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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121화 (121/158)

제121화

어차피 인적이 지나치게 드문 곳이라 누군가 따라붙기는 어려웠을 테다. 날쥐를 만난 후엔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으니 더더욱 그렇겠지.

‘그래도 내가 정보상을 만났을 거란 추측은 할 수 있을 테고.’

에스테리온은 생각에 깊게 잠긴 채 녹스의 집무실에 똑똑, 노크했다.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자연스럽게 최대한 문을 작게 열어 통과한 후 빠르게 문을 닫았다. 녹스의 집무실엔 여전히 대기하고 있어야 할 하인이 없었다. 에스테리온은 뒤집어쓰고 있던 로브를 벗었다. 그 모습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던 녹스가 물었다.

“어떻게 됐지?”

“다음 주에 다시 만나기로 했습니다. 대금은 그때 치르라더군요.”

“그렇겠지.”

“그런데 말입니다. 공작님.”

“왜.”

“그 정보상이 말하길, 하녀 한 명을 이 저택에 심어 놓았다고 합니다.”

“흐음.”

녹스는 딱히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설마 알고 있었냐는 얼굴로 쳐다보자 녹스가 고개를 저었다.

“심증만 있었지, 증거는 없었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조작된 서류는 대충 보이거든.”

녹스가 서류로 시선을 돌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아마 그 정보상 말고도 힘 좀 있는 놈들은 끄나풀 하나 정도는 심어 뒀을 거야. 그래서.”

녹스가 시선을 올려 다시 에스테리온을 바라보았다.

“정보상 쪽에서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내 왔다면 분명 바라는 게 있을 텐데.”

에스테리온 론더가 눈을 깜빡이다 곧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하나를 말하면 녹스는 이미 열을 내다보곤 했다. 이젠 익숙해 져야 할 일이지.

“자신이 집어넣은 하녀가 이래저래 쓸모가 많으니 측근으로 써 달라고 부탁해 왔습니다.”

그 말에 녹스가 서류를 옆으로 넘겼다.

“그리고 그 하녀는 내게 붙어 내 정보를 빼 갈 테고.”

“……그렇겠죠.”

“뭐, 어차피 이 저택은 내 정보를 빼 갈 놈들로 가득하니 가볍게 쓰고 버릴 순 있겠군.”

그 간단한 대답에 에스테리온은 녹스가 얼마나 귀족적인지 알게 되었다. 사람을 간단히 쓰고 버린다고 말한다는 것 자체가 그러했다. 에스테리온은 잠시 생각했다. 그럼 자신도 그에게 간단히 쓰고 버릴 수 있는 그런 존재인가.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만약 그렇다고 하면 어쩔 것인가. 자신에겐 여동생의 운명이 달려 있다.

“…그 하녀의 이름은.”

“됐어.”

“예?”

“안젤라 키튼을 불러.”

에스테리온 론더가 멈칫 굳었다. 안젤라 키튼. 날쥐가 말해 준 새의 이름이었다. 론더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녹스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다시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그냥, 감으로 고른 거야.”

“…감으로요?”

“물론 서류를 기반으로 한 정보가 없지는 않았지.”

“어느 점이 특이했습니까?”

“정보를 조작할 땐 사람마다 버릇이 있어.”

“버릇 말입니까?”

“그래. 익숙하고 손쉬운 경로를 고르다 보면 그렇게 돼. 네가 오늘 다녀온 곳과는 예전에 잠깐 접촉해 본 적이 있어. 단발성이었지만.”

아버지가 전 황태자 파에 들어가기 직전,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알기 위해 접근했던 곳이었다. 그때 정보상에게 하인을 한 명 부탁했었고 그때 하인은 ‘마이른’이란 마을 출신의 남자였다.

그리고 이번 하녀 중에서도 마이른 출신이 있었다. 단 한 명. 녹스는 설핏 웃었다. 아마 일부러 알아보라고 넣어 놓은 게 맞을 것이다. 자신을 다시 찾게 하기 위해서.

“들고 올 정보를 기대해 봐도 좋을 것 같네.”

“그렇습니까. 일단 저는 안젤라 키튼을 불러오겠습니다.”

“적당히 잘해.”

“알겠습니다.”

에스테리온은 날쥐에게 안젤라 키튼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얻은 상태였다. 아마 지금 당장 하녀장에게 찾아가 안젤라 키튼을 내놓으라고 하면 수상해 보일 게 뻔했다. 그렇기에 그는 빙 돌아가야 했다. 그녀를 직접 지목하면서도 그녀가 올 수밖에 없을 만한 상황을 만들어 내야 했다.

에스테리온 론더는 이 집의 하녀장, 엘리나의 방으로 찾아갔다. 똑똑, 노크하니 그녀가 문을 열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굉장히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어머, 론더 경. 무슨 일로?”

“하녀가 한 명 필요해서요.”

“하녀요? 하인이 아니라요?”

“보통, 하녀를 쓰죠.”

“그건 그런데….”

하녀장이 말끝을 흐리며 눈을 깜빡였다. 에스테리온 론더는 그녀를 조금 한심하게 내려다보다 큼, 기침하고 나머지 말을 뱉어 냈다.

“말수가 적은 조용한 애로 두어 명 올려 보내 달라고 하십니다.”

“…네에.”

