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9화
“…방금 무어라.”
“이미 사교계에 제가 폐하와 공작의 정부라는 소문이 파다한데, 아무것도 챙기지 못해서야 되겠냔 말입니다.”
“…….”
“저를 볼 때마다 뭔가 바라는 개처럼 구시니 제가 마음이 아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 녹스는 황제의 마음을 이용하기로 했다. 자신이 세울 귀족파의 초석을 황제의 손으로 직접 다지게 만들 생각인 것이다. 그는 아마 자신이 무엇을 하든 건들지 못하리라. 그가 앗아 간 것 때문에. 그리고 영원히 제 꼬리표로 붙을 그 노예라는 낙인 때문에.
“…생각해 볼 시간이.”
“하하, 거절은 하지 않으신다?”
황제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녹스의 앞에서는 무엇을 숨기든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노예일 적에도 아무도 모르던 자신의 버릇을 알아내지 않았던가. 그만큼 영민하고 눈치가 빠른 자이다. 황제가 한숨을 내쉬며 한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리고 그가 손을 다시 내렸을 때. 녹스가 바로 그의 앞에 있었다. 녹스는 소파를 짚고 허리를 숙여 황제의 얼굴 가까이로 다가갔다.
“죄송하지만.”
녹스의 입술이 속삭였다.
“생각할 시간은 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녹스의 입술이 황제의 입술에 닿았다. 순식간에 황제의 목소리가 먹혀들었다. 거부는 없었다. 도리어 녹스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것을 본 황제가 손을 뻗어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단단한 팔이 마치 그를 도망치게 두지 않겠다는 양 단단히 감겨 왔다.
입술을 벌리자 혀가 밀려 들어왔다. 혀 가운데를 거칠게 누르고 비비고 이내 입천장을 핥았다. 그러다 혀끼리 맞닿으면 숨이 막히도록 빨아올렸다. 녹스는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의 움직임을 감지한 황제가 그의 몸을 자신의 무릎 위로 올렸다. 녹스가 흠칫거리면 그를 가라앉히듯 허리를 쓰다듬었다. 녹스는 참을 수 없는 역겨움에 경련이 날 지경이었지만 참았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지금은 참아야만 했다. 길고 긴 입맞춤이 이어졌다. 황제의 손은 이제 슬금슬금 내려가 녹스의 허벅지를 더듬었다. 녹스는 미간을 찡그리며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 문이 보였다. 그것도 살짝 틈이 생긴 문이. 그리고…. 짙은 푸른 눈과 마주쳤다.
녹스는 그 얼굴을 보고 황제의 목에 팔을 감았다. 푸른 눈이 타오르듯 일렁인 건 순식간이었다.
그 눈동자를 본 녹스가 황제 쪽으로 조금 더 몸을 붙였다. 황제가 기껍다는 듯 파고드는 그 몸을 끌어안았다. 저도 모르게 몸이 경직되었다. 밀착되어 있는 황제가 그것을 느꼈는지 허벅지부터 허리까지 죽 쓸어 올리며 진정시키듯 몸을 더듬었다. 녹스는 오히려 그것 때문에 소름이 돋았지만 말 그대로 눌러 참았다. 문틈의 시선과 눈을 맞춘 채로. 푸른 눈동자 주변의 흰 자에 시뻘건 핏줄이 일어섰다. 녹스는 속으로 비웃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당장 자신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황제의 손이 셔츠를 빼고 맨 등을 쓸어 왔기 때문이었다.
“읏….”
“녹스…, 조금만.”
황제는 입술을 떼어 내고 조르듯 말했다. 척추 하나하나를 세 듯 매만지며 올라가는 감각에 허리를 바로 세웠다. 그는 단번에 황제의 어깨를 밀었다. 황제가 밀리지 않으려는 듯 어깨에 힘을 주었다. 녹스의 얼굴이 약간의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는 녹스의 엉덩이를 받쳐 올려 당장 차가 올라가 있던 티 테이블 위를 밀어 버리고 녹스를 그곳에 눕혔다.
와장창-!
“폐하…!”
“끝까지 하진 않겠네. 응?”
내 정부라면서. 황제의 눈이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녹스는 그의 어깨를 붙잡고 밀어내려 노력했다. 하지만 병세 때문에 한참 말라 버린 몸 탓인지 힘을 주어도 그의 몸은 쉽게 밀리지 않았다. 결국 녹스가 황제를 노려보며 말했다.
“또 억지로 절 취하실 작정이십니까?”
그 경멸 어린 말에 황제가 멈칫거렸다. 녹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를 확 밀친 후, 자리에서 벗어났다. 헝클어진 옷들을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정리하고 있자 황제도 더 이상 손을 대지 못했다.
“녹스.”
“…….”
녹스는 서둘러 옷을 갈무리하고 황제를 돌아보았다. 녹스의 눈엔 미약한 경멸이 깃들어 있었고 황제는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이 잠시 이성을 잃고 또 녹스의 의사를 무시하고 안으려 든 거니까.
“…이만, 가 보겠습니다.”
녹스가 그에게 등을 돌린 채 말했다. 그러자 황제가 입술을 한 번 꾹 물고 물었다.
“…달에 한 번씩은 오는 거겠지?”
“약속은 지킵니다.”
