인 데이트 신청, 잘 받았다. 금요일에 점심 식사를 하고 나서 연무장으로 와.”

“예!!”

마엘로 샌슨이 다시 학생들 곁으로 돌아가고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또다시 생각에 잠겼다.

숨을 쉬는 것은 내공심법을 이야기하는 것이겠지. 창궁대연신공도 검법과 마찬가지로 남궁의 피에 대대로 이어오는 신공절학(*위력과 세가 고절한 무공)이었기에 그 짝이 서로 잘 맞는 건 마땅한 이치였는데, 마음이 급하여 놓칠 뻔하였다.

나는 천천히 걸어 등나무에서 조금 떨어져 제대로 공터에 선 뒤 차근차근 무학을 살피는 기분으로 남궁의 것들을 사용하였다.

창궁대연신공의 구절에 따라 호흡하였다. 매번 검법을 위주로 사용하였으나, 검을 놓고 손을 뻗는다면 당연히 천뢰삼장과 구벽신권이 먼저 나왔다. 천풍의 방향으로 걸었고, 천뢰의 기운으로 짚었다.

남궁의 무공은 제왕의 무공이고, 남궁의 무공이 하늘의 뜻을 담아 펼쳐지는 것이니 지금의 내가 남궁의 사람처럼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숨을 느리게 잡으니 휘두르는 손과 딛는 걸음 모두가 느릿하였다. 강맹한 기세가 실리지 않아도 가장 곧은 길을 내어 그 뒤를 따랐다. 푸른 하늘에 길게 그어진 흰 것의 자취를 쫓으려 하였다.

흰 구름이었다가, 하얀 배추 나비였다가, 고아한 백학이었다가 하는 그 흰 것이 내 가슴 속 심어진 도를 더욱더 푸르게 하였다.

더 넓은 곳으로 밀어내고자 뻗은 손이 하늘을 담았다. 앞으로 낸 오른손에 푸릇한 기운이 서렸다. 단전에서 꽃처럼 피어난 내기가 팔다리를 휘감다 못해 손바닥 소부혈로 뻗쳤다. 발경(*체내의 기운을 외부로 내어 상대를 타격하는 무술)에 대한 공부가 얕았기에 중원에서는 사용하지 않던 수법이었다.

흩어지는 기운을 애써 끌어모으려 하는 대신에 그대로 흘려내고 다음 보를 걷는다. 앞으로 한 걸음을 걸으며 시선을 안에 두었다.

앞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몸속을 보아야만 했다. 내공이 흐르는 길을 관조하였다. 하단전에서 일어난 기운이 손짓 하나, 발짓 하나에 호응하여 일렁이는 것을 알았다. 기운을 이끄는 대신에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 풀어두었다.

본디 넓은 하늘을 닮아 화창하고 고요한 기운은 사납게 굴지 않았다. 그 기운을 따라 나 또한 점차 너른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이쪽을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끌어올렸던 기세를 가라앉혔다. 뻗은 손으로 내었던 기운을 다시 움켜쥐었다. 사아⋯ 뱀처럼 요망하고 은근한 소리가 주변을 맴돌다 흩어졌다. 나는 그 푸릇한 기운의 이름을 알았다.

“⋯천뢰제왕신공⋯.”

가주 직계만이 일인전승으로 이어받는, 창궁대연신공보다 한 수 위의 심공, 아니, 신공이다. 완전히 같지는 않을 터였으나 확실히 닮았다. 실감이 안 나 양손을 꽉 쥐었다 펴기를 두어 차례 반복하다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당연하다는 듯 이쪽을 살피어주던 마엘로 샌슨이 잘했다, 칭찬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다시금 벙긋 웃음이 새어 나왔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