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벤자민 클라우디안. 기억에 없는 이름이었다.
기껏해야 아카데미 1학년이니 이제 겨우 지학(*15세)일 나이임에도, 소년은 청년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할 만큼 잘 만든 몸을 가지고 있었다. 훤칠한 키는 거진 육 척(*180cm)에 가까웠고, 널찍한 어깨가 저 뻗어 나아갈 곳을 분명히 알고 있는 태가 흡족하였다.
까마귀마냥 윤기 도는 시꺼먼 머리터럭은 등목할 적에 편하겠다 싶을 만큼 짧게 손질되어 있었다. 범마냥 싯누런 눈깔만 아니었으면, 하북 팽가에서도 한 놈 이 땅으로 넘어온 줄 알았으리라.
“⋯예, 반갑습니다. 글로우⋯.”
“벤자민 클라우디안.”
“클라우디안 영식.”
내민 손을 맞잡아 흔들었다.
조금 전에 들은 이름의 발음이 낯설어 헤맸지만, 내가 그의 성씨를 한 번에 외워내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곧장 교정해 주어 살았다.
마주 잡은 손이 뜨끈뜨끈하고 단단했다. 철사장(*뜨겁게 데운 모래에 손을 찔러넣어 피부를 질기게 만드는 소림 무공)이라도 익힌 것인지, 잘 데워낸 돌을 손에 얹은 기분이었다.
손을 놓았다. 얼굴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정제되기 이전의 호기심과 열망, 호승심.
내가 이립이 되어서도 내내 숨기지 못하고 이전 생에 질질 끌고 다니던 눈빛이었다. 내 눈앞의 상대가 얼마나 강한지, 나와 견주어 비댈 만 한지, 이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는지를 견주는 것이다.
나는 단숨에 벤자민과 막역지우가 될 것임을 알았다. 싸우고 싶어 안달이 난 치들은 지치지 않고 상대해 줄 지기가 필요한 법이었다.
벤자민 클라우디안은 일류 무인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이미 잘 닦인 몸이 그가 오러를 휘두르는 걸 가능케 했으리라. 내가 그를 충분히 훑어볼 시간을 준 뒤 벤자민은 다시 손을 내밀었다.
“무엇을?”
“에른하르트 영식의 시간표를 참고하려 합니다. 앞으로 배울 것이 많아 보여서.”
군말을 더하지 않고 유인물 두 번째 장을 앞으로 내밀었다. 옆자리에서 끄응, 쉐이든이 앓는 소리를 삼키는 것은 들었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벤자민은 내 시간표를 보고 허, 혀를 차더니 도로 돌려주고는 자리를 떴다. 과연 수업 중 몇 개나 겹치려나 싶어 흥이 올랐다.
그 옆으로도 몇 정도가 기웃거리기는 하였으나 대화를 청하지는 않아 다음 기회로 미뤄두었다.
* * *
작성한 유인물을 부서 사무실에 제출하고 기숙사 건물을 찾아 들어왔다.
시어런 아카데미 기숙사 건물은 총 여섯 개 동이 있었다.
각각이 1, 2, 3학년의 남녀 기숙사로 귀족은 고층, 평민은 저층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라 하였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제 머리 위에 평민이 누워 자는 것을 보지 못하겠다는 그 심보가 우스웠다.
하긴, 신분이 단상의 높이가 되는 곳이 아닌가. 총 오 층짜리 건물의 아래 세 층은 평민이 사용하고, 위의 두 층은 귀족이 썼다. 인원비가 일대 삼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위층의 사람이 아래층 사람의 딱 두 배 공간을 사용한다는 뜻이다.
나는 공후작 가문이 아니었고 황실의 핏줄을 타고나지도 않아 사 층에 배정되었다.
애초에 이렇게 여러 층으로 되어있는 건물은 에른하르트 소백작저인 본가에서나 처음 겪어보았고, 그곳에서도 나는 부모님 아래 중간층을 사용하였으므로 어색할 것도 싫을 것도 좋을 것도 없었다.
내가 배정받은 방은 본가의 개인실처럼 침실, 응접실, 드레스룸, 서재, 욕실이 온전히 갖추어져 있었다. 그 너비가 넓지는 않았으되 혼자 지내기에 부족하지는 않았다.
