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46화 (46/158)

제46화

‘이제 일 좀 보시겠군.’

하인이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공작은 얼마 되지 않아 급한 서류 처리를 마치고 이어 밀린 일들을 해치우기 시작했다. 공작님께서 애첩에게 빠져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돌곤 하지만 사실 공작님께선 다른 짓을 하면 다른 짓을 한 만큼 일하는 시간을 늘리곤 하셨다.

그 다른 짓이 꽤 자주 이어진다는 게 문제이긴 했지만 노예만 잘 떨어뜨려 놓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공작님께서 노예를 계속 찾으시기는 하지만….’

사용인들이 일부러 노예가 씻고 있다, 잠들었다 말하면 일단은 고개를 끄덕이시곤 하였다. 하인들은 이제 눈 밑이 거뭇한 노예를 조금이나마 동정하기 시작했다. 가끔 방 안에서 비명처럼 들려오는 신음을 듣고 있으면 민망하기보단 걱정이 덜컥 들었다. 저러다 사람 하나 망가지는 거 아닌가 싶어서.

물론 그런 그들의 걱정이야 공작도 노예도 전혀 모르는 일이다. 그들은 조용히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알게 모르게 그들의 관계를 관찰했다.

그리고 보면 볼수록 확신하게 되었다. 집착하고 있는 것은 공작님이며 노예는 그것에 붙들린 먹잇감 같은 것이라는 걸.

그렇게 시간이 한참이 지나고 식사 시간을 훌쩍 넘어서까지 할리드는 집무실을 벗어나지 않았다.

중간중간 식사 시간을 알리는 사용인들의 말이 있었으나 그는 그를 전부 물리고 밀린 일에 시간을 쏟았다. 그렇게 그가 집무실에서 나온 건 밤 9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방에서 나온 그는 식사에 대해 물어보는 하인의 말을 무시하고 다른 것을 물었다.

“녹스는?”

“아, 제 방에 있을 걸로 압니다.”

“잠들어 있나?”

“잘 모르겠습니다. 부를까요?”

그러자 할리드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 말했다.

“내가 가지.”

할리드는 곧장 녹스가 머물고 있는 1층 방으로 향했다. 당연하게도 그에게 노크란 없었다.

할리드가 갈 수 없는 곳은 이 저택에 없었으므로. 그가 문을 열자 녹스가 보였다. 녹스는 침대에 앉아 허공을 보고 있었다.

할리드는 그 모습을 보고 잠시 가슴이 싸해지는 것을 느꼈다.

요즘, 그는 너무도 부족할 데 없이 저를 흡족하게 했다. 녹스는 그 어느 때보다도 고분고분했으며 그 무엇보다도 자신에게서 잘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잠시 이렇게 떼어 놓을 때면 무엇을 하고 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할리드는 지금 그 답을 알았다.

녹스는 자신과 떨어져 있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렇게 방에 아니, 상자에 넣어진 인형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불길한 감각이 가슴을 타고 스멀스멀 올랐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할리드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자 녹스는 그제야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그에게 다가가 팔을 벌렸다.

“녹스.”

이제 그런 그의 행동 패턴에 익숙해진 할리드는 마주 팔을 벌려 그를 품에 안았다. 녹스는 할리드의 어깨에 머리카락을 느릿하게 비비며 눈을 감았다. 할리드는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뒤늦게 물었다.

“무엇을 하고 있었지?”

“…아무것도.”

그리고 할리드의 예상과 다를 바 없는 대답이 나왔다. 할리드는 아주 뒤늦게, 정말 너무나 늦게 자신이 녹스에게 허락해 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저 이 방에 들어와 있는 것 외에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할리드는 미간을 조금 찌푸리며 그를 안은 채로 물었다.

“정원으로 나갈까.”

정원, 이라는 소리에 녹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별다른 틈도 없이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녹스에게 이 저택의 정원이란 그저 창밖의 풍경이다. 할리드와 어딜 갈 때 스쳐 지나가는 곳, 한 번도 나가 본 적 없는 곳. 할리드 또한 그를 잘 알고 있는지 곧 녹스를 품에서 떼어 놓고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방을 나와 바깥으로 걷기 시작했다. 녹스의 걸음은 평소보다 느렸다. 그리고 할리드는 그런 그의 걸음을 배려해 주지 않았다.

곧 저택의 입구에 닿았다. 저택의 입구를 벗어나면 정문까지 이어진 길 양옆으로 정원이 보였다. 할리드는 그중 규모가 더 큰 쪽으로 녹스를 이끌었다.

녹스는 이 저택의 정원이 어떻게 생겼는지 지금에서야 알 수 있었다. 녹스는 할리드가 이끄는 대로 움직이며 바깥 풍경을 눈에 담았다. 커다랗게 정원을 둘러싼 나무들과 적당한 키로 자라나 있는 작은 나무들. 그리고 발목을 간지럽히는 꽃들과 바람 한 번 불 때마다 사각거리며 나는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

녹스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것을 느낀 할리드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

“…아뇨. 다 마음에 듭니다.”

녹스는 가만히 말했다. 할리드는 녹스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는 몰랐다. 녹스는 그저 그의 말에 긍정만 할 뿐이라는 것을.

