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화
그런 것치고는 저번에 다녀오는 데 꽤 걸렸던 것 같은데.
“얼마나 가깝습니까?”
“한 시간 정도만 걸으면 되는걸요!”
그럼 왕복 두 시간이었다. 아직 하녀가 어려 보폭이 작은 탓도 있겠지만 그래 봤자 왕복 한 시간 반 정도일 것이다. 마차를 타면 금방일 텐데. 녹스는 가만히 생각하다 아이에게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예?”
“잠시만요.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하녀에게 그렇게 말한 녹스는 곧장 할리드의 방으로 올라가 물었다.
“외출을 해도 되겠냐고?”
할리드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그리고 저번에 자신이 외출을 허락해 준 것이 생각났는지 아, 짧은 침음성을 내었다. 그리고 이내 물었다.
“어디를 갈 건데.”
“글쎄요. 일단은 하녀 하나를 집으로 데려다줄 생각입니다.”
하녀라는 말에 할리드는 떠오르는 것이 있는지 재차 물었다.
“저번에 그 어린 것을 말하는 건가.”
“예, 자기 몸만 한 자루를 끌고 걸어간다더군요.”
“쯧, 마차를 하나 내어 줄 테니 그걸 타고 가.”
“감사합니다.”
할리드의 허락을 받은 녹스는 곧장 1층으로 내려가 하녀가 기다릴 정원으로 향했다. 할리드는 녹스가 나서는 것을 바라보다가 이내 문이 닫히자 옆에 있던 자신의 시종에게 명령했다.
“미행을 붙여.”
“예.”
“녹스는 예민해. 너무 가까이 붙으면 눈치챌 수 있으니 조심하고.”
“알겠습니다.”
“어딜 갔다 왔는지 하나하나 다 보고해.”
그렇게 말하며 할리드는 곧 생각난 게 있는지 어제 받아 와 그냥 협탁 위에 올려 두었던 상자를 가리켰다.
“마정석 통신구다. 하나를 줄 테니 미행할 놈에게 줘.”
“그렇게 하겠습니다.”
시종은 고개를 끄덕인 후 곧장 마정석을 챙겨 방 밖으로 나갔다. 할리드는 옷시중을 다 받은 뒤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녹스와 어린 하녀의 동그란 정수리가 보였다.
녹스는 하녀에게서 자루를 넘겨받았고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할리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내 커튼을 쳤다.
“와아! 감사해요. 덕분에 편하게 가네요!”
어린 하녀가 마차를 올려다보며 해맑게 말했다. 녹스는 마차의 문을 열고 자루를 먼저 밀어 넣은 뒤 하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아이가 수줍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저, 이런 거 처음이에요.”
“사람에겐 뭐든 처음이 있기 마련이죠.”
“아하하, 그렇긴 하네요. 하지만 제가 어딜 가서 누군가 내미는 손을 잡고 마차에 타 보겠어요? 앞으론 절대 없을걸요?”
하녀는 조심스럽게 녹스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라탔다. 녹스는 하녀를 태운 후 자신도 올라타며 마차의 문을 닫았다. 녹스가 제 옆에 난 작은 마차 창을 똑똑 두드렸다. 하녀가 자신이 가야 하는 곳을 말했다.
“12번가 세 번째 모퉁이로 가 주세요!”
그 말과 함께 마차가 천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하녀는 마차 의자에 앉아 두 다리를 흔들었다. 어리긴 어리다.
“다녀오면 항상 다리가 퉁퉁 붓곤 했는데 오늘은 안 그러겠죠?”
“그 거리를 걸어 다니면 그렇게 되는 게 당연합니다.”
“아하하, 집안이 좀 가난하거든요. 그래서 허투루 돈을 못 쓰겠어요.”
“아니면 가문에 부탁해 보아도 될 텐데요. 늘 태워 달라는 것도 아니고 사용인들이 왔다 갔다 할 때 쓸 만한 마차가 없는 것도 아니니.”
“어, 그래도 돼요?”
“뭐…. 주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안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구나.”
아이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이래저래 신경 써 주셔서.”
“아닙니다. 그냥 할 일이 없어서 그런 것뿐이니까.”
녹스는 눈을 내리깔았다. 아이는 마차 창밖을 바라보다 문득 물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이름도 몰랐네요! 저는 에나예요.”
그러자 녹스가 의외라는 듯 물었다.
“제 이름을 모르십니까?”
그 말에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깔깔거리며 웃었다.
“당연히 모르죠! 왔다 갔다 하면서 얼굴은 봤지만 저는 얼굴만 보고 이름을 맞히는 능력은 없는걸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녹스는 눈앞의 상대가 자신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모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공작님의 노예라는 사실은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떤 취급을 받는지 따위 등은 모르는 듯했다.
만약 그런 소문에 관심이 있다면 제 이름을 모를 리가 없을 테니까.
녹스는 그 사실을 확인함과 동시에 무언가 속에 얹힌 것이 조금 내려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에야 몰라도 나중엔 알게 되겠지만, 지금 이 순간 누군가 자신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꽤 큰 위로, 같은 게 된 건지도…….
“녹스라고 합니다.”
“멋진 이름이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에이, 칭찬하지 말걸.”
