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온후한 햇살이 너른 정원 위에 쏟아진다.
이 몸의 모친이 직접 가꾸었다는 화원은 유독 분홍빛과 흰 빛이 많이 보였다. 꽃의 이름자를 하나하나 들었으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꽃마다 이름을 짓는 것은 가인들의 일이라 여긴 탓이었다.
새로이 태어난 지 만으로 다섯 해가 되기 일주일 전.
그간 나는 새로운 땅의 언어를 많이 익혔다.
중원에 세가를 이룬 가문들의 직계손이 세가의 뒤를 잇는 것처럼, 이 땅에서는 귀족들이 대대로 작위를 이어 나누어 가진다.
아직 제대로 된 위계에 대한 학습을 끝마치지 못하여 그 높고 낮음에 대해서는 온전히 가늠하기 어렵지만, 내가 백작 가문 직계의 장손이라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렇게 넓은 장원에서 때때로 테이블과 의자를 꺼내어 사치스러운 다구로 차를 즐기는 것은 많은 사용인들을 수고스럽게 만드는 일이지만, 가문의 직계들에게는 일상적인 일이었다.
남궁가에서도 연못가 누각에 다탁을 차려두는 일이 종종 있었기에 아주 낯설지는 않았다.
“우리 미카엘 왔구나.”
“예, 어머니, 아버지.”
공손히 읍하고 의자에 올랐다.
아직 성장하지 못한 몸이라 의자에 오를 적마다 시종의 도움이 필요하였으나, 번쩍번쩍 들리는 몸이 마뜩잖아 온전히 걷고 뛸 수 있는 몸이 되자마자 의자 아래에 야트막한 단을 놓아달라 요청하여 계단처럼 밟고 올랐다.
어린 몸에 맞게 제작된 의자 덕분에 탁자의 높이가 알맞게 가슴께 아래로 내려왔다.
아직 손의 힘이 고루 발달하지 못하였으되 어느 것이 다도에 맞는 것인지는 알았다.
모친을 따라 한 손으로 찻잔을 쥐고 알맞게 식힌 차를 한 모금 입에 담는 것으로 목을 축이고 잔을 내려놓았다. 소리 없이 차받침에 찻잔을 내려놓고 나니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서로 사이가 가깝지 않던 부친과 모친은 내가 말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된 무렵부터 종종 이렇게 함께 자리를 만들었다.
내가 온전한 발음을 할 수 있게 되자마자 부친의 앞에서 정실부인을 홀대하는 것은 가주의 도리가 아니라고 몇 번 조언한 뒤로 그 말을 잘 들어주는 것을 보니, 부친은 의외로 마음이 약하고 성정이 순한 사람인 것이 틀림없다.
그 뒤로 모친의 건강도 조금 더 좋아졌으니 동생도 두셋 더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겼다.
나의 행동을 하나하나 다정하게 바라보는 부친과 모친의 행동에 어쩐지 낯이 간지러웠다.
지금 그대의 앞에 놓인 내가 불혹을 넘었다 말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나, 내가 듣기에도 미친 소리일 것 같아 입 밖에 내지 않기로 결심한 지도 다섯 해였다.
나는 꾸준히 그들의 어른스러운, 그러나 어린 아들인 양 행세했다.
이 세상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은 터라 그리 힘든 일은 아니었다.
모르는 것을 솔직히 묻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들의 앞에서 충분히 어린 아해가 되었다.
“이번에도 연무장을 사용하게 해 달라고 졸랐다면서.”
“예. 제 나이 이제 다섯이 되었으니 검을 시작하지 않으면 늦습니다. 사지가 좀 더 자라기 전에 훈련을 꼭 시작해야만 합니다.”
“그건 로렌스 경에게 들은 이야기인가?”
“아닙니다. 제가 직접 생각한 일입니다.”
나를 전담하는 호위무사 로렌스 경은 이제 약관이 갓 넘은 무인으로서, 이들의 말로 소드 익스퍼트 초입이라 하였다.
