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교수의 말대로 의료실로 가야 마땅했으나, 내상을 치유하는 것에는 스스로 혈도를 다스리는 편이 더 낫게 여겨졌다.
방으로 돌아와 입을 두어 차례 헹군 뒤 침상 아래 바닥에 앉았다.
물컹하고 부들거리는 매트리스는 운기조식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도톰하고 부드러운 융단이 깔려 있는 침실 바닥이 가부좌를 틀고 앉기에 좀 더 적당했다.
중단전부터 시작하여 양팔로 이르는 세맥을 차근히 관조하였다.
마법이란 것이 대단하기는 했다. 가느다란 세맥이야 자연스럽게 치유되도록 내버려 두었다 하여도, 머리카락 세 가닥을 합한 것보다 굵직한 기맥은 모조리 마나를 덧대어 치유해 둔 것이 보였다. 다친 기맥에 부목을 대고 붕대를 둘둘 감은 꼴이었다.
차근히 살펴보다 보니 더욱 신기하고 기이했다. 중원의 그 어떤 사술을 끌어온다 하여도, 주화입마에 걸린 기맥을 겨우 셋 세기 전에 이만큼 고쳐낼 순 없을 것이다.
경탄하는 것을 그만두고 일주천(*전신의 혈도를 내공으로 한 바퀴 도는 것)을 돌았다. 첫 번째 바퀴에는 대맥만을 따라 돌았다. 그 뒤에는 다친 뒤 급격하게 나아 부어오른 기맥을 차근차근 달래듯 두 바퀴를 돌았다.
부은 곳이 가라앉고, 꺾인 곳이 풀어지고, 조인 곳이 늘어났다. 길이 트이자 네 바퀴째에는 더 가느다란 세맥까지 보살필 수 있었고, 다섯 바퀴째에는 양팔의 저릿한 통증마저 가라앉았다.
그제야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마신 숨을 길게 내어놓았다. 아주 길고 얇게, 아까 보았던 <정화>의 길처럼⋯.
중간부터는 길이 기억나지 않아 손끝만 몇 번 까닥거리고 말았다.
제가 아니라 정말로 서툰 검술부 학생이었다면 치료를 받고서도 나흘은 요양해야 할 증세였다. 죽일 생각이 없었다 하더라도 험악하고 짓궂은 장난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에드윈이 무엇 때문에 저를 해치려 하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수업을 방해한 탓일까? 하지만 수정 구슬은 수업이 시작되기도 전에 제 손에 들어왔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어느 순간,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손해를 입었음이 빤히 보이는데도 그 아이도 저도, 서로를 죽일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퍽 요상하다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이전 세계에서는 얇은 암기 하나에 목숨 셋이 날아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중원에서 피 값이라는 말은 흔하고 가여운 것이라, 제 노리는 상대가 아니더라도 그 주변을 끊임없이 황폐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허나 지금 열여섯 먹은 소년 에드윈은 제게 나흘간 몸져누울 정도의 가느다란 상처만 입혔고, 저는 수천의 인간을 도살한 인간 백정인 주제에 녀석을 음지로 끌고 갈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고 그 까닭이나 궁금해하며 구결을 풀어내려 애쓰고 있었다.
그 생각을 하니 입가에 미소가 스몄다. 이것은 마치, 무인의 대련 같지 않은가!
중원에서도 그렇고, 이곳 시어런의 에른하르트 백작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련이란 서로의 한계를 첨예하게 다루면서도 상대에게 얼마나 경미한 피해를 주는지를 점수로 셈하는 대결이었다.
검기를 줄줄이 뽑아내면서도 기껏 한 칼질에 옷자락만 베어낸다든가, 귓불에 작은 상처를 낸다든가, 목덜미에 자그마한 멍만 들도록 만든다든가⋯ 그러한 순간에 느꼈던 짜릿한 쾌감을 상기했다.
그에 생각이 닿으니 에드윈 키아드리스가 얼마나 훌륭한 마법사인지에 대해 고심하게 되었다. 그 조그마한 수정 구슬 속에는 이미 마나가 몇 줄기 심어져 있었으나, 그것들은 죄다 소털마냥 얇은 철심에 의지하여 새겨진 것이었다.
허나 적금빛의 마나만은 달랐다. 그 어떤 도구에도 의지하지 않고 저 스스로 자리를 잡아 가장 짓궂은 자리를 차지하고 꿰어놓은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엄청난 경지가 아닐 수 없었다.
