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브리아나 카사블랑카 교수의 교양 세계사는 쉐이든 로제와 함께 들었다.
백이십의 1학년이 모두 함께 듣는 수업이었다. 가장 앞도, 가장 뒤도, 중간도 아닌 어중간한 왼편 창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쉐이든은 암기 과목은 본디 이래야 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이렇게 여럿이서 한 교실에 앉아 무언가를 교습한 것은 공자와 맹자, 소학과 대학을 읊던 그 시절 이후로는 없었던 탓에 쉬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칠판에 판서하기 위해서 교수가 몸을 몇 차례 돌리는 순간 깨달았다. 이 자리는 시야의 사각이었다.
이제 불혹을 갓 넘긴 것처럼 보이는 카사블랑카 교수는 미인이었다. 손에서부터 팔꿈치까지 움직이는 선은 분명 치열한 훈련으로 빚어낸 것이었다. 검술이나 체술이 아니라, 예(禮)를 닦은 것이 선연히 보였다.
그녀는 단단한 말투로, 그러나 그 끝마디가 강하지 않게 고대 왕조와 시어런 제국의 탄생에 대한 것을 판서하며 해설했다. 그중 일부는 저도 아는 것이었다.
“이곳 시어런 제국에는 특히나 많은 무신론자들이 활동하고 있지만, 신의 실존 여부와 관계없이 신을 믿는 사람들은 존재했어요. 서쪽 끝 새틴 사막에서 북쪽의 유일 산맥에 이르는 길을 포함하여, 율란, 비반, 오웬, 플로이드, 필릭스의 다섯 왕조와 시어런 제국의 너른 토양에 이르기까지 모든 대륙에서 아홉 신의 공통된 흔적이 발견되고 있죠.”
카사블랑카 교수가 모두 교과서의 같은 페이지를 펼칠 것을 주문하고 말을 이었다.
“아홉 신 창세신화에 관한 이야기예요. 모두 함께 네 번째 페이지의 두 번째 줄부터 그 아래로 쭉 읽어볼까요?”
“첫날에는 바다가, 두 번째 날에는 대지가, 세 번째 날에는 태양과 달이 각각 생겨났고, 네 번째 날에는 그 모든 것을 조형하여 샘과 강과 풀꽃과 새와 짐승이 태어났다. 다섯 번째 날에는 인간을 빚었는데, 그 인간을 본 신들 중 셋이 그만 동시에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내가 어린아이일 적 동화책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익숙한 삽화가 섬세하게 그려진 위를 손으로 쓸어 문질러 보았다.
“세 신이 인간을 갖기 위하여 싸우는 동안 대지는 황폐해지고, 인간은 목숨을 잃었으며, 싸움을 말리던 여섯 신은 지쳐 잠이 들었다. 두 신을 죽여 이기는 데에 성공한 신은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여섯 번째 날에 죽은 인간을 되살렸으나 이미 그가 사랑한 인간이 아니었다. 신은 다섯 번을 더 시도하고 영원히 처음으로 이어지는 깊은 잠을 스스로 청했으니 그것이 바로 일곱째 날이었다.”
낭랑하게 책을 따라 읽는 목소리들은 아직 변성기가 지나지 않아 앳되었다.
옛 땅의 황제도 신의 아들을 자처하였으나, 무지렁이들은 무당을 믿고 글줄 외는 이들은 부처와 도사를 믿었다. 싸우고, 죽고, 이기는 것은 신이라기보다는 사람과 수라의 길이었다. 이 땅의 황제가 신의 아들임을 자칭하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리하여 여섯째 날에 태어난 인간들이 번성하여 스스로를 신의 자손이라 부르고, 이름을 잃은 신을 대신하여 왕을 자처하였으니 번성은 신의 발자국이라.”
“고마워요, 여러분. 이렇게 여섯 왕조는 동그랗게 모여 자신의 힘이 허락하는 땅에 왕조를 세우고 그 여력을 떨치기 시작했어요. 15페이지부터 20페이지까지, 다섯 왕조의 왕실 계보와 21페이지부터 24페이지까지의 시어런 황실 계보는 중간고사에서 빈칸을 채우는 형식으로 시험을 볼 생각이니 전부 외워두는 게 좋아요.”
“네에.”
“각 왕조에 혼인 동맹이 이루어지는 시기마다 새로운 조약과 규약이 탄생했기 때문에 왕실 가계도가 그대로 세계의 역사예요. 제국과 다섯 왕국은 서로의 융성한 문화를 부딪치며 집어삼키고 설득하고 달래어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라는 걸 반드시 알아두어야 해요. 자, 그럼 곧바로 25페이지 넘어갈게요.”
그 뒤로는 최초의 조약, 법규, 사상과 문학 등등⋯. 그런 것들의 이야기였다. 시험을 보겠다고 이야기한 곳의 페이지를 접어두고 얌전히 강의를 들었으되 옆 사람 이름도 외우기 어려운 판에 생판 모르는 남들의 이름을 헤아려 외우거나 익히는 일이 쉬울 리 없었다.
