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이게 참 애매하단 말이야. 4인분이라고 무작정 4배를 했다가 짜면 어떡해? 그동안 요리 실력이 많이 늘었다고는 해도 아직까지 해 본 적 없는 요리는 계량이 제일 어려웠다. 따라만 하면 되게끔 내가 원하는 만큼의 양을 정확히 써 둔 조리법을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렇게 머릿속으로 어느 정도로 간을 맞춰야 할지 열심히 계산해 가며 해장국을 끓였다. 보글보글 끓는 해장국의 냄새는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속이 시원해지는 게 잘 뽑혔다고나 할까? 냄새보다 중요한 건 역시 맛이기 때문에 한 입 먹어 보며 간을 확인했다.
“…어우, 짜.”
뭔데 이렇게 짜? 시키는 대로 했는데 짜면 어떡해? ‘레시피가 쓰레기네!’라고 생각하기도 잠시, 염전이 되어 버린 해장국을 소생시키기 위해 추가로 물을 부으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진짜 미칠 것 같다. 왜 이러지? 물을 넣으면 싱겁고 물을 안 넣으면 짜고. 어느 장단에 맞추라고?
“와아…. 시간 보니까 곧 있으면 해 뜨겠는데?”
현재 시각은 오전 5시. 앞으로 약 40분 후면 해가 뜬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5시 40분 이후부터 해가 뜨기 시작한다고. 동해안은 더 일찍 뜨겠지! 해가 뜨면 얘들이 일어날 텐데, 이따위 해장국을 먹여야 한다니! 돌아 버리겠는 머리를 거칠게 헤집으며 다시금 심폐 소생술에 들어갔다.
그렇게 겨우겨우 간을 맞추고 먹음직하게 만든 해장국은… 그 양이 불어날 대로 불어나 4명 이서는 도무지 끝낼 수 없는 양이 되었다. 이거… 언제 다 먹지? 애들한테 집에 가서 먹으라고 싸 줘야 하나?
흐릿하게 웃으며 냄비 뚜껑을 닫은 나는 거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세 명의 실루엣을 보며 천천히 방으로 들어갔다. 너희는 맨바닥에서 자든가. 나는 침대에서 잘 거야. 보일러는 제대로 틀어 뒀으니 적어도 입은 안 돌아가겠지. 애인이고 나발이고 이럴 때는 그런 거 없어. 내가 너를 어떻게 들고 옮기니. 알아서 살아남아라. 그게 바로 야생의 법칙이다.
(3)
한참을 퍼질러 자고 일어난 나는 뻐근한 몸을 일으키며 길게 하품을 했다. 얼마나 잤는진 몰라도 본의 아니게 밤을 새워 버렸다 보니 피곤하긴 엄청 피곤하다. 세수를 하기 위해 침대 밖으로 나와 방문을 여니 밖에서 달그락하는 식기 소리가 들렸다. 이 새끼들, 일어나자마자 밥부터 먹나 보네.
“너희 언제 일어났냐.”
“방금…?”
“어으… 나 죽을 거 같아….”
“죽든지.”
재차 늘어져라 하품을 하며 다 죽어 가는 세 명의 뒷모습을 슬쩍 흘기고 화장실로 들어가 세안을 했다. 비누칠까지 하며 깔끔하게 세안을 마친 나는 물기를 닦으며 밖으로 나가 깨작깨작 해장국을 먹는 놈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입에는 좀 맞냐?”
“너 해장국 잘 끓이더라. 어디서 배웠어?”
“인터넷이 알려 줬는데?”
“와, 대박이네. 근데 왜 저렇게 많이 했어?”
“……그냥.”
차마 간을 맞추겠다고 지랄하다 양이 불어났다는 소리를 할 수 없었던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많으면 많이 먹을 수 있으니 좋지 않냐는 개소리를 했다. 웃긴 건 이놈들이 아직 제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는지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는 점이다.
“넌 안 먹어?”
“어제 먹은 거 아직 소화도 안 됐어.”
“좋겠다…. 나는 뱉어내서 텅텅 비었는데.”