지금의 녹스에겐 호불호 따위 없었다. 그가 물으면 그의 말이 맞다고 긍정하고, 그가 원하면 알아서 제 몸을 열 뿐. 그가 원하는 대로였다.

하여튼 녹스의 안에 자리 잡고 있던 모든 것들은 철저히 할리드에게 맞춰져 변해 갔다. 그러던 중에 녹스가 문득 깨달은 것이 있었는데. 자신의 취향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철저히 어머니의 것에 맞춰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녹스는 어려울 것이 없었다. 자신을 바꾸는 게 아니라 그저 맞출 상대만 바꾸면 되는 것이었으니까.

어머니였다면 여기서 키 큰 나무를 더 심어 바깥에서 감히 우리 저택을 넘볼 수 없도록 만들었을 테다. 하지만 그것은 어머니의 취향이었지 녹스의 취향이 아니었다.

녹스는 정원을 꽤 꼼꼼히 살펴보았다. 지금의 정원 모습은 할리드가 원한 것일 테니. 이것을 새겨 넣어 자신의 취향인 것처럼 꾸며야 했다. 어렵지 않다.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할리드는 멀거니 정원을 바라보는 녹스의 모습에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 녹스는 할리드를 한 번 바라보고 그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는 대화가 필요 없었다. 조금, 나쁜 쪽으로. 완벽히 녹스가 할리드에게 모든 걸 내맡겼으니 물을 것도 대답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정원을 조금 거닐었을까. 눈앞에 가득 피어난 꽃들이 보였다. 그리고 자그맣게 핀 꽃밭 위로 작은 그림자가 앉아 있었다.

“저건….”

이제 막 열셋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는 하녀 옷을 입고 있었다. 아무래도 할리드와 녹스를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아이는 꽃밭에서 꽃을 따고 있었는데 정원은 본디 주인의 소유이다. 그런고로 사용인들은 정원에서 꽃 하나 함부로 딸 수 없었다. 그런데 저 아이는 꽃을 마음대로 두 송이를 꺾어 손에 쥐다가 곧 두 사람을 발견했다.

“헉….”

여자아이가 헛숨을 들이켜며 꽃을 떨어뜨리고 두어 발자국 물러섰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고, 공작님!”

“너는 누군데 내 정원에 들어와 멋대로 꽃을 꺾고 있지?”

“죄, 죄송합니다!”

여자아이는 무릎을 꿇고 겁먹은 얼굴로 빌기 시작했다. 아이의 두 손이 벌벌 떨렸다. 할리드는 조금의 동정심도 없는 얼굴로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녹스는 생각했다. 저건 분명 잘못된 행동이지만 아직 너무 어리다. 그리고 그 무엇도 아닌 작은 꽃송이 두 개였을 뿐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이가 꽃을 꺾은 이유는 있을 터. 녹스는 할리드의 얼굴이 더 싸늘해지기 전에 할리드의 팔을 잡았다.

“주인님.”

녹스가 그를 부르자 할리드는 얼굴을 풀고 녹스를 곧바로 바라봤다. 녹스는 아이가 적당히 빠져 주기를 바랐다. 할리드의 신경을 이쪽으로 돌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던 녹스는 곧 발끝을 들어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췄다. 오로지 입술만이 맞닿는 어린아이 같은 입맞춤이었다. 하지만 할리드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지금까지 몸을 섞으면서 단 한 번도 없었던 입맞춤이었으니까. 그것은 할리드가 피했던 이유가 가장 컸다. 하지만 할리드는 자신이 어째서 입맞춤을 피해 왔는지를 전부 잊어버리고 그의 허리를 낚아챘다.

살짝 벌어진 녹스의 입 안으로 할리드의 혀가 밀고 들어왔다. 입술 안 가득 차는 혀 탓에 녹스는 입을 더 크게 벌려야 했다.

혀끼리 엉키면서 나는 젖은 소리가 제 귀에 들렸다. 할리드는 자신의 혀와 그의 혀가 엉켜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누구의 것 구분 없이 잘근거리며 잇자국을 냈다.

녹스는 입을 맞추며 아이에게 눈짓했다. 아이는 멀거니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자신이 놓친 꽃 두 송이를 소중하게 주워 들고는 냉큼 저 멀리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 작은 발소리가 할리드의 귀에도 들렸으나 할리드는 지금 고작 꽃 두 송이를 훔쳐 간 작은 도둑에게 신경 쓸 틈이 없었다. 하아, 읏. 녹스가 목 안으로 작게 흘리는 신음을 다 받아 삼키느라.

할리드는 제 타액을 삼키기 위해 열심히 목울대를 움직이는 녹스가 너무나도 그래,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할리드는 그렇게 한참을 입을 맞추다 녹스가 헐떡일 때쯤 그를 놓아주었다.

“도둑이 도망갔군.”

“…….”

녹스가 잠시 할리드를 올려다보았다. 할리드는 설핏 웃으며 제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녹스의 입술을 다시금 물어 빨았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내가 도둑을 놓치게 한 대가는 치러야지.”

녹스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리드는 그것이 지독하게 마음에 들어서. 사랑스러워서. 그의 입술을 한 번 더 집어삼켰다. 어릴 적, 지워지지 않았던 그 입맞춤은 이미 저 뒤로 미뤄 둔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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