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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116화 (116/158)

제116화

“과연 이 패가 좋은 패가 될지….”

안델라스 후작가는 제국 최대 규모의 금광을 가진 가문이었다. 그렇기에 후작이지만 귀족파의 수장 노릇을 할 수 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녹스는 생각을 멈추고 초대장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론더를 호출해.”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녹스가 집사에게 안델라스 가문의 편지를 가볍게 던졌다. 뒷짐을 지고 있던 집사가 용케 그 편지를 받아 냈다.

“오늘 방문하겠다고 해.”

“오늘 말입니까?”

“그래, 당장.”

“…알겠습니다.”

집사는 대답 후 방을 나갔고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에스테리온, 그였다. 녹스는 잘 왔다는 듯 가운을 벗었다. 에스테리온은 잠시 거기에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뭐 해.”

“…아.”

가운을 벗은 녹스의 곁에는 하인들이 두고 간 옷가지가 놓여 있었다. 뒤늦게 그것을 발견한 그는 잠시 제 상상력이 지나쳤다는 것을 인정하며 그의 옷시중을 들었다. 보좌관이 할 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무엇이든 하겠다고 말한 것엔 이런 일도 들어가 있는 법이었다.

“한동안은 네 손을 빌려 쓰지.”

“…그래야겠군요.”

녹스의 단단해 보이는 몸을 내려다보던 론더가 혼자 중얼거렸다. 녹스는 눈치가 빨라 이것저것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에스테리온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녹스의 옷시중이 끝나고 둘이 같은 방에서 걸어 나오자 아닌 척, 붙어 오는 눈들이 많았다. 어젯밤에 침소에 든 것뿐 아니라 이젠 저 손만 타겠다는 듯 옷시중까지 시키시다니. 그런 말들이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녹스는 어차피 전부 제가 의도한 것이기에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고 1층으로 향했다.

1층엔 이미 후작저로 갈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론더가 몇 발자국 앞서 마차의 문을 열었고 녹스가 자연스럽게 그 마차 위에 올랐다. 론더는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는 사용인들의 시선을 모르는 척하며 그를 뒤따랐고 이내 탁, 문이 닫혔다. 에스테리온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소리에 녹스가 입을 열었다.

“그래, 별다른 일은 없고?”

별다른 일이 있었을 거란 걸 확신하며 묻는 투였다. 에스테리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보좌관들이 일하는 내내 저를 흘끔거리기는 하는데…. 괜찮습니다. 거슬릴 정도는 아닙니다.”

“소문이 빠르군.”

“저택의 사용인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눈치더군요.”

“내가 의도하긴 했지만….”

지나치게 빠른데. 하긴 사용인 전부를 채워 놓은 게 할리드이니 소문이 빠를 만도 했다. 주인을 잘 파악하고 있어야 보고할 게 많아질 테니. 녹스는 귀찮다는 듯 미간을 설핏 찡그렸다. 이것들을 언제 다 갈아 치우나. 일단은 하인들부터 믿을 만한 놈들로 뽑아 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혹시 주변에 쓸 만한 놈 있나?”

“쓸 만한 놈이라면….”

“입 무겁고 일 잘하고 날 배신하지 않을 놈.”

에스테리온은 그의 말에 꽤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인은 평민들이 갖는 위치다. 그리고 에스테리온은 애초에 귀족 친구 같은 게 없다. 일하면서 친해진 평민들이야 많지만.

“한번 추려 보겠습니다.”

“생각 외의 대답이군. 친구 없을 줄 알았는데.”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뭐, 친구 없는 건 피차 마찬가지이니 할 말이 없군.”

“없으십니까?”

“없어.”

“…….”

녹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노예로 추락하기 전에도 녹스에게 친우라고 부를 만한 상대는 없었다. 파티장에 잘 나타나지 않는 신비주의 공자. 그러니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 있었을 턱이 없었다.

“그쪽은 돈 빌리느라 있던 연도 다 끊어졌을 거고.”

“잘 아시는군요.”

“뒷조사는 귀족의 기본 소양이지.”

“…그럼 전 귀족이 아니군요.”

“귀족이라고 하긴 뭐하지. 반쪽짜리라고 해야 하나.”

녹스가 냉정하게 평가했고 론더는 그 말이 맞다 여겼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발끈할 법도 한데, 맞는 말이라며 고개나 끄덕이는 그의 태도를 보고 녹스는 가볍게 웃었다. 하지만 그 미소도 아주 찰나일 뿐이었다.

끼익, 얼마 가지 않아 마차가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에스테리온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마차의 문을 열었다. 녹스는 그 뒤를 따라 마차에서 내리며 오래된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데미트리 안델리스….”