녹스는 그렇게 싸늘하게 말한 뒤 문을 바라보았다. 문틈은 이미 닫혀 있었고 뒤늦게 문밖으로 나가 보았을 때도 할리드는 없었다. 그 사이에 어디를 간 건지. 뭐, 보여 주려고 한 건 전부 보여 줬으니 상관없나. 녹스는 복도를 따라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황제가 만진 모든 부분이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서 저택으로 돌아가 씻고만 싶었다. 그렇게 녹스는 1층으로 내려가 마차를 타고 사라졌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두 사람이 있었다.
황제는 자신의 응접실에서 마차를 타고 사라지는 녹스를 보고 있었고 할리드는 어느새 1층으로 내려와 멀어져 가는 마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녹스가 자신이 아닌 황제를 찾아간 건 당연한 일이다. 자신이 쥐여 줄 수 없는 것을 황제는 쥐여 줄 수 있으니까. 자신은 이제 손끝 하나 대지 못하는 그에게 입을 맞추고 허리를 끌어안고 등을 쓰다듬던 그 손. 그래, 주제를 모르던 그 행태.
할리드는 녹스가 대체 왜 자신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 주었는지를 조금, 알 것도 같았다. 그래, 네게 그런 짓을 해놓고 너를 욕망한다는 사실 자체가 역겹겠구나.
할리드는 천천히 1층을 벗어나 자신의 마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탁, 문을 닫고 사라졌다.
* * *
녹스는 저택으로 들어오자마자 크라바트를 풀어헤치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목욕부터 했다. 그의 손길이 아직도 피부 위를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물로 제 몸을 씻어내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듯 녹스는 계속해서 닦고 또 닦았다. 계속된 마찰에 발갛게 올라오는 반점을 보았음에도 녹스는 닦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손끝이 아직도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물을 전부 닦지도 않고 나와, 하인이 들고 있는 가운을 낚아채며 말했다.
“론더를 호출해.”
“알겠습니다.”
대기하고 있던 하인들이 신경질적인 녹스의 말씨에 서둘러 론더를 호출했다. 녹스는 가운을 걸치고 하인들의 손길을 쳐 냈다. 황제가 저를 만져 섬뜩한 지금, 그의 사람들 역시 제 몸에 손을 대려 한다는 사실이 소름 끼치게 싫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들어와.”
론더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녹스가 물을 뚝뚝 흘리는 채로 샤워 가운만 걸치고 있자 잠시 멈칫거렸다. 하지만 그는 금세 옆 하인에게 눈짓해 마른 천 하나를 받아 들고는 밖으로 하인을 내보냈다. 그리고 젖은 채로 나와 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녹스의 머리카락을 닦아 주며 물었다.
“시키실 일이 있습니까?”
“할리드 비아 공작의 동태를 살펴봐. 저택 내에 믿을 만한 사람은 없으니 외부 정보상을 찾아가도록. 돈은 내가 내어 줄 테니.”
“황궁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론더의 말에 녹스가 찡그리듯 웃었다.
“불에 기름을 좀 쏟았지.”
“방화에 소질이 있으시군요.”
“뭐?”
녹스가 그 말에 얼핏 웃었다. 더러워졌던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것 같았다. 녹스가 자신의 머리를 닦아 주던 론더에게 책상에서 꺼낸 주머니 하나를 내밀었다. 그가 수건을 녹스에게 넘긴 뒤 주머니를 받아 입구를 열어 보자 그 안엔 금화가 잔뜩 들어 있었다.
“이 정도 돈이면 그가 사용하는 침구 재질까지 알 수 있겠는데요.”
“그렇게까진 필요 없어. 내가 불을 질러 놨으니 그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만 알면 돼.”
“아신 후엔 어떻게 하실 예정이십니까.”
“글쎄,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고 생각하려고. 예상이 가는 게 하나가 있기는 한데….”
녹스가 머리를 다 닦고 마른 천을 다시 론더에게 넘기며 말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러자 녹스가 검지를 세워 입술 가까이 가져갔다.
“미리 말하면 재미없어.”
론더의 눈이 손가락에서 그 가까이 있는 입술로 올라갔다. 녹스는 그 시선을 눈치채고 손을 뻗어 그의 턱 아래를 툭 건드렸다.
“건방진 망상 하지 말고.”
“…안, 했습. 아닙니다. 안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솔직하기는.”
녹스는 입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었고 론더는 익숙하다는 듯 시종 대신 그의 드레스 룸에서 옷을 가져와 입는 걸 돕기 시작했다. 하의를 입고 셔츠를 걸친 녹스는 론더에게 등을 내보였다. 등에 단추가 있는 형식의 셔츠라 그가 잠구어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론더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올려 단추를 아래에서부터 하나하나 잠그기 시작했다.
“…….”
녹스의 흰 등엔 채찍 자국이 가득했다. 오래된 것도 있었고, 최근에 생긴 것 같은 자국도 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눈매를 좁혔다. 어떻게 하면 귀족의 몸에 이런 게 있을 수 있는지. 얼마 전까지 노예였다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다룬다는 건 지나치게 가혹한 처사였다.
“…다 됐습니다.”
“아, 고맙군.”
녹스가 입은 셔츠는 목을 가볍게 조이는 듯한 프릴이 목 아래부터 자연스럽게 곡선으로 떨어져 내리는 실크 셔츠였다. 소매는 크게 부풀었다가 손목에서 조여드는 모양을 하고 있었으며 은은하게 진줏빛으로 반짝였다. 론더는 잠시 그 모습을 넋을 놓고 보다가 녹스와 눈이 마주치자 큼, 헛기침을 하며 정신을 차렸다.
“정보상에 다녀와.”
“알겠습니다.”
“그리고….”
녹스가 무언가를 말하자 론더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대로 저택을 나가 거리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