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냐 내 최애를 죽인 게 (87)화 (87/88)

#87

“그렇죠?”

“그럼 조만간 가겠네? 졸업하고 가나?”

“어… 글쎄요? 저도 아직 안 정했어요.”

“그래?”

저 새끼, 한도윤이 했던 것처럼 군대 가기 직전에 고백하겠네. 한 70%의 확률로 장담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군대 얘기를 꺼낸 순간 정태원의 동공이 미묘하게 흔들리며 애매하게 씁쓸한 미소를 지었거든. 한도윤도 눈물 뽑기 직전엔 딱 저런 표정이었다. 친구는 닮는다더니 이딴 것도 닮네.

“자, 그럼 너희 이제 가라. 설거지는 내가 알아서 할 거야.”

“잘 놀다 갑니다아. 야, 영상 꼭 지워! 안 그럼 진짜 가만 안 둬!”

“즐거웠어요. 한도윤 제대하면 또 놀러 올게요!”

“오지 마.”

마지막까지 찐친 포텐을 터트리며 사라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띠리릭,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깊게 숨을 내뱉은 나는 아직까지 뻐근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스트레칭을 했다.

드디어 힘겨웠던 시간이 지나갔다. 이제 진짜 한도윤이랑 푹 쉬어야지. 아, 물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하라 했으니 그거는 같이하고. 소파에 함께 앉아 평화로이 TV를 봤다. 중간중간 재밌는 게 나오면 크게 웃으며 저 장면은 재밌지 않냐고 얘기도 하고, 또 영화 한 편을 끝낸 뒤에 서로의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내가 먼저 말하면 한도윤이 나한테 맞춰 말할까 봐 일부러 그의 생각을 먼저 들은 뒤 입을 열었는데, 때마침 나와 같은 부분을 즐겁게 봤다는 것을 알고 무척 기분이 좋아졌다. 소소하다면 소소하고 사소하다면 사소한 일이 이렇게 즐거울 줄 몰랐다.

“확실히, 혼자서 게임이나 할 때랑 많이 다르긴 한 거 같아.”

“뭐가요?”

“그냥 별거 아닌 일도 재밌어.”

내 말에 한도윤이 곱게 웃으며 나를 조심히 끌어안았다.

“저도 그래요. 좀 별로인 모습이었지만 그때 그렇게라도 고백해서 다행이라 생각해요.”

“나도. 그때 나가서 다행이었지.”

스스로의 마음을 늦게 깨달았다면 아마 크게 후회했을 것이다. 연락이 끊긴 후에야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먼저 말이라도 꺼내 볼걸, 하고 계속 후회하며 떠올렸겠지.

“어려웠을 텐데 먼저 말해 줘서 고마워.”

“그건 제가 할 말 같은데요? 받아 줘서 고마워요.”

그렇게 사이좋게 영화 한 편을 추가로 더 본 뒤, 잠시 잊고 있던 것을 떠올린 나는 영화 얘기를 하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아까 걔네 가고 난 다음에 말해 주기로 한 거 있잖아. 그러고 보니 그걸 말 안 했더라고.

“문영윤이랑 정태원 무자각 맞관이야.”

“예? 그게 뭐예요?”

“서로 좋아하는데 지들은 모르고 있는 거. 맞짝사랑 같은 건가 봐. 나도 베타 누나한테 들었어.”

“…그거 우리도 그랬잖아요.”

“그니까. 친구라고 그딴 것도 닮는 모양이더라?”

한도윤이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어, 저 표정을 지으면 꼭 정태원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하던데.

“입영 신청하고 나중에 가서 질질 짜면서 좋아했다고 고백하겠네요. 친구는 닮는다고 하니까.”

“그거 자랑 아닌데.”

“…그, 건, 알지만…. 말이 그렇다는 거죠.”

