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운기의 기본은 토납으로부터 시작된다. 오래된 기운을 뱉고 좋은 기운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호흡이고, 섭식이며, 가끔은 독서이기도 했다. 제 몸 안에 깊게 침잠하여 그동안 받아들인 것과 내보낸 것들에 대하여 관조하는 시간을 오래 가졌다.
남궁정연은 저 스스로를 미카엘 에른하르트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루가, 한 달이, 일 년이, 그렇게 십 년이 지난 뒤로도 늘 같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죽음에 대한 기억은 그리 선명하지 않았다. 정마대전이 발발한 지 두 해는 지나고 세 번째 해는 맞이하지 못한 어느 날인 것은 알았다.
모래 섞인 보리쌀로 으깨어 만든 주먹밥을 뭉쳐 입에 넣을 때, 우물물에 독이 풀어져 있는지를 검사하기 위하여 들쥐를 잡아 물을 먹일 때, 칠 주야를 꼬박 밤새우고서도 이 각(*30분)이 지나기도 전에 소스라치게 일어나 성마른 뺨을 쓸어내릴 때, 그 모든 순간 동안 정연은 제가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를 분간하려 애썼다.
대부분의 경우 살아있는 것 같기도 했으나,
또 어떠한 때에는 죽어있는 것만 같다는 생각도 했다.
무림인은 강하다. 그들은 칼을 쓰는 법을 익히는 치들이었다. 사람을 도살하는 법에는 그렇게 통달할 수가 없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민초는 그저 팔뚝 굵은 흑도에게도 당하여 피를 흘렸다.
삼류무인은 그런 흑도 무리를 으깨어 죽일 수 있었다. 이류무인은 삼류무인 열을 손쉽게 죽였다. 일류무인이 또 그러한 이류무인 백을 단숨에 죽였다.
그 아무리 강한 자가 나와도 더 강한 자가 고개를 내미는 세상이었다. 강호가 넓다는 것에 감사하며 호연지기를 품었던 호시절은 오래전에 지났다.
열 살의 정연이 흑도 무리에 주먹질할 적에 받은 박수와 마흔둘의 정연이 마도 무리의 목을 섬광처럼 베어내며 받은 박수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것이 의협이라 배웠다.
그러나 제가 벤 것도 결국은 사람이다. 제가 애써 구해 마을로 돌려보낸 민초가 처자를 잃고 산적으로 떠도는 것을 보았다. 악을 물리치지 않으면 죽임당하는 시절, 정연은 산적이 된 그자의 양팔을 잘랐다. 그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것은 의인가? 협인가?
오래도록 긴 심마였다.
새로 태어나기 전에도 악몽을 잦게 꾸었다.
꿈속에서 남궁정연은 버러지가 되기도 했고, 나비가 되기도 했다. 저 높은 청산 위에서 아래를 굽어보는 학이 되었다가, 어느 마을에서 동냥 그릇을 앞에 두고 울음 터트리는 거지가 되기도 했다. 그즈음, 제가 해야 할 일은 저보다 남이 더 잘 알았다.
오대세가는 혈족으로 이어진 문파였다. 남궁세가에서는 외척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남궁의 이름을 달고 있었다. 남궁정연은 저와 같은 항렬의 이들과 함께 돌림자로 연(演) 자를 받았다.
멀리 흐를 연이다. 통할 연이다. 어느 곳을 가더라도 서로 이은 연을 끊어내지 말자 지은 이름이었다. 정마대전의 발발과 동시에 절정은 못 이뤄도 일류는 이루었던 많은 연들 중 절반이 죽었다.
숙부님, 숙부님 부르는 어린 것들을 제 뒤에 끌었다.
사실은 이들을 지키고 싶었다. 죽는 길로 끌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제 나이 반 토막을 겨우 넘는 것들은 사촌 형의 자식들이고 사촌 동생의 자식들이었으며 제가 직접 키운 제자였다. 제 자식과도 같은 놈들이었다.
그 아까운 놈들을 이끌고 다시 전장에 나섰다. 가주의 명이었다. 넓은 하늘과 그보다 더 넓은 창공을, 창천무애검을 제게 건네준 선조의 뜻이었다. 어길 수가 없었기에, 또 와르르 죽어 나갔다.
동으로 가라, 하면 동으로 갔다.
서로 가라, 하면 서로 갔다.
죽어라, 하여 죽었다.
그리하여 죽었다가 꿈처럼 다시 깨어났더니 제 조카보다도 어린 색목인 둘이 제 아비라 하였고, 어미라 하였다. 평생을 살기 위해 살았기에 죽는 법을 몰랐다.
찬찬히 들어 보니 아비라는 작자는 어린 나이에 갑자기 생긴 부인과 자식을 어찌 대하면 좋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소심한 놈이었고, 어미라는 자는 귀하게 자라 처음 받는 냉대에 마음 앓이 하느라 사는 맛을 잃어버린 딱한 것이라.