겨우 스물 언저리의 나이에 이류 무인의 경지에 올랐으니 나쁘지 않은 속도였다.
훈련하는 모습을 지켜보니 이들은 수신과 무도를 위한 수행이 아니라 전쟁을 위한 검법을 연마하였다. 내가 원하는 것은 엇비슷하나 조금 달랐다.
지난 생에 초절정의 경지에 이르렀으나, 화경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검기(*초절정의 경지, 즉 소드 마스터가 오러를 검에 덧씌워 절삭력과 공격력을 높인 상태)는 사용하였으되 검강(*화경의 경지, 즉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검기를 뭉쳐 공격력이 배가된 상태)은 빚어내지 못한 꼴이다.
내게 공으로 새로운 삶이 생겼으니, 무인으로서 욕심이 이는 것은 당연했다.
창천무애검의 끝을 보고 싶었고, 내게는 허락되지 않던 제왕검형(*남궁세가 직계가 물려받는 검법)의 모양새라도 흉내 내어 보고 싶었다.
“검을 배워서 무엇을 하려고?”
“소드 마스터가 되어보겠습니다.”
“소드, 크흠. 그래⋯ 우리 아들이 소드 마스터가 되고 싶구나.”
“지금은 요원한 길로 보이겠지만, 몸이 성장하여 간합이 맞을 즈음에 이르러서는 검기 정도는 보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간합⋯ 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겠니, 아들?”
“팔다리가 길어져 상대를 요격할 수 있는 검의 간격이 넓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구나⋯ 우리 아들이 조금만 더 크면 검기 정도는 쉽게 뽑아낼 수 있겠구나⋯.”
“예.”
물론 부모가 나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은 퍽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이 세계에서는 만으로 여덟 살이 지나야 검을 쥐는 것이 보통이라고 했다. 중원의 아이들보다 좀 더 유약하게 아이를 기르는 것은 무보다 문과 상을 숭상하는 기조가 널리 퍼져있는 탓이었다.
일전에 부친을 설득하여 돌아본 백작 영지는 과실과 곡식이 풍성하고 도로가 놀랍도록 잘 닦여있는 데다가, 기루가 아닌 일반 건물들도 두세 층 높이로 정갈하게 지어져 있었다.
잠시 침음하던 부친이 모친의 표정을 살피고, 다시 고민하다가, 애쓰는 기색으로 물었다.
“그래, 그러면 가문의 기사들 중에 스승을 구해 줄까?”
“처음에는 연무장을 사용하는 것으로 족합니다. 이후 스승이 필요한 시점이 오면 청하겠으나, 지금은 제 몸에 맞는 목검을 가지고 싶습니다.”
“⋯그래, 그러면⋯ 이번 생일 선물로 목검을 준비해 주마.”
“늘 아버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부친은 늘 그렇듯 끓는 신음을 삼키며 대답했고, 모친은 웃음 서린 얼굴로 내 손에 쿠키 하나를 쥐여 주었다.
팔이 짧아 탁자 가운데까지 손이 닿지 않아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고 다식을 먹으려면 종종 부모의 손을 빌려야만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탓이었다.
이전 생에 자주 맛보지 못한 호화로운 단맛이 황홀하고, 이번에도 부친이 나의 요청을 쉽게 받아준 것이 기분이 좋아 벙긋 입가에 웃음이 맺힌다.
“우리 아들은 크랜베리 쿠키와 초콜릿 쿠키 중 어느 것이 더 좋아?”
“둘 다 우열을 가리기 어렵습니다. 새콤한 것은 끈적하여 입 안에 달게 붙고, 달콤한 것은 눅눅하여 입 안에 녹진하게 가라앉으니 맛이 아주 좋다는 것 외에는 알기 어렵습니다.”
“으응, 우리 아들은 정말 가리는 음식이 없어 좋다니까.”
“이것도 다 부모님의 은혜 아니겠습니까.”