아까 바닥으로 번졌던 적금의 서클이 몇 바퀴였는지를 헤아리지 못한 것이 새삼 아쉬웠다. 오전 중에는 큰 깨달음을 얻고, 오후 중에는 작은 깨달음을 얻었으니 수업 첫날치고는 운이 트여도 제대로 트였다.
이후 마법 수업 시간까지는 한 주나 더 기다려야 했다. 이다음에 만나게 된다면 꼭 그 마나로 펼친 침술에 대하여 자세히 물어보리라. 마법과 검술의 대련을 원하는 것이라면 뒤로 달아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평온한 밤이 그렇게 지났다.
* * *
고급 검술 시간에는 쉐이든 로제가 걱정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시어런 제국의 귀한 황손들은 이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 얼굴과 기운을 읽어 그 둘이 입학식 때 교복을 입고 선 근로 장학생 중 두 명의 일류무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흥미가 일었다.
고귀한 핏줄을 타고나 ‘근로 장학’이라니.
곰곰 생각해 보면 이곳의 귀족들은 직접 돈을 버는 것을 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부친의 집무실에 놓여 있던 수십의 후원 서류들과 그의 세 곱절은 되는 사업과 임대에 대한 서류들을 떠올렸다.
황제의 아들이 제 몸을 사용하여 봉사하고, 귀족이 제 손으로 물자를 헤아려 셈하는 곳. 신분을 가리지 않고 나라를 이끌 이들을 모아 교육하고 또 교육하는 곳.
그런 곳이기에 시어런이 이토록 부국강병을 이룬 것일 터였다.
나는 말을 걸어볼까 저어하며 고민하다가, 저 스스로의 예법이 귀한 이를 대하기에는 모자란다는 것을 떠올리고 호기심을 눌러두었다. 그 대신에 클라우디안 영식, 벤자민의 옆에 붙었다.
녀석은 기초 검술과 고급 검술, 그리고 마나와 오러 수업을 나와 함께 듣는다. 쉐이든 만큼이나 곁에 붙어 있는 친구였다.
고급 검술 수업 시간은 대련과 대련, 그리고 끝도 없는 관람이었다.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새가 많지 않았다.
삼십의 학생 중 단 열 명이 이류무인이었고, 스물이 일류무인이었다. 나를 포함하여 두 황족이 대단치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들 중에는 졸업을 몇 해는 유예한 듯 나이 먹어 보이는 이들이 절반 넘게 섞여 있었으나, 그래도 이립은 안 되었을 터였다.
화경의 무인에게 끝도 없이 배울 수 있다면 졸업 따위가 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일류무인들끼리, 이류무인들끼리 필사의 대련을 했다. 서로를 향한 살초도 거리끼지 않았다. 지근거리에 있는 마엘로 샌슨은 가장 위험한 순간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칼날을 움켜쥐어 멈출 수 있었다.
부처님 손바닥 위에서 뛰어노는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다. 단단한 긴고아가 학생들의 두려움을 움켜 터트렸다.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칼을 휘두른 뒤 승패가 갈리면, 화경의 무인, 샌슨이 직접 어느 점이 좋았고 어느 점이 틀렸으며 어느 부분에서 생각이 깊어져야 하는지를 차근차근 알려 주었다.
그것은 직접 검을 맞댄 이에게도, 안력을 최대한 돋워 대련을 관음한 이에게도 훌륭한 교수법이었다. 제국에서도 골라 모은 인재들의 검법을 서로 나누어 익숙하게 했다.
거리를 두고 보는 검은 천년 묵은 거북보다 느리게 보이고, 코앞에서 보는 검은 독 오른 살모사처럼 잽싸게 보이는 법이다.
가깝고 먼 검의 거리를 인지하고, 몇 번이고 죽음의 위협에서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되돌아오기를 반복한 검사들은 살기에 익숙해졌다. 당장 목젖을 치고 들어오는 검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제 검로를 따라 검을 휘둘렀다.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교수법에 자꾸만 심박이 올랐다.
“⋯까지만 교정하면 되겠다. 둘 다 잘했다, 아주 재미있는 명승부였어.”
칭찬 한마디가 녹아내릴 만큼 달았다.
걸음마 한 번 하고 박수 받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이미 십여 년 전에 민망함에 몸서리치며 걸어온 길을 한 번 더 걸으면서도 자꾸만 웃게 됐다.