헛기침을 흘리며 화제를 전환하려는 한도윤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고 대답하자, 그 대답을 들은 한도윤 또한 마주 웃으며 둘이 어떻게 될지 열심히 수다를 떨었다. 어느 쪽이든 재밌을 거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역시 너도 나랑 똑같이 생각해?

(4)

시간은 흐르고 흘러, 한도윤이 제대했다. 그사이 몇 차례 더 휴가를 나온 그는 나올 때마다 나와 만나며 즐겁게 시간을 보냈고, 그동안 미뤄 뒀던 인게임 결혼 시스템인 영혼의 서약까지 끝내 게임에서조차 커플이 되었다.

나와 한도윤이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길드원들은 뒤늦게야 축하 인사를 보내며 행복하라는 말을 남겼고, 그에 나와 한도윤은 진짜 결혼하는 것도 아닌데 반응들이 너무 웃기다며 큰 소리로 웃음을 흘렸다. 아주 그냥 개그맨들이라니까.

마지막으로 내가 살던 원룸의 계약 기간이 끝나자마자 한도윤과 동거까지 시작했다. 너무 못 볼 꼴을 보이는 건 아닌가 싶어 동거까지는 힘들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과 달리, 나날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형, 오늘도 방송 할 거예요?”

“그래야지.”

학교를 졸업한 후 운 좋게 게임 회사에 취직할 수 있었던 나는 게임 기획자로서 나름대로 열심히 업무를 진행했으나 취미와 현실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짧은 기간이었어도 기획자가 하는 일, 업무에 필요한 것들에 대해서 배울 수 있었기에 만약 다시 회사에 들어가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때는 제대로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한 번은 그만둘 수 있어도 두 번은 그만두고 싶지 않으니까.

그렇게 새로이 찾은 직업은 인터넷 방송이었다. 처음 정태원의 도움을 받아 방송을 시작했을 땐 취미나 다름없었다. 방송 시간은 물론 방송하는 날도 불규칙했으며 무엇보다 영상을 편집해 올리는 일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지도도 없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무슨 일을 할까 고민하는 도중 취미 삼아 했던 인터넷 방송을 다시 떠올렸다. 정태원과 당시 휴가를 나온 한도윤의 도움을 받아 본격적으로 스트리밍 쪽에 발을 디뎠다. 몇 번을 해도 익숙해지지 않았으나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하다 보니 안 되는 건 없더라.

게임 기획자가 되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내가 게임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는데, 인터넷 방송은 내가 직접 게임을 플레이하며 그 반응을 시청자들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보니 내 스스로의 즐거움이 높아서 만족스러웠다. 적어도 기획을 어찌해야 하나 머리를 싸매지는 않아도 되니까 더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오늘 합방할까요?”

“안 돼. 나 오늘 공포 게임 해야 한단 말이야.”

“공포 게임이요? 형… 공포 게임 무서워했어요?”

마치 내가 아는 너는 그렇지 않은데 설마 쫄보였냐고 묻는 듯한 표정에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미안하지만 나는 공포 게임이든 공포 영화든 실제 담력 시험을 하겠다며 폐가를 들어가든 쫄지 않는 강심장의 소유자였다. 아마 한도윤이나 시청자들이 원하는 리액션은 안 나올 거다.

“뭐…. 가 보면 알겠지.”

현재까지 방송하며 여러 종류의 게임을 진행해 왔으나 공포 게임을 방송에 써먹은 적은 없었다. 혼자서 해 본 게임은 몇몇 개 되긴 하고. 대학생 때 하도 잘 만든 공포 게임이 있다고 하길래 나중에 포폴에 써먹으려고 플레이해 봤었지.

그럼에도 굳이 이번에 공포 게임을 하는 이유는, 저번에 방송할 때 미션이 걸렸는데 안타깝게도 실패하는 바람에 벌칙으로 공포 게임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벌칙을 확인한 순간 내 눈을 의심했으나 겁이 없는 성격이었기에 쿨하게 벌칙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그날 방송은 끝이 났다.

