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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43화 (43/158)

제43화

자신이 했던 일을 후회하는 것은 귀족답지 않은 일이다. 비록 할리드, 그 아이를 그렇게 쫓아낸 것은 두고두고 후회하며 살았지만 어머니의 명예를 위해 여기서 무릎 꿇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녹스는 곧 자신이 귀족이 아님을 상기해 냈다. 그러다 보니 녹스는 잠시 자신이 누군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녹스 라이네리오가 아닌 그냥 녹스.

할리드의 노예이자 황제의 장난감이며 또…, 무엇이 더 있었던가. 녹스는 어떻게든 끊임없이 생각을 이어 나갔다.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 수 없었으며 그도 누군가에게 말을 걸 수 없었다.

지하에 처박힌 방은 문틈으로도 빛이 새어 들어오지 않았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을까. 문득 시간이라는 것을 자각한 녹스는 손끝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나라는 것이 여기 존재하지 않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녹스는 그제야 자신이 어떤 처지에 처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머릿속에서 뇌가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얌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았다.

자신은 이제 인간이 아닌 노예이지만 자신의 어머니는 인간이었고 또 귀족이었다. 결코 그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애썼다. 자신은 잘못하지 않았으며 아무리 노예라도 자신의 어미에 대한 모욕을 받으면 분노하기 마련이었다.

자신은 아직 분노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녹스는 점점 생각에 잠겨갔다. 그렇게 점점 시간은 흘러갔다. 몇 시간, 며칠. 대체 얼마나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오랜 시간이….

* * *

일주일이 지났다.

어느 날 밤, 할리드는 황제의 방에 와 있었다. 한잔 술을 기울이며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정말 형제처럼 보였다. 불을 끄고 달빛이 들이친 방은 푸르게 빛났으며 그들이 따른 술잔 역시 그 비슷한 색으로 반짝였다.

“그래서, 녹스는 아직도 그 지하 방에 있나?”

“그렇습니다.”

“설마 굶기는 건 아니겠지?”

“설마요.”

“그렇담 다행이지만. 자네 고집도 고집이지만 그쪽도 만만치 않군.”

그 말에 할리드가 한숨처럼 숨을 내쉬며 말했다.

“원래, 그런…. 성격이었으니까요.”

“그렇군. 그래 보이기는 했어.”

황제와 할리드는 지금 녹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할리드의 저택 지하에 가두어 둔 노예의 이야기. 녹스 라이네리오. 그는 아직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무슨 소리가 들리냐는 질문에 하인들은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말에 할리드 비아는 늘 좋지 않은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오늘은 황제와 술잔을 기울이기 위해 황궁을 찾은 것이다. 황제가 말했다.

“적당히 하고 꺼내 주지 그러나.”

“적당히란 없습니다. 노예가 후작의 뺨을 쳤습니다. 폐하.”

“그러니까. 적당히 잘못을 인정했다 치고 꺼내 줄 수 있는데 그렇지 않는다는 게 신기하다는 거지. 그래도 꽤 아끼고 있지 않나. 그 노예를.”

“폐하.”

어째선지 그를 꺼내 주라는 듯 부추기는 황제의 음성에 할리드가 미간을 찡그렸다. 황제는 웃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나 같으면 침대 위에서 적당히 혼을 내고 사과를 시키러 갈 것을.”

“고작 그 정도만 혼을 낼 수는 없습니다.”

“고작이라니. 그 노예가 그대를 얼마나 버거워 하는지 잘 알면서.”

할리드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자 황제는 더 이상 그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는 듯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두 남자는 이제 다른 이야기를 꺼내 들기 시작했다.

“그보다 그 얌전한 발티아스 데론이 왜 그 노예를 건드렸을까.”

그러자 할리드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확실히 이상한 점이었다. 녹스 라이네리오는 쉽게 흥분하는 성정이 아니며 발티아스 데론은 손쉽게 누굴 도발할 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니고 고작 노예 하나를 도발해 뺨을 맞는다?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우리가 모르는 게 좀 있을 것 같은데.”

그러자 할리드가 차갑게 일갈했다.

“그걸 알아 무엇합니까.”

그러자 황제가 잔을 내려두며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더 깊은 무언가. 우리가 모르는 게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야.”

그 말에 할리드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짚이는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나 그건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하긴 그가 우리에게 숨기는 것 따윈 없겠지.”

두 사람은 발티아스 데론에게 믿음이 있었다. 같은 사지를 헤쳐 온 자에 대한 믿음.

그것이 거짓인 줄도 모르고.

두 사람은 밤이 깊어지도록 잔을 주고받았다.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자와 술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황제에겐 커다란 축복이었다.

* * *

붉은 커튼으로 장식된 방은 어머니의 방이었다. 하지만 그의 기억 속 어머니의 방은 붉은 커튼이 아니었다. 오히려 밝고 아름다운 상아색이었다. 그래, 저것은 피로 물든 커튼이다.