달아나려는 것을 붙여 두니 서로 잘살게 되었다.
보기 좋으면서도 마음이 허했다. 제 조카 놈들도 자식을 다섯씩은 낳아 알콩달콩 기대어 살 수 있었을 터인데, 그 생때같은 목숨이 허하게 날아간 것이 그토록 억울하고 분해서 가슴에 앙금으로 남았다.
다 늙었으니 손주 돌본다 생각하여 가정을 보살피다 보니 무섬증이 도로 돋았다. 이 아이들도 전부 놓치면 이제 어쩌나 싶었다.
기실, 공부랄 것도 없이 그저 코앞의 일만 보고 검이나 휘두르며 살던 남궁정연이었다. 무림맹 말석에 이름자 올리고도 자주 들여다보지 않았으니 정마대전이 일어날 것이오 우렁찬 목소리의 선포가 있기 전에는 그 무엇을 알았겠는가.
알았다면 그리 안일했을 리 없는 것을.
다시 잃고 싶지 않아 검을 들었다. 또다시 순하고 여린 것들을 모조리 잃을 수는 없으니 제 손으로 지키겠다 마음먹었다.
제가 알고 있는 가장 높은 경지가 화경이다. 화경이 되고 싶었다. 그래야만 내가 죽지 않고 살겠다 싶었다. 덜 자란 몸이 비명을 질러대는 것을 알면서도 달리고 검을 그었다. 알 것을 알아보겠다 세상에 나왔다.
그러나, 이 세상도 너무 넓다.
저는 무식한 무인이었다. 시조 몇 가닥 품에 안고 흥취가 나면 흥얼거리는 것이 배운 예악의 전부였다. 공자와 맹자가 한 말은 겨우 두어 구절만 기억에 남을 뿐이다. 꾸준히 배우고 익히고 단련한 것은 검뿐이다. 살인뿐이다. 그러나 누구를 죽여 누구를 살리겠는가.
무당제일검은 천마를 이겨낼 수 있겠는가.
그 괴이한 놈을 죽여 없앨 수 있기는 한 것인가.
그처럼 되면, 제 앞의 적을 모조리 쓸어 처죽이는 동안 제 뒤가 안전할 것인가.
제 손에 담긴 겨우 여덟 장의 종이가 세상의 한 토막을 담았다. 그것을 읽고 또 읽는 동안에 남궁정연은 다시 길을 잃고 말았다.
이제는 제 아비가 손자 같고, 어미가 손녀 같고, 동생들은 증손주요, 가문의 기사들은 제자 같았다. 다시 태어나 만난 서역인 수백의 얼굴을 익히고, 또 그 이름자들을 하나하나 외우면서 남궁정연은 제 속에 끓어오르는 울화를 느꼈다. 저를 떠난 적이 없는 심마였다.
침대 옆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소년, 노인, 아니, 소년의 구슬처럼 시퍼런 눈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꽉 쥔 주먹 위를 적셨다.
설익은 주먹이다. 아직 앳된 몸에는 어디 큰 구석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전생의 남궁정연은 거한이었다. 영약 한 톨 없이 육 척 장신으로 자랐고, 꾸준한 노력으로만 이 갑자의 내공을 쌓았다.
재능 있는 아이들을 산에서 들에서 주워 빚어낸 후기지수가 아니라, 저 날 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그저 허허 사람 좋게 웃을 줄이나 아는 인심 좋은 아비와 싹싹하고 순박하기만 한 어미 밑에서 불쑥 태어났기에 그랬다.
남궁의 창포를 걸친 지 한세월이 지났던 아비는 씩씩하고 튼실한 아들을 좀 더 잘 살게 하겠다고 친척 집에 맡기고 주에 사흘은 찾아와 들여다보았다.
그때, 사람을 두드려 패는 것이 난데없이 두려워 아비 품에 안겨들던 때, 딱 이만한 체구였던 것을 기억한다. 눈물을 닦아주며 그놈이 나쁜 놈이니 네 잘못은 하나도 없다고 역성을 들어주던 아비의 체향도 선연히 떠올랐다.
오래전 귀천하신 분을 붙잡고 묻고 싶었다. 아직도 제 잘못이 없냐고, 그 품에 파고들고 싶어⋯.
그때,
벌컥 문이 열렸다.
제가 상대의 기척을 읽지도 못한 것에 놀라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아직 완연한 절정에 이르지 못했더라도 일류의 경지다. 기척을 숨길 생각도 없이 휘적휘적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치를 못 알아챌 만큼 정신이 빠져 있었나 싶어 등골이 스산했다.