부친도 곧 모친을 따라 실없이 웃었다.
어린아이가 하는 말이라면 옳은 말도 그른 말도 웃음이 나기 마련이니, 민망할 일은 없었다.
게다가 이 몸은 그들의 장손이지 않은가. 중원에서도 한 가문의 대를 이을 장손은 금송아지다 옥두꺼비다 하여 어여쁘고 귀하게 여겼다.
이렇게 거대한 장원에서 수십의 사용인을 거느리고 있는 모친과 부친 또한 그들을 닮은 자식을 아끼는 게 당연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시 한번, 부모님의 은혜가 하늘과 같습니다, 하고 옳은 말을 늘어놓았다.
우리는 이 몸의 생일파티에 초대할 인원이나 차려 둘 요리, 현재 상업지구에서 잘 팔리는 상품, 밀 농사 현황, 그리고 주변 인접국과 내가 사는 제국의 정세 등에 대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는 동안 부친과 모친이 몇 번이나 웃음을 흘리는 것을 보고, 나는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말을 꺼냈다.
“가지고 싶은 생일선물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래, 단단히 벼르고 있던 게구나. 또 무엇을 가지고 싶기에?”
“예로부터 피보다 진한 것은 없다 하였습니다. 동생을 꼭 가지고 싶습니다. 듣기에 세르벨 가문에서는 벌써 셋째가 태어난다 하였는데,”
“크흠! 흠, 그것은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 좀 더 기다리거라.”
“제가 벌써 다섯 살입니다! 나이 터울이 너무 많이 나는 것도 서로 의지하기에 마땅치 않습니다, 아버지. 노력은 하고 계십니까?”
모친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가족 간의 대담을 듣지 않기 위해 물러서 있던 시녀들이 의아하게 다가선다.
여인에게는 수줍을 수도 있는 주제이니만큼 모친을 붙잡는 대신에 아버지를 매섭게 바라보았다.
내 아직 이 땅에 익숙지 않아도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그른 것은 그른 것이다.
혈족으로 이어지는 가문에는 후계뿐만이 아니라 그들을 보좌할 단단한 아군이 필요했다. 자손이 많은 세가는 늘 그렇지 않은 세가보다 번창하는 법이다.
부친과 모친 모두 아직 젊고 내가 태어난 몸이 건강하고 튼튼하니, 분명 동생도 또 그 동생도 건강할 것이 분명한데, 아직도 소식이 없는 것은 부친과 모친의 합방 소식이 잦지 않기에 생긴 일 아니겠는가.
모친이 두고 간 자리에 아들 혼자 남겨둘 수 없었는지, 부친이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가 쓸어내렸다가 부산을 떨었다.
아직 이립(*30세)이 안 되었다고 했던가. 이런 모습을 보면 아직 부친도 어린 태가 났다.
“아버님과 어머님 모두 젊고 건강하니 동생이 둘쯤 더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도대체 그런 말은 어디서⋯.”
부친이 고개를 들어 시종을 살피자, 말도 안 된다는 양 고개를 내젓는 시종들이 보였다.
그들의 잘못은 조금도 없었기에 나는 당당히 아버지의 시선을 끌기 위해 손을 내젓고, 쿠키 하나를 더 쥐여 줄 것을 요구했다. 부친은 그대로 했다.
“이런 것은 듣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여 얻은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니 혈육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더군요.”
“⋯그래⋯. 알았다.”
부친이 입속말로, 얼마 전 저택에 방문하였던 세르벨 백작 내외의 이름을 읊조렸다.
그들이 이 땅에서는 유난히 다산하는 체질인 모양이지.
이전 세상에서는 괜찮은 세가의 아해들끼리 태중 혼약을 하는 경우가 참 많았다. 이곳도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니, 이후에 내가 연을 맺게 된다면 다산을 한다는 세르벨 가문의 여식도 나쁘지 않겠다고 말을 하였더니 부친은 흐느끼듯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