솔직히 서재는 기대한 적도 없었는데, 가지고 온 검과 무복이 서재 벽에 온전히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고 조금 놀랐다.
챙긴 적도 없었던 교복 네 벌과 미리 챙겨 보내 둔 옷가지도 전부 깔끔하게 꺼내어져 정리되어 있었다.
미리 귀중품을 개인 소지하도록 안내한 것이 이 때문이었나 싶다가도, 아래층의 기숙사 방들이 궁금해졌다. 전생에 묵었던 그 어떤 여관도 이렇게 휘황찬란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죽기 사흘 전 불타 엎어진 서안의 홍경루 귀빈실은 이렇게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응접실 테이블 한가운데에 정갈하게 놓인 두툼한 가죽 장정의 수첩을 열었다.
앞 페이지에는 달력과 주의사항, 학사일정, 아카데미 내부 지도가 자리 잡았고, 중간에는 아무 모양도 없는 내지가 수첩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가장 뒤편의 두 장에는 아카데미 내 모든 교수들의 이름과 사무실 위치, 담당 과목이 적혀 있었다.
달력을 다시 보았다.
2월 첫째 날, 금요일이 오늘이다. 주말 동안 필요한 물품을 구비하고 휴식을 취하고 나면 월요일부터 첫 주 수업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일주일 동안 수강할 수업을 변경하는 것이 가능하고, 그 다음 주부터는 정해진 수업에 출석하지 않을 시 학점에 불이익을 받는다.
식사는 각 기숙사의 1층에 마련된 단체 식당에서 하루 세 번 배식한다.
쓰인 설명을 두 차례 읽고 나서 무복으로 갈아입었다. 연무장의 위치를 알았으니 달리면서 생각을 정리할 요량이었다.
막 방을 나서기 위해 검대에 검을 고정하는 찰나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문을 열었다.
쉐이든 로제였다.
붉은 여우를 닮은 소년은 제 방에 들어서는 것처럼 매끄럽게 응접실로 들어와 의자를 차지하고 앉았다. 잠시 상대할 줄을 몰라 그 자리에 멀거니 서 있었더니, 곧이어 당연하다는 양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시들시들한 목소리를 내어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마치 십여 년 전부터 친밀했던 것처럼 구는 모양새가 발칙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방 정리 다 했으면 좀 앉아 봐, 미카.”
“무슨 일인데? 이제 막 수련하러 갈 참이었다.”
“알아. 네가 하루에 네 시간 달리지 않으면 잠 못 자는 엉덩이에 뿔 난 망아지 같은 놈이라는 거. 그런데 내가 학사 일정이 시작되기 전에, 단둘이 있을 때 꼭 해줘야 할 말이 있거든.”
“단둘이?”
“그럼 이런 얘길 어디서 하려고? 생각해 봐, 미카엘 에른하르트. 넌 입학하기도 전부터 이미 유명 인사야.”
“음?”
“⋯왜 그러냐는 말은 하지 말아 줘, 제발. 넌 이제 고작 열세 살이면서 소드 익스퍼트 상급의 경지에 올랐고, 빌어먹을 정도로 예쁘게 생긴 주제에 눈에 띄는 핑크빛 머리칼을 몽실거리고 있잖아. 너는 사람 이름 외우는 걸 당나귀 코털만큼도 못하는데, 이번 신입생들은 너 빼고 다들 열다섯 살이고, 네 교양 수업에 채워 넣은 평민들을 위한 귀족 연감 외우기 과제를 다 마스터했을 거라고!”
나는 군말 없이 자리에 앉기로 했다. 묵묵히 바라보자 쉐이든은 양손으로 제 태양혈을 꾹꾹 눌렀다. 곱상한 미간을 찌푸리니 제법 사나워 보인다는 평을 속으로 삼키며 물었다.
“그래서?”
“네가 <고급 검술 기초>뿐만 아니라 <마법과 수식 원리 기초 수업>, <연금술과 함께하는 수렵과 야영>을 꼭 듣고 싶다는 건 이해했어. 그래서 해당 수업을 신청한 학우들에 대해서 조사를 좀 해 왔거든.”
