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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22화 (22/158)

제22화

“어쩜, 저렇게라도 목숨 줄을 유지해서 다행인 건지.”

어느 귀부인이 지나가며 속삭였다.

“꼴 좋군.”

어느 가문의 후계자가 지나가며 톡 쏘았다.

“그렇게까지 해서 살고 싶었나 보지?”

라이네리오 가문은 적이 많았다. 아버지와 함께 놀아났던 작자들은 그날 다 죽었고 남은 것은 오로지 적뿐이었다. 대항할 힘 없는 노예 신세로 전락한 라이네리오의 하나뿐인 후계자는 그들이 뜯어먹기에 너무나 좋은 먹잇감이었다. 녹스는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황제의 시종을 따라 걸었다. 그렇게 가다 보니 저 멀리 회색빛의 금발을 한 남자가 보였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크고 단단한 어깨를 가진 제 주인이. 녹스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어쩐지 숨이 막혔다.

귀족들은 지금 홀로 걸어 들어오고 있는 한 남자를 보고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다. 라이네리오의 유일한 적통이었던 남자. 하지만 지금은 노예 신세가 된 그 남자를. 녹스 라이네리오는 귀족의 표본이었던 남자다. 노예가 된 지금도 곧게 세운 허리, 이런 상황에서도 굽어지지 않은 어깨. 당당히 앞을 보는 시선. 그 무엇 하나 노예라는 말에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목에 달려 있는 볼로 타이는 그가 노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 주고 있었다.

그들은 더욱 수군거렸다. 뱀의 자식이었던 그를 누르기 위해서. 비웃고 헐뜯고 비난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향한 비난에도 귀 기울이지 않고 오로지 앞만 보고 걸었다. 그 무엇도 자신에게 흠집 낼 수 없다는 양.

그리고 그런 그를 바라보는 할리드는 속이 뒤틀렸다. 그 무엇도 흠집 낼 수 없을 것 같은 남자. 자신의 유일한 빛이었던 그. 이젠 자신의 소유가 되었건만 그 무엇도 자신을 소유할 수 없다는 듯 곧게 선 남자가 미웠다.

녹스는 곧게 걸어 할리드의 곁에 닿았다. 할리드는 곧바로 손을 들어 그의 머리채를 잡았다.

“윽….”

“명령한 지가 언젠데 이제야 기어오지?”

“다른, 명령이 없으셔서 대기를….”

“앞으로는 무조건 내 곁으로 와. 어디서 헛짓거리하지 말고.”

“알겠, 습니다.”

두피가 당겨지는 고통에 녹스가 더듬더듬 말했고 할리드는 그의 코앞에서 으르렁거렸다. 홀 안의 모두가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녹스는 이를 악물고 주변에 눈 돌리지 않기 위해 애썼다. 할리드는 녹스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잡았던 머리채를 놓아주었다.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던 머리가 흐트러졌다. 황제, 펠티온은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

“애첩이라더니 지나치게 잡는 것 아닌가.”

“신경 쓰지 마십시오.”

“눈앞에서 머리채를 잡아 놓고 신경 쓰지 말라니.”

할리드의 옆에 서 있던 펠티온은 미간의 찌푸림 하나 없는 녹스를 바라보다 손을 뻗었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있다는 걸 안다는 듯 그의 입술에 엄지를 대고 문질렀다.

“그대의 어여쁜 노예가 긴장하지 않았는가.”

“……그렇습니까.”

“그래.”

황제는 녹스의 어두운 암녹색 눈동자를 보며 더욱 짙게 웃었다.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얼굴이야.”

“…….”

녹스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황제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저 품평하는 말이래도. 녹스가 입술을 달싹이자 손가락 끝이 입술 안쪽으로 조금 침범했다. 황제는 손을 치우지 않았고 녹스는 결국 천천히 대답해야 했다. 발음할 때마다 손가락 끝에 혀끝이 스쳤다.

“…감사, 합니다.”

“제법, 노예 노릇을 잘하나 보군.”

칭찬에 감사하다고 대꾸하는 걸 보면. 황제는 그를 어여쁘게 본다기보단 아주 조금, 비웃고 있었다. 녹스는 그 노골적인 행동을 잘 인지하고 있었기에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황제는 그렇게 녹스의 입술을 만지작거리다 이내 손을 떼어 냈다. 그리고 할리드에게 농담하듯 말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길들이기 힘들다면 도움을 줄 용의는 충분히 있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할리드는 심드렁하게 말했고 녹스는 입을 다문 채 그의 곁에 얌전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두 권력자가 노예 하나를 두고 이리저리 말을 주고받으니 사람들의 시선은 더욱 몰려들 수밖에 없었다.

할리드는 이런 연회에 익숙하지 않지만 황제의 명을 받아 이 자리에 나온 참이었다. 귀족들은 전부 모르는 얼굴들이었고 그들이 나누는 대화에도 그다지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이 녹스에게 노골적으로 꽂혀 있는 게 만족스러우면서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보아라, 너희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던 자가 이리 내 발아래 있다. 그 치욕스러움을 감내해야 하는 녹스의 처지는 만족스러웠으나 그의 몸이, 곧게 선 허리가 그리고 설핏 드러나는 발목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 안에 들어가는 것은 미친 듯이 거슬렸다.