취한 듯 눈이 빛나고, 얼굴 근육이 허물어져 방긋거리는 것을 저 스스로도 이미 알고 있음에도 고칠 수가 없었다.
몸이 어려진 탓인가, 마음도 어려진 것인가. 취한 듯 술렁이고 있자니 저를 보는 시선들이 선명히 느껴졌다. 괜스레 열이 돋아 손부채질을 했다.
그저 손날을 세워 손을 파닥거리는 것이 아니라, 방패처럼 넓게 펼친 내공을 부채처럼 휘적이는 것이라 제법 바람이 일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 기운을 느낀 여럿이 허허, 헛 참, 헛기침과 웃음을 함께 와르르 쏟아냈다.
“우리 막내가 기분이 아주 좋은가 본데. 어때, 발터 오르겐. 열세 살짜리에게 진 기분이.”
“저게 보통 열세 살이에요? 아주 상쾌합니다, 그래.”
저와의 대련에서 진, 긴 머리를 길게 땋아 틀어 올려 뒤통수에 올려 얹은 낭창한 사내가 멋대로 손을 뻗어 나의 머리를 헤집어 헝클어뜨렸다. 고개가 꾹꾹 눌려도 그 손에 살심이 전혀 없어 뿌리치지 않았다.
이 땅에 맏이로 태어났던 데다가 어릴 적부터 따박따박 말대꾸하다 보니 이렇게 어린 취급을 받는 게 낯설었다. 휘두르는 대로 고개를 꺼덕이고 있자니 누르는 손에도 힘이 빠졌다.
제 부친보다도 다정히 머리를 쓸어 넘겨주는 손에 오금이 저렸다.
“하는 걸 보니까 쑥쑥 크는 이유를 알겠네요, 알겠어. 원래 어린애들이 집중력이 더 좋아요. 우리 집 막내는 그놈의 공주님 나오는 책을 팔십 번을 넘게 읽었다니까.”
“난 놈이야, 난 놈.”
모질이 얇고 풍성하여 땀에 젖은 손으로 몇 차례 헤집어지는 것만으로도, 보드랍게 붕 떠 있던 연분홍빛 머리칼이 착 가라앉았다.
동그마한 두상 위로 투덕이는 손이 몇 개가 또 더해지는 동안 겨우 이틀 만에 번뜩이는 나의 시선에 익숙해진 샌슨이 학생들을 불러 모아 한 번 더 다짐을 받았다.
“지금 하는 대련은 몸에 들어있는 기운이란 기운은 마나와 체력을 가리지 않고 쪽쪽 빼가면서 벌인 짓이지. 하지만 실전에서는 이렇게 하면 안 된다. 그 까닭은 무엇이지?”
“실전은 연습보다 세 배 가혹하기 때문입니다!”
“맞아. 그리고 승리의 마지막에는?”
“도주할 길을 열어야 합니다!”
“그렇다, 제국의 영웅들아. 가장 거대하고 두려운 마물을 잡고 나면 피곤한 몸과 부상당한 동료들을 이끌고 고블린 잡것들을 때려죽이며 안전한 곳으로 귀환하는 것까지가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예, 마스터!”
“가장 앞서 나가고, 가장 뒤에서 달아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력을 남겨둬야 해. 앞으로 한 달, 우리는 전력을 다해 싸우는 법을 연습하고, 그 뒤로는 여력을 남기는 것을 연습한다. 한 달이면 여기 있는 모두에게 다섯 번 이상의 대련이 돌아갈 터. 이마에 주름이 생기도록 기력을 짜내. 알겠나!”
“예, 마스터!”
여기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또다시 중원의 기억이 스며드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인간이 마물을 죽이는 것이 이토록 용감하고 신실한 행위일진대,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것은 그 끝의 끝까지 조롱과 자기 위안, 타협이 낭자한 꼴이 그 얼마나 절박하였는가.
죽여도 도로 일어서던 수천의 강시와 사람의 정기를 흡수하려 날뛰던 마귀들이 시야에 어려 그것을 털어내려 고개를 흔들었다.
자, 밥 먹자! 우르르 몰려 나가는 것을 따라갔다. 아직도 정수리가 간질거렸다.
이쪽이야, 미카엘. 저를 끌어가는 벤자민이 부르는 이름이 새삼 낯설었다. 나는 문득 무림맹과 천마신교의 마지막 전투가 누구의 승리로 끝났을지 궁금해졌다.
장담하건대 그 어느 쪽도 완전한 승자는 아닐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