녹스는 뒤늦게 눈치챘다. 이는 어머니를 지키려 뛰어들었던 하녀들의 피다. 그리고 그녀의 방 가운데 누군가 서 있었다,

발티아스 데론. 그자이다.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손에서 비밀을 알음알음 집어 가던 벌레 같은 자가 검을 들고 서 있었다. 어머니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바닥을 기고 있었다.

평소엔 몸도 일으키지 못했던 어머니가 검을 든 자를 피해 바닥을 기고 있었다. 녹스는 알았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상상임을. 하지만 그 지독한 상상을 멈출 수 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당당하면서도 저를 바로잡겠다며 채찍을 쳤던 그 지독한 모습은 어딜 가고 그녀는 피를 토하며 땅을 짚었다.

“어디를, 감, 쿨럭, 감히….”

“공작 부인이라는 자가 체통이 없구나.”

발티아스 데론은 그녀를 비웃었다. 그녀는 겨우겨우 바닥을 짚고 상체를 세웠다. 그리고 그를 향해 말했다.

“내 아들, 내 아들은 어디 갔지?”

“그대 아들도 얼마 남지 않았어. 아마 그 어리석은 라이네리오 공작과 함께 죽었겠지.”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 없어. 내 아들이….”

그녀는 바르작거리다 피를 토하듯 소리쳤다. 녹스 라이네리오. 그제야 자신을 찾았다. 그녀는 발티아스의 바짓자락을 잡고 말했다.

그 뒤부턴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어머니께서 살려 달라 비는 장면은 그에겐 이 세상에 없는 것과도 같았다. 하지만 발티아스가 말했다.

그녀가 죽어 가는 모습은 벌레와 같았노라고. 녹스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리고 장면이 하얗게 변했다.

그곳은 황궁의 연회 홀이었다. 황태자의 탄신 연회 때, 녹스 그 자신이 이제 막 스물이 되었을 때. 그 당시의 녹스는 거대한 홀 가운데 공작가의 외동아들로서 서 있었다. 그곳이 미래에 제 아버지가 죽어 쓰러지고 자신이 노예가 될 곳인 줄도 모르고.

제2황자는 웃는 건지 이를 악물었는지 모를 표정으로 그 사이에 서 있었다. 어두워. 녹스는 그를 보고 스쳐 지나갔다. 인사를 할 이유가 없었다. 그와는 은밀하게 내통하고 있으니 외부에서 그와 연관이 있어 보이는 행동을 해, 좋을 것이 없었다. 너무 어두워. 그래서 그는 그를 아무런 인사도 없이 스쳐 지나갔다.

2황자의 시선이 그의 뒷모습에 붙어 왔으나 그것을 무시했다. 제발. 그리고 모든 귀족이 서로 어울려 섞여 드는 가운데 얼핏 금회색의 머리카락이 보였다. 녹스는 눈을 크게 떴다. 나를 꺼내 줘. 자신이 아는 머리카락 색이었다.

녹스는 그 자리에서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귀족들이 바라보는 황태자의 방향과는 정반대의 방향을 보면서. 제발. 할리드. 나를. 그 금회색 머리카락을 쫓았다. 녹스는 점점 더 빨라지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귀족들을 헤치며 뛰었다.

그러다 보니 연회 홀을 빠져나와 복도로 향했고. 어두워, 속이 너무. 거기서 모퉁이로 돌아 사라지는 자신보다 조금 작은 금회색 머리카락의 하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할리드, 나를 구해 줘. 녹스는 그를 따라 뛰었다. 하지만 모퉁이를 돌았을 때,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녹스는, 살려 줘. 거친 숨을 헐떡이며, 나를 여기서 꺼내 줘. 그를 다시 찾다가, 차가워. 결국 포기하고. 여긴 너무 어두워. 홀로 돌아왔다. 제발 할리드 날 여기서 꺼내 줘. 여긴 너무 차갑고 어두워. 제발, 제발, 제발. 할리드. 제발.

녹스는 눈을 떴다. 아니 아까부터 눈은 뜨고 있었다. 너무나 어두운 나머지 자신이 눈을 감고 있다고 생각했다. 녹스는 문득 자신의 손톱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이 아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피비린내가 났다.

녹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신이 문 앞에 와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손톱 끝으로 문을 긁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알아차렸다. 하지만 거친 문이 손끝을 다 헤집어 놓을 동안 그 누구도 답을 하지 않았다.

꺼내 줘.

살려 줘.

하지만 대답 따위는 없었다. 할리드는 이 지하로 내려와 보지 않는다. 이곳엔 녹스 자신뿐이었다. 문을 긁던 와중 누군가 물어 왔던 것 같았다.

‘네 잘못을 인정해?’

아니, 아니. 조금도.

‘그럼 어쩔 수 없네.’

그렇게 목소리는 떠나갔다. 누구의 목소리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할리드의 목소리였나 아니면 어느 하인의 목소리였나. 아니면, 어릴 적 나를 사랑하던 그 아이의 목소리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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