“무슨 게임 할 거예요?”

“미로 정원.”

새롭게 출시된 ‘미로 정원’이라는 게임은 제목 그대로 미로로 된 정원을 빠져나가는 게임이었다. 다만 인게임 시간대가 밤이라는 점과 언제 어디서 등장할지 모르는 귀신 때문에 심장이 쫄깃해지는 게임이었다. 배경 틈틈이 핏자국과 시체 같은 것도 보인다는데, 아직 안 해 봐서 무서운진 모르겠다.

“나 그럼 하러 간다? 이따 봐.”

“구경 갈게요!”

“넌 네 방송 해야지.”

“에이…. 그럼 내 방송에서 형 방송 켜 놓고 시청자들이랑 같이 보죠, 뭐.”

“마음대로 해라.”

백날 그래도 네가 원하는 장면은 안 나올 테니까. 어깨를 으쓱이며 방음 부스가 설치된 방송용 방에 들어간 나는 곧바로 컴퓨터를 세팅하고 방송을 켰다. 아직 팔로워도 그렇고 시청자도 많은 수준은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꾸준히 보러 와 주는 친구들이 있어 가볍게 인사를 날렸다.

“어, 왔어요? 오늘 저번에 미션 실패 벌칙으로 공포 게임 하라고 해서 공포 게임 가져왔어요. 아마 너희도 알걸? 미로 정원이라고 이번에 나온 게임 있잖아.”

[그거 진짜 무섭다던데 ㄷ;]

[곧죽형 괜찮겠어?]

[안 갠차나도 해야지]

“그렇지. 안 괜찮아도 해야지. 근데 어제 차마 말을 못 했는데, 내가 겁이 좀 없어. 그래서 너희가 생각하는 반응은 아마 안 나올 거예요.”

[그걸 왜 이제 말함?]

“내가 쫄 줄 알고 설레어하는 게 웃겨서.”

[인성;;;]

[ㄹㅇ 성격어디안간다]

“띄어쓰기나 해라.”

그걸 이제 알았냐? 나는 채팅에 적당히 대꾸해 준 뒤 게임을 실행시켰다. 시커먼 화면이 지속되는가 싶더니 이내 붉은 피가 팍, 하고 튀며 미로 정원의 영어 로고가 자연스럽게 나타났다. 와, 시작부터 연출 괜찮은데? 본격적으로 시작하면 더 좋은 연출이 나오겠지?

“자, 이제 시작한다. 음…. 스토리가 일단 그거네요. 귀신에 홀려 정원에 오게 된 플레이어가 정원의 숨겨진 비밀을 밝혀내고 귀신을 피해 미로를 빠져나간다. 정석이네.”

스토리도 색다를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아쉬운 마음을 조심스럽게 삼킨 뒤 앞으로 일단 질주했다. 비밀을 풀어야 한다고 하니, 아마 암호라든가 퍼즐 같은 게 있을 확률이 높다. 고로 이왕이면 주변 곳곳을 뒤지며 비밀을 풀 수 있는 흔적을 찾아야 한다는 거다.

“어디서 발소리 들리는데, 이게 귀신이랑 가까워졌다는 건가. 이건 좀 뻔하다.”

[아니 진짜 왜 안 쫄지??]

[보통 스트리머들 발소리만들어도 쫄든데;]

[곧죽이 강심장이네]

“이걸로 쫄기에는 좀. 내 이미지가 어떤진 알겠는데 저 그렇게 쫄보 아니에요. 니들보다 훨씬 겁 없어요.”

귀신을 피해 열심히 수색을 진행하는 사이, 문득 나중에 한도윤과 귀신의 집을 가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걔도 생긴 것만 보면 겁이 없어 보이기는 하는데, 혹시 모르지. 술도 잘 마실 것처럼 생겨 놓고 못 마시잖아. 의외로 겁이 많을지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