…이 새끼? 언제 토한 거지?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며 문영윤이 토한 자리를 찾았다. 일단 거실은 아니고…. 화장실에다 게웠나? 어디인 거지?
“야…. 그래도 변기에 했어…. 청소는 못 했는데 그래도 문제는 없거든?”
“뭐래. 너 때문에 화장실에서 아가리 똥내 나게 생겼잖아. 어느 화장실 썼어?”
“저쪽에 있는 화장실.”
“어쩐지. 나 세수하고 나온 데에서는 별 냄새 안 나더라.”
변기를 청소하기 위해 화장실 안으로 들어선 나는 들어서자마자 훅 들어오는 썩은 내에 코를 붙잡으며 고무장갑을 꼈다. 같은 걸 먹었는데 냄새가 왜 이런 거야? 위에 들어갔다 나와서 그래? 위액이 묻어서 이런 냄새가 나는 거야?
이를 갈며 열심히 변기를 청소하고 이어서 방향제를 사용해 공기 중의 냄새도 없앴다. 남의 집에서 이런 민폐를 다 끼치냐. 쟤가 좋다는 정태원을 이해할 수 없는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나 버렸다.
고무장갑을 원래 위치에 두고 나온 나는 여전히 꾸역꾸역 밥을 처먹고 있는 문영윤의 뒤통수를 노려보고 이내 한도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맥주 한 캔 마시고 골로 가서 뭔 얘기를 할 수도 없었던 우리의 한도윤 씨. 그거 먹고 숙취에 절어 버린 모습을 보니 참으로 안쓰럽구나.
“너는… 왜 그렇게 술을 못 먹니….”
“그러게요…….”
“생긴 건 참… 양주 스트레이트로 먹을 거같이 생겼는데….”
콩깍지 쓰인 눈으로 ‘이것이 바로 갭모에다.’라고 생각하려 해도 맥주 한 캔은 너무 심했다. 밤새 생각해 봤지만 역시 너무 심했다. 그렇다고 못 먹는 술을 늘게 할 방법도 마땅찮아서, 그냥 앞으로 한도윤이 술 마실 일이 생기면 내가 대신 마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확히는 누군가가 강제로 퍼먹이려고 할 경우 말이다.
“너는 밖에 나가서 절대 술 먹지 마.”
“네….”
“남친 관리하냐?”
“너도 밖에 나가서 웬만해선 술 먹지 마라. 마실 때 마시더라도 적당히 마셔. 어제 네가 상모를 얼마나 열심히 돌렸는 줄 알아? 목 안 아프냐?”
“어쩐지 일어나는데 모가지가 비틀어질 거 같더라.”
과한 동작으로 고개를 좌우로 꺾는 문영윤을 한 번, 그런 문영윤을 바라보고 있는 정태원을 한 번 흘겨본 나는 떨떠름한 표정과 함께 시선을 돌렸다. 쟤네 둘은 그냥 신경을 안 쓰는 게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될 거 같아.
침대 머리맡에 두고 왔던 핸드폰을 꺼내 문영윤과의 개인 톡방에 들어간 나는 녀석이 어제 신명 나게 돌려 댔던 상모 영상을 보냈다. 물론 혹시라도 다른 게 들어갔을까 봐 한 번 검수도 했다. 음, 문제 될 거 없군. 전송 버튼을 누르자마자 채팅 옆의 1이 사라지고, 문영윤이 헐레벌떡 내 쪽으로 달려왔다.
“야! 왜 이딴 걸 찍어!”
“왜? 잘 돌리드만.”
“와중에 박수 치고 있는 게 더 빡쳐! 얼른 지워!”
“쉬른데?”
안 지울 건데? 핸드폰을 꽉 쥔 채 초조하게 눈동자를 굴리는 문영윤을 보며 무언가 촉이 왔다. 정확히는 데자뷔라고 해야 할까? 저런 식으로 눈동자 굴리는 양반을 어제도 본 거 같은데 말이지?
“너 혹시 태원이….”
“스톱! 거기까지! 그 이상 말하면 진짜 죽인다!”
“와…….”
