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쉐이든 로제는 제가 어미 오리라도 되는 것처럼 굴었다.
토요일 아침, 새벽같이 일어나 운기조식을 하고 연무장을 달리고 돌아오니, 쉐이든 로제가 내 방문 앞에 서서 아침도 안 먹고 어딜 다녀오냐며 성을 냈다.
함께 식사를 하고 나서는 아카데미 서점에 들렀다. 나와 쉐이든에게 필요한 교재를 각각 구입했다. 지도와 길을 맞춰보며 아카데미 조경과 지리를 살피고 함께 점심을 먹었다.
저도 몸이 찌뿌둥하다 하여 오후에는 함께 연무장에서 간단히 몸을 풀고 녀석을 위한 지도 대련을 해 주었고, 각자의 방에서 씻고 나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한 뒤에야 그럼 각자 시간을 보내자며 방에 들어가게 했다.
어안이 벙벙해서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다시 태어난 뒤로 가족들과 떨어진 곳에서는 단 한 번도 잠들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지금 내 연치가 겨우 열셋이고 여기 기준으로는 사교계 데뷔도 못 할 만큼의 꼬마라는 것도 알아 버렸다.
그리고 쉐이든은 지난 몇 년간 내 사정을 풍문으로 들을 수 있을 정도는 가까운 이였다.
쉐이든 녀석은 내가 밥도 굶고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을까 봐 제 딴에 고민한 것이다!
이 어찌나 우습고 감사한 일인가. 혹시나 하여 한동안 머리를 싸맸으나 결론은 같았다.
열셋. 전생에는 시전(*시장. 상점 거리)에 나가 흑도 무리들에게 싸움을 걸어대던 나이였다. 비록 남궁가 문장이 수놓아진 도포 자락의 비호를 받았으되, 열 살을 넘기는 그 순간부터 나를 어린아이로 대해 주던 사람이 없던 삶이었다.
에른하르트 백작가 가족들이 어화둥둥 감싸고 도는 것이야 장손으로 태어난 덕이라 친다고 하더라도, 안면 좀 익힌 어린애에게 끼니마다 챙김 받는 것이 영 낯간지러운 일이라 자꾸만 웃음이 샜다.
그래서 일요일에는 연무장에 가서 달리는 것을 먼저 하고, 몸을 씻고 운기조식을 한 뒤 쉐이든이 문을 두드리기를 기다렸다.
부스스한 머리칼을 대강 빗은 채 졸린 눈으로 나온 녀석과 아침 식사를 하고, 아카데미 광장 분수 앞을 산책하고, 소화가 대강 될 즈음 해서 도서관에 찾아가 3년 전에 나온 신판 귀족 명부를 대여했다.
미리 예습을 좀 하다가 또 점심을 먹고, 연무장에 나가 지도 대련을 해 주고, 쉐이든에게 창천무애검법 제1장의 검식을 조금 알려 주었다. 이 땅에 남궁의 이름은 조금도 남지 않았으니, 친한 친구에게 이런 것쯤은 양보할 수 있겠다 싶은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주말이 지나고 나니 옆구리에 진짜 친구를 하나 끼워 둔 채라, 천군만마를 얻은 듯 마음이 든든했다.
수업이 시작되기는커녕 건물들에 불도 들어오지 않은 새벽 여섯 시. 연무장을 빙 둘러 달리는 동안 어쩐지 즐거워 어릴 적에, 전생에서도 지학이 되기 전에 익혀 배운 노랫가락을 뱉는 숨에 맞추어 흥얼거렸다.
* * *
초급 검술 수업에는 이전에 보았던 스물의 학생과 재수강을 한다는 윗급 학년의 셋이 함께 자리 잡았다. 마엘로 샌슨 교수는 학생들을 열 맞춰 세워두고 각기 스스로 익힌 검술을 펼쳐보라 일렀다.
반신반의하며 창천무애검의 초식을 전개해나가는데, 정확히 서른 초식을 전개하자 그만,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학생 각각의 자세를 손봐주기 시작했다.
“플란츠 가의 검식을 사용할 때는 왼발을 축으로 해서 돈다. 우측에서 좌로 검을 뻗는다고 하지만, 직선으로 내리긋는 것이 아니라 우상단에서 좌하단으로⋯ 그래, 바로 뻗는 것이 아니야. 여기서부터 이렇게⋯. 됐어, 손목을 비틀어. 여기까지. 해당 동작을 연습하도록.”