“왜?”
“뭐가 왜야?”
“왜 날 위해 그렇게까지 하지?”
쉐이든 로제는 정말 이상한 것, 예를 들어 보라색 공작 깃털을 단 코끼리의 부채춤을 보는 것 같은 표정을 하고 내 수첩을 펼쳐, 두 번째 장에 몇 가지 이름을 적으며 한 음절 한 음절을 새기듯 대꾸했다.
맨 처음 이 땅에서 부친과 모친을 처음 접했을 때 들었던 그대로 부드럽고 유순한 음절의 언어는 마치 노래처럼 들렸다.
“그야 당연히, 네가 내 친구니까 그렇지, 미카.”
나는 더 이상 말을 덧댈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수긍했다. 나이 어린 아해들의 우정은 이것저것 따지며 이득과 손해를 잴 필요가 없었던 것을 이제야 기억해 낸 탓이다.
다음번에 로제 가에서 생일 연회 초대장이 오면 꼭 참석해야겠다 다짐하며 수첩을 들여다보았다.
쉐이든 로제의 글씨체는 꼭 저를 닮아 흐르는 듯한 필기체였다. 녀석은 세 개의 이름을 적고, 그 밑에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정수리가 아슬아슬 맞닿지 않는 거리에서 메모를 새기듯 훑어보고 있자니, 쉐이든이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제가 쓴 것을 읽었다.
“지금 1학년 중에 누가 어떤 애인지는 나도 잘 몰라. 아직 겪어보지 않았으니까. 내가 알고 지내는 애들은 너 빼고 다 착하고 얌전한 편이거든. 3학년은 1학년과 대부분의 수업이 겹치지 않으니까 우연히 만났을 때 너무 건방지게 굴지 않도록 노력해.”
“음.”
“그냥 익숙하지 않은 모든 얼굴의 사람에게 존댓말을 쓰고 묵례로 인사한다고 생각하면 돼. 허리를 숙이는 것까지는 네 신분에 과한 일이라 몇몇 애들에겐 조롱처럼 느껴질 수 있으니까 주의하고.”
“알았다.”
“⋯꼭 주의해야 할 인물은 2학년에 셋이야. 검술부에 루베르 안티 시어런, 루실라 안티 시어런. 네가 선생님을 가늠해 봤던 그런 시선으로 재어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둘 성씨만 봐도 알겠지? 황족이야. 잘못 처신했다가는 앞으로의 사십 년이 고달파진다고.”
“⋯.”
“새까만 머리에 눈동자까지 새까만 남자는 이 아카데미에 루베르밖에 없고, 루실라는 갈색 머리에 까만 눈이야. 뭐든 묻는 말이 있으면 최대한 공손히 대답해. 고급 검술 수업에서 둘 다 마주칠 거야.”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법부에, 연보라색 머리에 금색 눈을 가진 사람이 있어. 이름은 에드윈 키아드리스. 너도 알고 있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 웨슬리 키아드리스의 친동생인데, 성격이 진짜 개 쓰레기야.”
“어?”
“미친개 세 마리를 목줄 하나에 묶어둔 것 같다고 그랬어. 나도 직접 대화해 본 적은 없는데, 이 사람 조심해. 공작가라서 작위로도 이겨 먹을 수 없어. 소문으로는 검술부를 무척 싫어한다고 들었어.”
“친형이 그 웨슬리인데도?”
“그러니까 말이야!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피할 수 있으면 피해. 따르는 무리가 많아서 가까이 다가서기도 힘든 사람이니 별일 없으면 굳이 엮일 일 없을 것 같아. 최대한 시비 걸지 마. 나랑 말하는 것처럼 하지 말고 일곱 어절 넘게 대답해. 알았어?”
“어? 어어⋯.”
일곱 어절은 또 무언가. 열세 살 아이처럼 말하는 법을 잘 모르는 나는 당혹하여 입을 다물었다. 쉐이든 로제의 눈매가 곧장 뾰족해졌다.
나는 쉐이든 로제를 안심시켜주기 위하여 이름 세 개를 우아하게 발음하는 연습을 하고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느라 연무장에 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