하녀장은 뻔하다는 얼굴을 했다. 현재 저택 사람들은 녹스와 에스테리온의 사이를 정부와 주인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녀 역시 아마도 침구를 정리할 전담 하녀가 필요한가 보다 라고 추측하는 듯했다. 론더 입장에도 그녀가 그렇게 착각해 주는 게 나쁘지 않아서 그는 대답을 기다리듯 입을 다물었다.

“15분만 주세요. 세 명 정도 올려 보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에스테리온은 그대로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녹스의 집무실이 아닌 보좌관 집무실로 향했다. 대귀족의 오른팔이 된다는 것은 자신이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과 추가적으로 내려지는 명령을 따라야 하는 피곤한 일이다. 론더는 머리를 긁적이며 보좌관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작업에 매진하고 있던 두 명의 보좌관이 동시에 자신을 쳐다보았다.

“아, 늦어서 죄송합니다. 심부름을 좀 하느라….”

“하하, 저희한테 변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공작님의 명령 아니었습니까?”

“…그렇죠.”

“그럼, 뭐가 문제겠습니까.”

그들은 묘하게 그를 배려해 주는 척하며 선을 그었다. 에스테리온 론더는 그것을 기민하게 눈치챘다. 그는 자신의 자리로 가 앉았다. 그리고 잠시 그 둘을 살폈다. 자신을 적대하려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다만 간을 좀 보고 있는 상태라고 해야 하나. 그는 가늠해 보다가 이내 머리가 아파서 그냥 서류에 고개를 처박았다. 그냥 단순하게 서류만 보는 일이 제일 편하고 쉽다.

그리고 한편.

녹스의 집무실에 세 명의 하녀가 들어왔다. 녹스는 아랑곳 하지 않고 서류만 내려다보았다. 세 명의 하녀가 잔뜩 긴장한 채 어깨를 굳혔다. 여기서 둘은 공작과 황제의 끄나풀이고, 한 명은 정보 길드의 새라니. 이것 참, 제 저택도 제대로 된 게 없다 싶었다.

“부르셨습니까. 공작님.”

하녀 한 명이 용기 내어 말했다. 녹스는 그제야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아주 간단하게 말했다.

“너희들 중에서 내 전담 하녀를 고를 거야.”

꿀꺽, 누군가 마른침을 삼켰다.

“누가 되든 너희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이 밖으로 새어 나가서는 안 돼. 무슨 일이 있더라도.”

녹스의 어두운 녹색 시선이 하녀들을 향했다. 두 명의 하녀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비장하게 말했다.

“물론입니다.”

“알겠습니다.”

하녀들은 쿵쿵대는 심장을 내리누르려 애썼다. 집사님도 함부로 가까이 하지 못하는 공작님인데 곁에서 모시게 된다면 분명 보고할 만한 일이 생길 것이다. 그러면 보다 더 좋은 보상이 떨어지겠지. 두 명의 하녀들은 한껏 들떴다. 그 둘은 결연한 눈으로 녹스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그 옆에 대답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안젤라 키튼, 바로 그녀였다.

“무슨 일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녀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녹스는 픽 웃었다. 머리를 많이 굴렸군. 그 말을 듣자마자 두 명의 하녀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녹스는 그녀들도 눈치챈 것 같아 가볍게 웃으며 명령했다.

“저 하녀 빼고 다 나가.”

두 명의 하녀가 입술을 질끈 깨문 채로 녹스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곤 방 밖으로 나갔다. 안젤라 키튼은 여전히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녹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앞으로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그래.”

녹스가 답했다.

“날쥐의 새이니 알아서 잘하겠지.”

그 말에 안젤라 키튼이 잠시 입가를 가렸다. 놀랍게도 깜빡거리는 눈은 조용했다. 놀람, 당황, 흥분과 같이 동요했을 때 보일 법한 감정들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녀는 그런 감정을 드러내는 대신 입가를 가린 손을 치우고 대답했다.

“실망시키는 일 없을 겁니다.”

“그래야지. 오늘 당장부터 내 전담으로 일해. 하녀장에겐 알아서 알리고.”

“알겠습니다. 하녀장님께 보고하고 오면서 차를 좀 내올까요?”

“그러든가.”

안젤라 키튼은 활짝 웃으며 인사를 올리고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잠깐 쓸 하녀가 저리 똑똑하니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녹스는 다시금 서류에 시선을 주었고 그렇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똑똑, 노크와 함께 안젤라가 히비스커스 차를 내어 왔다. 녹스가 그것을 보고 혀를 찼다.

“차를 고르는 요령은 없군.”

“색이 예쁘길래 골랐어요.”

“……그래.”

녹스는 그냥 묵묵히 그녀가 내준 차를 마셨다. 어차피 목을 축이면 그만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안젤라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생글생글 웃으며 그의 곁에 남았다. 그렇게 그녀가 공작님의 전담 하녀가 되었다는 말이 저택 한 바퀴를 돌았다.

* * *

그리고 그런 그녀를 가만히 놓아둘 집사가 아니었다. 그는 늦은 저녁, 잠시 휴식 시간을 갖게 된 안젤라 키튼을 자신의 방으로 불러들였다. 안젤라 키튼은 특유의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집사와 마주했다.

“오늘 공작님의 전담 하녀가 되었다고.”

“예. 공작님께선 꽤 손이 안 가는 주인님 같으세요.”

그녀가 해맑게 말하자 집사가 그녀를 가늠하듯 보았다.

“오늘 공작님은 어떠셨지?”

안젤라는 눈을 깜빡거리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도 여전히 잘생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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