녹스는 늙은 후작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저벅저벅, 앞에서부터 걷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슬쩍 내리니 나이 든 집사가 마중을 나오고 있었다. 그는 예순이 넘어 보였음에도 어깨가 단단해 보였고 꽉 다문 입술은 제법 고집스러워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공작님. 후작님께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지.”

녹스는 나이 든 집사를 따라 저택 안으로 향했다. 저택 안은 집사와 비슷한 인상을 주었다. 10년 전에나 유행했을 것 같은 카펫에 수십 개씩 걸려 있는 우아한 그림들. 100년은 된 것 같은 화분과 장식들. 누군가는 이를 보고 고풍스럽다고 하겠지만 녹스가 보기엔 그저 과거를 추억하는 늙은이의 고집스러움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세 사람은 어느 방 앞에 닿았다. 응접실처럼 보이는 문에 나이 든 집사가 노크했다.

똑똑.

“라이네리오 공작님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시라 하게.”

끼익-.

집사가 문을 열었고 그 앞으로 오래되었지만, 관리가 잘 된 소파가 보였다. 그 위론 무언가를 깎아 만든 것 같은 인상의 노인이 보였다. 녹스는 예의상의 미소를 올려 보이며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론더가 들어오며 문을 달칵, 닫았다.

“어서 오십시오. 공작님.”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녹스를 반겼다. 녹스는 그가 자리에서 일어난 것을 가만히 지켜보다 한 박자 늦게 답했다.

“반겨 주니 고맙군. 후작.”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이지요. 앉으십시오.”

녹스는 거침없이 걸어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녹스는 다리를 꼬고 등받이에 등을 편하게 기대곤 물었다.

“날 초대한 이유가 뭐지?”

“그저, 복권을 축하하기 위해서죠. 어떤 다른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

녹스는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말했다.

“나라는 존재로 뭔가를 해 보려는 게 아니라?”

그 말이 꽤 따끔했나 보다. 노인의 입이 잠시 꽉 다물렸다. 녹스는 여유롭게 차를 기다렸다. 후작은 잠시 녹스의 속내를 가늠하려는 듯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녹스는 기꺼이 관찰하라는 듯 편안한 자세를 취한 채 시간을 죽였다. 십 분 정도 지났을까. 집사완 다르게 어린 하녀가 쓴 향이 나는 차를 내왔다.

녹스는 쓴 차를 내려다보다 시선을 올렸다. 단 걸 좋아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쓴 걸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뭐 하나, 나에 대해 아는 놈들이 하나도 없군. 관심은 지대한 척하면서 말이야.

“내 시간은 그렇게 남아돌지 않아, 후작.”

“……그러시겠지요, 바쁘신 분이니.”

“그런 소리가 아닌 걸 알지 않나? 할 말이 있으면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녹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절박하잖아. 귀족다운 짓거리는 잠시 내려놓자고.”

빙빙 돌리지 말라는 소리야. 어차피 훤히 보이는 속. 빙빙 돌려 말하면 짜증만 날 뿐이니, 진실한 속내를 듣고 싶었다.

“……저는.”

후작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고 녹스는 단호히 그것을 잘라냈다.

“귀족파를 다시 일으킬 생각인가.”

녹스의 말에 후작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어떻게 알았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녹스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죄다 멍청이들밖에 없어서는.

“지금의 황제가 피의 즉위식을 마쳤을 때 죽어 나간 귀족들 대부분이 귀족파였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아나?”

“……그건.”

“전 황제는 황태자를 곱게 보지 않았어. 황제파는 후계인 황태자가 아니라 황제의 편에 섰지. 그러니 황태자가 제 아래로 끌어들일 수 있는 건 두 부류. 중도파와 귀족파.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홀리기 쉬운 것은….”

녹스가 엄지와 검지를 붙여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는 귀족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거야.”

“…귀족파가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닙니다.”

“그래? 그래서 후작은 요즘 어느 행사에도 참여하지 않고 죽은 사람처럼 저택 안에서 숨죽여 사나?”

후작이 이를 악물었다. 턱 아래로 힘줄이 섰다. 녹스는 그러지 말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내가 그대에게 하나의 열쇠가 되어 줄 수 있어.”

“…열쇠라뇨.”

“그대, 사교계에서 바닥까지 떨어진 날 꼬드겨 공작가를 등에 업고 세력을 다시 모을 속셈이었지?”

“…….”

노인이 소파 손잡이를 꽉 잡아 쥐었다.

“나를 허수아비로 세워 두고 그대의 이름 아래로 사람들을 모으려 했겠지. 아무리 이름뿐이래도 공작이라는 지위가 주는 힘은 무시할 수가 없거든.”

“…전부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저는 결코 공작님을 허수아비로 둘 생각이 없습니다.”

녹스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다분히 의도적인 웃음이었다.

“날 속이려 들지 마, 후작. 내가 필요하다면 차라리 다 때려치우고 거리의 망나니처럼 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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