그러자, 제 이름자 닮아 장미꽃마냥 붉은 머리칼을 부스스 훑어 낸 소년이 에휴, 한숨을 쉬며 남궁정연의 옆자리에, 아니, 나 미카엘 에른하르트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렇게나 뻗어진 손이 고슬고슬한 분홍빛 머리칼을 헤집었다. 동생이 여럿 있어 익숙한 행동은, 또 아무렇지 않게 부친 같기도 하고, 사숙 같기도 하고, 사부 같기도 하다.
“너도 세상에 네가 잘 할 수 있는 것만 있는 게 아니란 건 알아야 해.”
툭 내어 뱉는 목소리에 앳된 티가 흠씬 묻어났다. 어안이 벙벙하여 대꾸할 말을 잃었다.
제 앞에 뚝 떨어진 말이 무엇인지 몰라 눈을 깜박일 적마다, 어룽어룽 짠 물이 고운 뺨을 타고 흘렀다. 턱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쉐이든은 다시 한번 에휴, 큰 소리를 내어 한숨을 쉬었다.
“그깟 이름 좀 못 외우면 어때. 세상 살면서 아그리젠트 교수 같은 사람 볼 일 거의 없어. 너 원래 사람 이름 못 외우는 거, 나 말고도 아는 애들은 다 알아. 네가 맨날 데미안 부르기 전에 단비, 하고 발음하는 거 너 여덟 살 때부터 다 알았어. 그 새끼 별명 단비인 거 아냐?”
“⋯.”
“숙제 힘들고 못 하겠으면 그냥 백지 내. 너 2년이나 일찍 들어왔잖아. 남들보다 2년 빨리 들어와서, 2년 늦게 나갈 수도 있지. 내가 후계자 교육 들으면서 알았는데, 에른하르트 백작가, 완전 알짜야. 너 그냥 숨만 쉬고 살아도 나보다 더 부자야, 인마.”
“⋯히끅.”
머리를 쓸어내리고 헤집는 손이, 간혹 어깨를 주무르고 등을 팡팡 두드리는 손이 어떤 의미인지 빤히 알았다.
조금 전, 제 눈앞에서 생때같은 일가 친족을 잃고 수십 아니, 수백 수천이 죽어 나가는 전쟁터 한가운데에 엎드려 내장을 쏟아내며 애간장 끓는 소리를 흘리던 노인은 어려운 시험이 보기 싫어 밥도 안 먹고 제 방에 콕 틀어박혀 찔찔 우는 꼬마가 되었다.
제가 훌쩍 어른인 줄 알고, 나이 오십 넘은 꼬마의 젖은 뺨을 닦아 준 열다섯 소년이 뒤이어 투덜거렸다.
“근데, 원래 머리 쓰는 놈이랑 몸 쓰는 놈은 따로 있어. 너 마법사 친구 사귀고 싶다며. 걔네들이 머리 하나는 팽팽 잘 돌아가니까 옆에 박아두고 이름 외우고, 주문 외우라고 해. 넌 눈 번쩍거리면서 검 휘두르는 게 멋있으니까, 데미안을 계속 단비라고 불러도 괜찮을걸? 그 새끼도 사실 속으로는 좋아한다던데. 아, 그런데 너 데미안 기억은 하냐⋯?”
“⋯.”
“⋯으응. 모를 것 같았어. 나중에 소개해 줄게. 걔 경영부에 들어가 있다더라. 어쨌든, 그러니까 세수하고 가서 밥 먹자. 혼자 자는 게 무서운 건 아니지?”
“⋯.”
“아이고, 뭘 또 울어. 그냥 여기서 울고 있든가. 내가 샌드위치라도 가져올게. 그거 먹고, 내일 또 아침부터 뛰어야지. 너 저번에 뭐냐⋯ 검법 뭐 바꾸려다가 안 돼서 입 댓 발 나왔었잖아. 샌슨 교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다시 알려달라고 해. 알겠어?”
꼭 쥐어 조금 으깨어진 샌드위치에서는 별맛이 나지 않았다. 모래 섞인 보리밥마냥 꺼끌꺼끌하게 입 안을 헛돌았다. 꼭꼭 씹어 꿀꺽 삼키고 나니, 그제야 배가 주려 꼬르륵 소리가 나는 것이 우스웠다.
잘 생각해 보니 전생의 그때에도 그랬다. 나 죽기 전의 어느 전쟁터에서 조카 놈들에게 양보하느라 주린 것을 참고 참다가 겨우 받은 주먹밥의 맛이 도로 생각이 났다. 한 입 씹어 삼키고 나서야 꼬르륵 배가 울어 허겁지겁 모래 섞인 보리쌀을 씹어 삼켰던 서글픈 기억에 또다시 목이 메었다.
손주가 하나 더 늘어난 기분으로, 나는 힘차게 샌드위치를 씹어 삼켰다. 다음날에도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 연무장을 달리고 운기행공을 할 요량이었다.
일단 화경부터 되고 나서 생각이란 것을 하기로 내심 다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