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129화 (129/158)

제129화

“…….”

에스테리온은 대답 대신 차분히 그에게 가운을 걸쳐 주고 허리를 단단히 묶어 주었다. 녹스는 그 손길에서 그의 답을 들었다. 아, 거절이군. 녹스는 그 거절에 아무런 생각 없이 침대 위로 길게 누웠다.

“제가 공작님의 공허함을 달래 드릴 순 없습니다.”

“잠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을 순 있겠지.”

“아주 잠깐, 일시적인 도피를 바라시는 겁니까.”

“그것보단.”

녹스가 몸을 옆으로 돌렸다. 가운이 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단단한 어깨를 내보였다.

“그 둘이 아닌 다른 남자와 자면 아무래도 상관없어질 것 같아서.”

녹스의 말은 무례했으나 자신에 대한 혐오도 섞여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들은 에스테리온은 단호하게 말했다.

“공작님을 그렇게 취급하고 싶지 않습니다.”

에스테리온의 손이 녹스의 어깨를 붙잡았다. 초점이 돌아온 녹스의 눈이 그를 제대로 바라보았다. 에스테리온이 쓰게 웃으며 녹스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몸 위로 자신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당신께 그런 취급 받고 싶지도 않고요.”

“…….”

“그 두 남자가 아닌 다른 누구라도 상관이 없으신 거라면 저는 싫습니다.”

“…그래.”

녹스는 그 말에 어쩐지 흐릿했던 머릿속이 조금이나마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에스테리온은 녹스의 눈을 내려보다가 그의 상태가 그나마 나아졌다는 걸 눈치챘다는 듯 어깨를 쥐었던 손을 놓았다. 그리고 바르게 허리를 세우고 녹스에게서 벗긴 옷가지를 챙겨 인사했다.

“오늘은 홀로 주무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참 멋대로야.”

“그야, 사랑받는 정부잖습니까.”

그 말에 녹스는 그가 좀 능글맞아졌다는 생각을 했다. 녹스는 나가라는 듯 손짓했고 에스테리온은 방을 나섰다.

녹스는 잠시 천장을 바라보며 누웠다. 머릿속을 한 번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가만히 누운 채로 눈을 감았다. 피곤한데 잠은 오지 않았다. 오직 피로가 몸을 짓누르는 기분 나쁜 감각만이 남아 있었다.

일단, 채굴되는 다이아몬드의 3할을 준다는 것은 분명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자신은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마음을 정했다. 그러니 귀족들에게 다이아몬드 사업이라는 미끼를 던져 놓지 않았겠는가.

이제 자신을 존중하는 법을 모르겠다. 자신을 아끼는 법 또한 어떠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은 그걸 잃어버린 걸까. 잊어버린 걸까. 녹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자신의 방 안에 있는 집무 책상으로 가 편지지와 펜을 꺼내 들었다. 희미하게 켜진 촛불 아래에서 적당히 휘갈겨 쓰기 시작했다. 글자는 마치 그의 심정을 나타내기라도 하듯 날카로웠다.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다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제가 정합니다.]

그는 편지 내용을 보고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래, 어차피 불에 타면 사라질 몸. 뛰어내리면 산산이 부서질 몸. 뭐 그리 고귀하다고. 이 몸뚱이가. 녹스는 편지를 곱게 접어 집무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이렇게 하면 집사가 발견해 황제에게 전달하겠지. 그러면 할리드 비아도 제가 황제와 연락한다는 걸 알게 될 테고.

“무슨 거래를 하는지도 알 수 있겠지….”

녹스는 억지로 하하 소리를 내서 웃어 보았다. 하지만 곧 잦아들었다. 우습다. 너도 황제도 나도. 악에 받친 내가 어디까지 너희를 끌어내릴 수 있는지 자신도 궁금했다.

난 내 모든 걸 다해 너희를 내가 있는 진창으로 끌어내릴 것이다.

녹스의 밤이 깊어 가는 만큼 녹스의 감정도 깊어 갔다. 그리고 그 감정은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가 몸 곳곳에 퍼지고 스며들어 자신을 썩어 가게 했다. 녹스는 그런 몸뚱이를 억지로 일으켜 움직였다. 자신이 바라는 것이 끝날 때까지.

* * *

이른 아침, 집사는 녹스의 방을 방문했다. 어젯밤엔 에스테리온이 조용히 방을 나온 걸 확인했으니 어젠 같이 밤을 보내지 않았다는 소식을 전할 수 있으리라.

그는 녹스의 방문에 노크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모양인지 대답이 없었다. 집사는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갔다.

녹스 라이네리오는 작위를 돌려받은 이후, 단 한 번도 아침 훈련을 빼먹은 적이 없었다. 아마 잃어버린 체력과 몸을 되찾기 위해 애쓰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제는 체력 소모가 심했던 모양인지 원래 일어나는 시간에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집사는 녹스가 잠들어 있는 침대 곁으로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공작 전하. 기침하실 시간이 되셨습니다.”

녹스는 부스스하게 눈을 떴다. 그리고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집사는 하인들을 시켜 간단히 씻을 물을 준비했다.

“특별히 전달할 것 있나.”

그 말에 집사가 답했다.