펜을 끄적이며 옆 사람을 따라 판서 흉내를 내다가 어느 시점부터는 이야기책을 듣듯 한 귀로 흘리며 그 흐름만을 대강 훑었다. 대련에는 익숙했지만, 판서 시험은 시작도 전에 괴로웠다.
* * *
제국의 계보를 가르치는 칼립스 아그리젠트는 카사블랑카보다 더한 인물이었다. 그는 앞으로 한 학기의 수업을 이 교실에서 진행할 것이라 말했다. 그는 그 말을 끝내자마자 뒤돌아서서 한 벽을 가득 메운 칠판에 이름자를 빽빽하게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아주 성마르고 깐깐하게 생긴 남성이 나무 꼬챙이 같은 팔을 휘적거릴 적마다 새겨진 듯 바른 글자가 남았다. 왼쪽 위부터 오른쪽 아래까지, 책 한 번 참고하지 않고 이어진 문장 모두가 누군가의 이름자였다.
“시어런 제국의 귀족작위는 계승 작위가 팔백, 단승 작위는 무려 이천에 이릅니다. 그러나 작위는 단 한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죠. 백작위가 있다면 백작 부인이 있을 것이고, 소백작이 있을 것이고, 소백작 부인이 있고, 또 후계가 있을 것이고⋯.”
칼립스 아그리젠트가 읊조리듯 말을 이으며 자신이 적은 이름자에 밑줄을 그었다.
“이러한 작위와 칭호들은 한 사람의 몸에 합쳐졌다가 핏줄을 따라 나뉘기도 하고 사정에 따라 돈에 팔려나가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에 부정이 없도록 감사하고 감시하고, 처벌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제국 귀족 연감 편집감사팀이 맡는 업무입니다.”
딱, 소리를 내며 칠판 정 가운데에 백묵 자국이 찍혔다. 정신이 혼미했다.
“이 모든 것을 외울 수는 없습니다. 외울 필요도 없어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약, 결혼, 탄생은 지속되고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 제 앞에 있는 여러분은 앞으로 수많은 이권과 관계가 얽혀든 사이로 뛰어들어야 합니다.”
남자는 자신이 적은 이름자들 사이에 몇 개의 줄을 그었다. 줄 위에 짧은 단어를 덧붙였다. 혼인, 동맹, 입양, 승계⋯.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여러분 또한 성적에 따라 적절한 단승 작위를 받을 것이고, 그중 일부는 계승 작위를 가진 이들과 혼인할 것입니다. 지금 배운 이 지식은 바로 그때가 되어서야 빛을 볼 수 있습니다.”
칼립스 아그리젠트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딱딱하고, 단호했다. 목소리 끝이 약하게 갈라졌다. 마치 하루 종일 소리만 질러댄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부서진 백묵 끝자락으로 칠판 정 가운데를 툭, 툭 두드리던 남자는 곧 다시 몸을 돌려 자신이 적은 이름자 중에 수십 개에 이르는 이름자 위에 동그라미, 세모, 네모를 그렸다. 그리고 또 별표 수십 개를 그렸다.
“현재 이 자리에 있는 분들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이름 위에는 별표를 새겼습니다. 친척, 후견인, 양자결연의 가능성이 있는 분들입니다. 같은 시기에 졸업하는 아카데미 동기인 만큼 서로는 서로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외우세요. 동그라미가 그려진 이름들은 알아두면 좋은, 가까워져야 할 인물입니다. 마찬가지로 외우세요. 세모와 네모 이름자는 좀 더 상세한 설명이 필요한 분들이고, 혈연 및 계약 관계가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다음 시간에 여러 날에 걸쳐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교실은 적막했다. 아무도 소리 내지 않았다.
불평을 쏟아낼 만도 하지만, 이 수천수만의 이름자와 살아 온 내역, 사는 위치, 교류 현황을 제 머릿속에 모조리 담고 있다는 남자에 대한 두려움 따위가 입을 틀어막은 차였다.
여기 앉은 어린 소년 소녀들의 얼굴과 이름도 삼 년 뒤의 단승 작위 목록에 이름을 올릴 것을 모두가 알았다.
아그리젠트는 앞줄에 앉은 학생 넷을 불러 일으켜 세워, 자신이 가지고 온 유인물을 나눠주었다. 별표가 새겨진 이름을 가진 자들의 약력이 겨우 몇 글자의 낱말이 되어 새겨져 있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혹은 모르고 있는 인물들에 대한 정보가 대뜸 주어진 것에 제 이름자가 별표와 함께 적힌 학생들도, 그 주변의 다른 아이들도 입을 열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시어런 제국의 아카데미에 들어온다는 것은 상위 15% 계급에 속할 자격이 있다는 거예요.”