나 이 상황 베타 누나한테 인터넷 용어 들은 거 있어. 이거 딱 뭐시기냐, 무자각 맞관이라는 거야. 서로 마음이 있는데 서로 못 알아채는 상황을 무자각 맞관이라 한다고 들었다. 어쩌다 듣게 됐냐면, 나와 한도윤이 딱 그 짝이었다며 베타 누나가 너네는 무자각 맞관이드라, 하고 알려 주었다.
둘 중 한 명에게 너희 사실 그거야, 하고 알려 줄까 말까 잠깐 고민했다. 그러나 썸 타는 놈들에게 참견하는 순간 엿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떠올리고 그저 흐릿하게 웃으며 문영윤의 어깨를 두드렸다. 뭐, 힘내라.
“…뭐야, 왜 이래?”
“그냥 한번 해 봤어.”
별거 아니니까 그냥 넘어가면 돼. 나중에 가서 왜 안 알려 줬다고 지랄만 하지 말아다오. 그렇게 방을 빠져나온 나는 열심히 해장국만 드링킹하고 있는 정태원을 향해 짠한 시선을 보냈다. 진짜 너는 어쩌다 저런 거한테 걸려서 인생 낭비를 하고 있니. 그래도 맞관이라니까 힘은 내고. 파이팅.
“형? 왜 그래요?”
“별로 알고 싶지 않은 걸 알아 버려서 그래. 별거 아니야. 너한테는 나중에 따로 말해 줄게.”
“야, 야야야야! 말하지 말라고!”
“우리 애는 남한테 뒷말 안 옮기고 다녀서 괜찮거든?”
한도윤이 고개를 기울이며 무슨 얘기인지 궁금해했으나 착하게도 직접적으로 물어보지는 않았다. 역시 내 새끼야. 한도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쟤들 다 가면 말해 줄 테니 밥이나 먹으라고 하자, 환하게 웃으며 이미 다 먹었다고 말하는 걸 보니 괜히 뿌듯해졌다.
“맛은 괜찮았어?”
“당연하죠. 진짜 맛있었어요.”
“다행이네. 오늘은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음…. 생각해 봐야 할 거 같아요.”
“천천히 생각해. 같이할 수 있는 거면 같이해 줄 테니까.”
“정말요?”
말만이라도 기쁘다며 한도윤이 환하게 웃는다. 말만이라니. 이런 걸 왜 말만 하고 말겠어. 최대한 해 줄 수 있는 건 다 해 줄 생각이라고.
“꼴값들 떤다.”
“솔로는 조용히 하시고.”
“…스벌.”
꼬우면 고백 때리든가. 혹시 아는가, 둘이 사귀게 될지. 장담컨대 문영윤이 연애하기 시작하면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거다. 평소 저 새끼가 주접 떠는 걸 생각해 봐라. 그것만으로도 앞날은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생각하니까 기분이 좀 더럽네.”
“무슨 생각 하셨는데요?”
“어…. 쟤들 다 가면 말해 줄게.”
“야, 정태원. 너 이제 집에 가라.”
“저거 저거 연애하더니 친구를 아주 그냥 버려 버리네?”
“커플 싹 다 지옥에 떨어졌으면….”
“네, 다음 솔로.”
“개새끼….”
문영윤의 중얼거림에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러니까 아까 제가 속으로 말했잖아요. 꼬우면 고백하라고. 뭐, 저 녀석 성격상 정말 확실하다고 느끼지 않는 이상 선고백은 안 할 거다. 고백이 오는 걸 기다리거나 아니면 쌍방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고백하겠지. 문영윤의 연애를 몇 번 봐 온 입장에서 통계상 확실했다.
다만… 통계가 전부라는 아니라고나 할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것이 인생이기에, 무엇보다 세상에 변수라는 게 존재해서 어떻게 될지 조금 궁금해졌다. 과연 누가 먼저 고백할까. 아니면 조용히 마음을 접는 거로 끝을 낼까. 다 먹은 그릇을 치우는 정태원에게 시선을 던졌다.
“쟤 아직 군대 안 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