“그럼, 여기까지 왔으니 잘 해 보게.”

황제는 할리드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할리드는 콧잔등을 잔뜩 찡그렸다. 이 자리는 황제의 즉위를 축하하는 연회임과 동시에 용병 출신이었던 할리드가 귀족들과의 자리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황제가 만든 자리이기도 했다. 녹스는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는 대신 뒷짐을 지고서 할리드의 뒤에 얌전히 서 있었다. 황제가 그들에게서 떨어지자 귀족들이 길을 내었다. 함부로 먼저 말을 건넬 수 없는 사람. 그것이 황제이다. 황제는 자연스럽게 먼저 말을 건네었다.

“어딜 갔나 했더니 여기 있었군.”

“찾아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엘러딘 바이스. 그의 책사 노릇을 하던 자였다. 황제는 순서대로 자신의 뒷심이 되어 주었던 귀족들을 하나둘 불러들여 무리를 이루었다. 할리드는 그 꼴을 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리고 다른 쪽으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귀족들이 그를 피해 똑같이 길을 내었다. 녹스는 그를 따르며 생각했다. 할리드 비아 공작은 귀족 사회에 끼기 어려워한다.

할리드는 본디 작위를 가지고 있던 자가 아니었다. 그러니 당연히 귀족 사이의 예법도 잘 모를 테고 아는 얼굴도 없을 테다. 녹스는 천천히 시선으로만 주변을 훑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할리드를 불렀다.

“주인님.”

“뭐지?”

할리드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녹스는 잠시 고민했다. 자신이 이렇게 말을 얹어도 되는 상황인지를. 하지만 만약 그가 자신의 쓸모를 알게 된다면, 그렇다면 어쩌면 무언가 제게 일을 주지 않을까 생각했다. 수조에 갇힌 물고기처럼 온종일 허공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사람’처럼 무언가 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자그마한 소망. 녹스는 그 소망을 담아 조심스럽게 조언하기 시작했다. 할리드의 귓가로 다가가 손등으로 입술을 가리고 속삭였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자는 베란체 백작입니다. 서부에 금광을 소유하고 있고 수도로 들어오는 금의 3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그러니 친분을 만들어 두시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겁니다.”

그 말에 할리드가 묘한 눈으로 녹스를 바라보았다. 녹스는 자신을 바라보는 할리드의 눈에 잠시 침묵을 하다가 뒤늦게 덧붙였다.

“만약 주제넘었다면….”

“지금 내게 조언한 건가?”

“예, 그렇습니다만….”

할리드는 기묘한 기분이 들어 그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노예. 언제든 막 대해도 되는 존재. 그리고 자신에게 조금의 존중도 받지 못하는 존재. 그런 그가 자신에게 조언했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자신을 조금도 존중하지 않는 자에게 조언을 한다는 건 무슨 기분이지? 할리드는 묻고 싶었으나 곧 입을 다물고 녹스가 말한 베란체 백작에게 다가갔다. 그의 말이 거짓일 리는 없었다. 어차피 거짓말 이래 봤자 금방 들통날 테니까.

귀족들은 새롭게 나타난 공작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가 다가오자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며 그를 받아들였다.

“공작님께 인사 올립니다.”

“어서 오십시오. 공작님.”

그들에게 새로운 공작이란 기존 권력 구도가 바뀐 지금 그 무엇보다도 탐나는 존재였다. 연을 만든다면 새로이 황제가 된 펠티온에게도 다가갈 수 있을 테니. 녹스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는 할리드를 보곤 잠시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다.

어차피 그들은 할리드에게 호의적이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선 그의 환심을 살 필요가 있을 테니까. 그가 평민 용병 출신이라는 것은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할리드 또한 천치는 아니기 때문에 적당히 처신할 수 있을 거다.

녹스는 자연스럽게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섰다. 저 대화에 노예인 자신은 끼어들 수 없었다. 할리드는 녹스를 흘끔 보더니 이내 귀족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녹스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아무도 찾지 않는 물건이 된 것처럼 서 있었다.

사람은 많고 주위는 소란스러우나 녹스는 말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입을 다물고 가만히 시선을 내렸다. 자신을 향해 속닥거리는 소리는 끊임없이 들렸다. 녹스는 자신이 저 칼날 같은 말들에 괜찮은지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나 고민은 짧았다. 결론은 금세 났으니까.

괜찮지 않아도, 그는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날 뒤로 괜찮았던 적이 없었으니까.

“공작님께서 전 황제 폐하를 시해한 반역자의 목을 직접 치셨다지요?”

“현 황제 폐하의 오른팔과도 같은 분 아닙니까.”

“공작 각하. 다음에 저희 가문에서 연회가 있는데 부디 참석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들은 할리드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지저귀었다. 녹스는 그에게 알랑거리는 자들의 면면을 하나하나 봐 두었다. 누구와 어울리고 누구와 어울리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하기 위해서였다. 할리드는 강건하나 아직 귀족 사회를 잘 몰랐다. 무조건 다가오는 귀족들을 받아들이기보단 그에게 힘이 되어 줄 자를 잘 골라내는 게 지금 현시점에서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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