“⋯.”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닥칠 위협, 가지고 올 수 있는 이득, 나아가야 할 방향. 저는 이 수업에서 여러분들이 가문의 이름을 달고 계보를 이어 나가는 데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정보를 처리하는 법을 가르칠 예정입니다.”
시종일관 목소리를 높이던 사내가 삐익 소리를 내는 단출한 의자 하나를 끌어다가 칠판의 오른쪽 모서리 끝 부근에 앉았다.
그의 손에는 장정이 되지 않은 서류 묶음 하나가 들려있었다. 그는 어깨를 바로 세운 채 고개만 숙여 종이 뭉치를 들여다보았다.
뼈마디가 도드라질 정도로 얇은 교수의 목이 예민한 인상을 더했다.
“뭐 해요? 읽어요. 외워야죠. 옆 사람과 서로 이름 맞추기 놀이 따위를 해도 좋고, 편하게 아는 내용을 주고받는 수다를 떨어도 좋습니다. 지금부터 수업이 끝나는 시간까지는 여러분들이 제게 빌려 간 시간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을 산 게 아니라, 여러분이 저를 산 거예요. 필요한 일이 있으면 사용하고 돌려놓으시면 됩니다.”
“⋯네에⋯.”
“다음 주에 오늘 알려 준 내용과 유인물에 대한 쪽지 시험을 보겠습니다. 앞으로도 매주, 일정한 양의 유인물을 주고 끝마치기 십 분 전에 다섯 문항의 쪽지 시험을 볼 겁니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과제는 따로 없습니다. 공부하세요.”
검은커녕 나뭇가지도 한 번 휘둘러 본 적 없을 것 같은 남자의 눈빛이 오싹하게 느껴졌다. 정보를 다루는 방식이 개방(*거지를 필두로 한 무림 정보조직), 하오문(*점소이와 기생을 필두로 한 무림 정보조직)이라기보다는 동창(*환관을 필두로 한 초법적 황실 정보기관)의 것에 가까웠다.
이미 벌어진 일을 해결하기 위해 좇는 것이 아니라, 주도적으로 일을 벌여 만인이 자신을 좇게 하는 것이다.
그제야 수런수런 몇몇이 머리를 모아 속닥이기 시작했다. 이거 진짜야? 혹은, 이 혼담은 안 될 거라고 했는데, 따위의 사실 확인을 위한 목소리거나, 아예 유인물의 첫 줄부터 무작정 외우려는 듯 중얼중얼 읊조리는 소리 따위의 소란이 교실을 가득 메웠다.
그저 이미 외운 귀족 연감표를 다시 한번 훑어보는 것일 거라 자신했던 쉐이든 로제도 나누어 받은 유인물을 심각한 표정으로 훑고 넘기고 살펴보았다.
저 아이나 나나 똑같은 백작가 장손인데, 이미 알고 있는 정보의 양과 파악하는 방법부터 달랐다. 지적받기 전까지는 몰랐던 세계였다.
단순히 무력 하나만을 손에 쥐고 있으면 다 이겨내고 평안할 것이라 자만했던가.
산에 처박혀 혼자의 수련과 수련을 거듭하여 깨달음과 명성을 얻었으나, 온갖 회의 때마다 뒷짐 지고 앉아 듣는 체도 하지 않다가 끝끝내 세상이 뒤흔들리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남궁세가의 일가족을 직계와 방계 할 것 없이 제 소맷자락 아래에 끌어넣고 분연히 떨쳐 일어선 전대 가주의 낯이 생각났다.
지금 그에게 오늘의 일을 말하고 싶었다. 무릎 꿇어 읍하여 이류, 삼류에 불과한 갓난 조카들을 피신시키는 것은 또 어떠한가 묻고 싶었다. 몸을 단련하는 것뿐만 아니라 머리로 아는 것 또한 힘이라고, 이미 저 위 높은 곳에서 지켜보고 이끄는 눈이 있을는지도 모르니 한 번만 더 조심해서 강을 건널 수 없냐고 애원하고 싶었다.
그렇게 검을 휘둘렀음에도 베인 흉터 하나 남지 않은 손등과 팔이 밀가루마냥 뽀얗게 희어 곱기만 했다.
제가 진정으로 막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새로 얻은 생 십여 년을 웃는 낯으로 살 수 있던 것은 지난 생에 남길 미련이 없어서였는지, 지난 생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 많아서였는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저 이 땅에서도 오십을 살고 나면 이전 생이 더 이상 후회스럽지 않기를 바랐다.
수련 시간을 줄여서라도 제대로 시험을 치를 것을 다짐했다. 배워야 할 것도, 배우고 싶은 것도 처음 상상했던 그 이상으로 많았다. 여전히 시어런의 이름자는 획수가 많고 혀가 꼬이지만, 더는 마냥 꺼림칙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만큼 제 이전 생에서 먼 곳까지 나왔다는 증표와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