“잘 연마했군. 기초 검식에만 충실했던 모양이야. 하지만 하체, 특히 이 부분이 불안정해. 양다리를 좀 더 벌리고⋯ 맞아. 그 자세로 다시 한번 제5식부터 8식까지 전개한다. 뭐? 중간부터는 해 본 적이 없다니, 제군은 적군이 와도 동서남북 차례로 찌를 생각인가?”
“이건 뭐야. 춤추듯이 전개하는 검법이라고 해서 정말로 춤을 추면 안 돼. 대충 보니 세이렌 검형 같은데, 맞나? 파도를 닮은 검은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것을 중점으로 두어야지, 여기 시작점에서 흔들고만 있으면 안 돼. 내가 천천히 시범을 보일 테니 1식에서 3식으로 연결하는 도입부부터 다시 연습하도록.”
무려 스물셋의 학생이 동시에 전개한 모든 검식을 초식별로 눈에 담고 지적할 부분을 기억해 둔 것이었다. 대단한 안법이고, 대단한 기억이었다.
이것이 화경에 이르러 상단전(*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단전)이 깨인 탓인지, 아니면 그가 원래도 엄청난 교수학의 천재였던 것인지 알 길은 없었다.
내 차례가 오자 마엘로 샌슨은 잠시 머뭇거렸는데, 그것은 그의 안법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내 검법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탓이었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주변 아이들에게 알리지 않으려는 노력이 가상했다.
“미카엘 에른하르트. 네가 만든 검법인가? 전개 방식은 유연하지만, 검 끝에 살기가 너무 짙어. 이런 검은 짧은 시간 내에 만들어지지 않는 법인데⋯ 3식에서 4식으로 연결할 때 이 위치에서 한 번 꺾는 것, 상대의 목뼈 바로 앞에서 검을 빼내기 위한 검식이 맞아?”
“⋯원본은, 그렇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제국의 검술은 대 몬스터전을 상정하기 때문에 이 높이는 맞지 않아. 대인전을 상정한 검법인 것이 분명한데⋯. 에른하르트 가는 지난 삼 세대 동안 기사를 배출하지 않았던 걸로 알고 있거든, 내가.”
“예, 그렇습니다.”
“⋯이런 괴상한 버릇은 고치는 게 좋겠군. 마찬가지로 8식 중반과 17식 중후반부에도 이상한 버릇이 들어 있으니 단단히 손보도록.”
지적받은 학생들은 연무장의 한켠에 거리를 넓게 두고 서서 지적받은 부분들을 고치기 위해 애를 썼다.
지난 생애에 나는 서른 해 넘게 사람을 죽였다. 그 상대는 소문난 악적(*유교 윤리를 해치는 악독한 적)이기도 했고, 가문 내에 들어 온 암살자이기도 했으며, 떼 지어 몰려오는 마두(*배분이 높거나 나이가 많은 우두머리 격 악인)이기도 했다.
날 죽이려던 치들이다.
온갖 약하고 강한 것들이 내 검에 부딪혀 버릇으로 남았던 흔적을 이제야 깨닫는다.
나도 모르게 이 세상, 현생에까지 끌고 온 죄의 흔적들을 지워내기 위한 동작들은 호흡을 다섯 배로 가질 만큼 길고 느릿했다. 기억은 지워낼 수 없으나 버릇은 고칠 수 있다. 검에 스며있던 살심을 흩어냈다.
상대를 죽이기 위한 검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검. 남궁의 것이 아니라 소림의 것을 닮은 활검(*사람을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검식)을 목표로 했다.
눈앞에 보이는 가상의 적을 밀치고, 흘리고, 당긴다. 선명하지 않은 검로 사이의 활로만을 좇았다. 제 일식부터 서른 초식까지 전개하고, 다시 서른 번째에서 첫 번째까지 역순으로 되돌아온다. 식과 식 사이의 연결은 매끄럽지 않았으나, 그 틈새로 숨이 돌았다.
그렇게 두 순배를 더 돌고 나니 짜악, 손바닥 마주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자, 수업 끝났다. 다들 밥 먹으러 가자.”
어안이 벙벙하여 갈 길을 모르고 그 자리에 섰다.
중원에서는 깨달음에 빠진 것을 보면 사흘이고 열흘이고 무언가를 깨칠 때까지 그대로 두었는데, 겨우 점심 끼니를 챙기라고 나를 황홀경에서 빼낸 것인가 싶어 믿기지 않았다.