아이는 해맑게 웃음을 터뜨렸고 녹스는 그 앞에서 조금 편안해졌다.
마차는 얼마간의 시간 후 어느 작고 초라한 집 모퉁이에서 멈추었다. 녹스는 마부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는 말을 한 후 자루를 들고 에나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에나는 조금 부끄럽기라도 한 듯 귓가를 조금 붉힌 채 후다닥 집 안으로 들어가 쌓여 있는 물건 따위를 서둘러 치웠다.
“죄, 죄송해요. 손님을 맞을 꼴은 아니라서.”
“괜찮습니다. 그냥 제가 따라온 거니까,”
“그래도요. 대접할 차 한 잔이 없네요. 아! 자루는 아무 곳에나 놓아 주시면 제가 정리할게요!”
녹스는 든 자루를 거실로 보이는 자리에 놓곤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말 작은 집이었다. 하인들이 지내는 방보다야 크지만 정말 겨우 그 정도 수준. 거실과 주방이 함께 붙어 있었고 작은 방이 딸려 있었는데 그 방에서 작게 콜록거리는 소리가 났다.
“엄마, 나왔어요! 잠시만요!”
에나는 녹스에게 앉아 있으라는 듯 작은 테이블을 가리키곤 방으로 들어갔다. 아마 아픈 어머니를 보러 간 모양이다.
녹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살림살이들이 하나같이 낡고 작았다. 마치 소꿉장난을 하는 집 같아 보였다. 물론 그런 것치고는 많이 더럽기는 했지만. 그렇게 작은 식탁 의자에 앉아서 아이를 기다리고 있는데 문득 바깥으로 향하는 문이 벌컥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뭐, 뭐야. 당신 누구야!”
밝은 갈색 머리에 동그란 갈색 눈. 그리고 주근깨. 에나와 똑 닮은 남자가 문을 연 채 당황해 소리쳤다.
“당신 뭐냐고! 어떻게 들어왔어!”
“오빠!”
그가 크게 소리 지르자 작은 방문이 벌컥 열리며 에나가 뛰쳐나왔다.
“내 손님이야!”
“뭐? 네 손님이라고?”
남자는 대놓고 녹스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딱 보아도 고급으로 된 시종 복. 목에 노예라는 의미의 볼로 타이가 있긴 했지만 평민들은 거의 볼 일이 없는 물건이라 의미를 알아채긴 힘들겠지.
그는 녹스를 피하듯 벽으로 붙은 채 움직여 에나에게 다가가 물었다.
“어, 어디 높으신 분 아니야?”
“어, 음. 그건 아닌데….”
에나는 그에 관해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저 아이도 노예라는 게 좋은 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테니까. 녹스는 별다른 생각 없이 자신을 노예라고 소개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에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택의 하인이야!”
“하, 하인?”
“그래!”
“그, 그런데 다른 하인들이 입는 옷이랑 좀 다르지 않아?”
“공작님 전담 하인이시거든!”
“헉, 그럼 대단한 분 아니야?”
에나가 문을 닫고 쪼르르 달려와 맞은편 테이블을 탁 내리쳤다.
“대단한 분이시지!”
에나가 녹스를 향해 씨익 웃었다. 녹스는 자신이 곤란할까 그렇게 말해 준 에나에게 약간의 고마움을 느꼈다.
“얼마나 대단한 거야?”
에나가 가슴을 쫙 폈다.
“엄청 대단하지! 공작님을 바로 옆에서 모시는 분이니까! 있죠, 저도 가문에 마님이 들어오면 마님의 전담 하녀가 되고 싶어요.”
“그렇습니까.”
그러고 보니 할리드의 결혼 문제가 숙제처럼 남아 있었다. 녹스는 가만히 생각했다. 지금처럼 자신을 끼고 있으면 결혼하기가 무난하진 않을 텐데. 뭐, 그의 결혼 따위 자신이 걱정해 봤자 해결이 되는 건 아니었지만. 녹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될 수 있을 겁니다.”
“하하, 고마워요. 사실 너무 어려서 그렇게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을 보면 일이 년 내에 공작 부인께서 들어오진 않을 것 같습니다.”
“아, 그래요? 공작님 곁에 있으면 그런 것도 알게 되나?”
“뭐, 대충….”
일단 자길 물고 빠는 동안은. 할리드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더라도 할리드가 결혼할 생각이 없을 테니.
그때 에나의 오빠가 녹스의 맞은편에 앉아 의심쩍은 눈으로 녹스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왜 너랑 있는 건데?”
“아, 저기 자루 보이지? 저게 무거워 보인다고 도와주셨어.”
“흐음….”
그의 의심스러운 시선이 더욱 진해졌다. 녹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렇게까지 자신을 경계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에나랑은 무슨 사이예요?”
아, 그런 거였군. 녹스는 잠시 헛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관자놀이를 한 번 문질렀다.
“…그런 질문을 하기엔 당신네 동생 나이가 너무 어립니다만.”
“세상에 이상한 새끼들은 많으니까요.”
“동생을 위하는 마음가짐이 훌륭합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전 멀쩡한 사람이라서요.”
녹스가 칼같이 잘라 내자 에나의 오빠는 일단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