“할리드 비아 공작저에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녹스는 별로 동요 없는 얼굴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집사가 잠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앞에서 할리드 비아의 이름을 말할 때면 묘한 긴장감이 공기를 휘감았다. 녹스는 하인들이 준비해 온 물에 얼굴을 간단히 씻고 스스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동안 녹스에게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집사는 불편한 마음으로 뒷짐을 진 채 녹스가 옷을 다 갈아입을 때까지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곧 목소리가 들리자 빠르게 고개를 들었다.

“책상 위에 있는 편지를 부쳐.”

“알겠습니다.”

“비아 공작의 서신은 훈련을 다녀와서 읽지.”

“알겠습니다.”

옷을 다 갈아입은 녹스가 소매 단추를 채우며 집사를 향해 말했다.

“편지, 잘 전달해.”

“아, 네. 알겠습니다.”

녹스는 아침 훈련을 위해 방 밖으로 나갔고 집사는 책상 위의 편지를 집어 들었다. 평범한 편지지였고 이렇다 할 장식도 없었다. 하지만 받는 사람은.

“황제 폐하께 보내는 편지….”

그 순간 집사는 잠시 미간을 찡그렸다.

‘잘 전달해.’

그 이야기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집사는 순간 얼굴을 굳혔다. 그가 말한 것이 어떠한 뜻인지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할리드 비아 공작의 귀에 들어갈 걸 알고 있다. 그러니 똑바로 전해라.’

집사는 미간을 찡그렸다. 녹스 라이네리오 공작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조금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집사인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뚜렷했다. 이 편지를 황제에게 전달하고 그 안의 내용은, 할리드 비아에게 전할 것.

그는 편지를 가지고 방을 나섰다. 끼익, 문이 닫히자 방 안은 고요로 가득 찼다.

한편, 훈련장으로 향한 녹스는 텅 빈 공터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그러고 보니 라이네리오 기사단을 다시 모집하기는 해야 했다. 과연 라이네리오 가문에 소속되고 싶어 하는 기사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천천히 검을 꺼내 들었다.

상대 없는 대련이 시작되었다. 녹스는 아무도 서 있지 않은 허공에 검을 겨누었다. 아무것도 없었지만 녹스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자신이 죽이고 싶은 사람이.

누구라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녹스는 정확한 동작으로 몸을 앞으로 기울여 바닥을 짓밟고 이내 허리를 기둥 삼아 묵직하게 검을 휘둘렀다. 사람이 서 있었다면 목이 단번에 날아갔으리라.

녹스는 뒤로 한 번 물러섰다. 그리고 이번엔 검을 치켜들었다. 느렸지만 묵직함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그는 온몸의 근육이 움직이는 것을 느끼며 검을 휘둘렀다.

시간이 갈수록 땀이 몸을 덮었다. 하지만 녹스는 한계까지 부풀어 오른 근육을 느끼며 멈추지 않았다. 이 고통을 이겨 내야만 더 나은 몸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 움직이고 나면 입은 옷이 팽팽해질 정도로 근육이 부풀어 뻐근했다. 녹스는 헉헉거리며 검을 바닥에 박아 넣었다. 그것을 쥐고 헉헉대며 바닥을 바라봤다. 흙바닥 위로 땀방울이 툭, 투둑 떨어졌다.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세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녹스는 혀를 찼다. 체력이 많이 줄긴 했다.

녹스는 호흡을 고른 후 방으로 돌아가 씻고 집사가 가져다준 서신을 확인했다.

[내일, 오후 2시. 당신을 뵙길 청합니다. 부디 너그러이 받아 주셨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녹스는 많이 공손해진 서신을 보며 바닥에 내버렸다. 그리고 집사에게 그렇게 하라는 답신을 보내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열리는 연회 중 괜찮은 것들만 골라 올려.”

“알겠습니다.”

“에스테리온 론더를 불러오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던 녹스가 말했다.

“라이네리오 기사단 모집 공고를 준비해.”

“아.”

집사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곧 고개를 끄덕였다.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녹스는 마치 이 가문에 충성이라도 하는 듯한 집사의 말투에 속으로 비웃음을 날렸다. 집사가 방을 나서고 몇 분 지나지 않아 론더가 방에 도착했다.

도착한 그의 손엔 집사가 들려 보낸 초대장들이 수북했다. 녹스는 자연스레 책상을 가리켰고 에스테리온은 초대장들을 무너지지 않게 집무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쌓았다.

“괜찮은 연회로 하나 골라 봐.”

“예? 제가 말입니까?”

“그래, 너도 같이 나갈 연회니까.”

에스테리온의 손이 잠시 멈췄다.

“제가 말입니까?”

“정부의 정부로서 화려하게 데뷔해야지.”

“…그렇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사실인걸.”

녹스는 설핏 웃으며 말했고 에스테리온은 조심스럽게 초대장을 집어 하나하나 집중해 살피기 시작했다. 사교계와 떨어져 지낸 지 좀 돼서 무엇이 내게 필요한 건지 잘 모르려나.

하지만 어차피 녹스 라이네리오 자신은 사교계에 나타난 질 좋은 먹잇감이었다. 특히 다이아몬드와 관련된 소문은 이미 물밑에서 돌아다닐 것이 뻔했다.

‘그렇다면 내가 어딜 가든 따라올 작자들은 많아.’

때마침 에스테리온이 무언가를 골라낸 듯 초대장 하나를 가지고 왔다.

“여깁니다.”

“여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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