눈을 끔벅이며 서 있자니 어깨 위로 툭, 묵직한 손이 닿았다. 이 역시 샌슨이었다.
“검형이나 검법 자체는 좋아. 하루 이틀로 될 일이 아닌 것 같으니 좀 더 천천히 가자고.”
아. 그 순간 나는 한 번 더 깨달았다. 아직 세월은 내 편이고, 가야 할 길이 멀 때는 조급해서는 안 된다. 서두르다가는 괜히 넘어지고, 넘어지면 다칠 수 있다. 검이란 토라진 어린아이 같아서 제멋대로 끌어내려고 하면 엉뚱한 곳에서 길을 잃는 것이다.
실망해 굳은 표정을 풀어내려 애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갯짓만 주억거리는 것은 새로 얻은 스승에게 할 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 입도 열었다.
“예, 교수님. 천천히 멀리 보겠습니다.”
“그으, 래. 기합이 참 좋아. 점심 식사 맛있게 하고.”
꾸벅 인사하고 고개를 번쩍 들고 나니 나와 똑같이 멀거니 서 있는 벤자민 클라우디안의 머리꼭지가 보였다.
이미 장성한 사내의 태를 한 소년에게 샌슨이 어떤 조언을 더하는지가 궁금했으나, 클라우디안의 어깨를 다독이며 속삭이는 샌슨의 목소리는 내가 내공을 돋워도 듣지 못할 만큼 작았다.
나를 기다리고 선 쉐이든 로제와 나란히 걸어 기숙사 식당으로 향했다.
그러는 동안 난 쉐이든 로제의 가문이 삼 대 전에 대단한 기사의 이름으로 백작위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고, 로제 백작가의 백장미 기사단이 사실은 기사 양성소와 다를 바 없을 만큼 체계가 단단하다는 것도 들어 알게 되었다.
그들의 검식이 종남의 중검보다는 화산의 매화를 닮은 천변만화(*끝을 알 수 없도록 변화함)의 검이라는 것이 신기했다.
과연 만류귀종이라, 모든 검은 하나로 통하는가 하여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자니 쉐이든이 웃으며 제 속을 털어냈다.
“재작년 겨울까지는 내가 천재인 줄 알았어. 열셋에 소드 익스퍼트 초급이라니, 그 정도면 백장미 기사단에서도 제법 뽐낼만한 인재거든. 그런데 너 하는 거 보니까 그렇지만도 않더라고.”
“아니, 나는.”
“근데 오늘 보니까 역시 난 천재인 것 같아. 넌 그냥 차원이 다른 거고, 이 클래스 내에서는 나도 신분패 내밀 정도는 돼. 중급, 고급 검술까지 따라붙으면 그때엔 내가 널 따라잡을지도 모르지. 긴장하라고, 미카.”
쉐이든과 나는 키가 고만고만했다. 난 아직 오척단구(*약 150cm 남짓한 작은 키)의 열셋이고, 쉐이든도 아직 덜 자랐다. 내 어깨를 둘러 누르는 팔 또한 묵직함이 덜했다.
그는 천재가 맞다. 나는 전생에 열일곱에 이류무사가 되었으니, 그가 나보다 두 해는 더 빠르다. 나는 어쩐지 반칙한 손패를 들고 있는 기분이 되어 기분이 축 처졌다.
쉐이든은 굳이 위로를 더하지 않았고, 나 또한 그를 위로하지 않았다. 애초에 오늘이 첫 수업일진대 실망할 것도 없었다.
각 기숙사 일 층에 식당이 있는 덕분에, 깨끗하게 씻고 나서 바로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점은 정말 큰 장점이었다.
점심 메뉴는 풍성했다. 어린아이 얼굴만 한 너비의 소고기가 한 덩이 큼직하게 올라왔고, 푸성귀와 달게 조리한 콩과 으깬 감자가 또 한 움큼이었다.
조금 묽은 스튜와 치즈가 듬성듬성 박힌 흰 빵을 앞에 두고 있자니 절로 입이 크게 벌어져 와구와구 음식을 집어삼키게 되었다.
내 맹세코, 월요일 오후 수업으로 박아둔 <마법과 수식 원리 기초> 시간에 그런 일이 벌어질 것을 알았다면 이렇게 무식하게 음식을 섭취하지 않았을 테지만, 모든 일이 그러하듯 벌어지기 전에는 알 수 없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