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작게 헛기침을 하며 맥주 캔을 들어 올린 나는 그래도 첫 잔은 역시 건배를 해야 하지 않겠냐며 캔을 쭉 내밀었다.
그러자 한도윤과 정태원은 나를 따라 캔을 들며 건배를 준비했고, 문영윤은… 아가리에 시동을 걸었다. 정말 아니꼽고 고깝다는 표정과 함께 너는 그래서 안 된다는 시선으로 쯧쯧쯧 하고 혀를 차는데 그게 어찌나 짜증이 나는지….
“와, 꼰대! 박정우 애들 데리고 꼰대 짓 하네!”
“…진짜 뒈질래?”
“어이구야! 너랑 나랑 싸우면 내가 이기는 데 괜찮겠어?”
“여기 내 대리 기사 있거든?”
“…얘랑 싸우게 하는 건 선 넘었지!”
슬쩍 손으로 한도윤을 가리키자 문영윤이 고개를 살짝 뒤로 빼며 한발 물러섰다. 선을 넘다니! 엄연히 합법적 대리 기사인데! 내가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맥주를 마시자 이를 간 문영윤이 정태원을 끼워 넣으며 강제 팀전을 만들었다.
“그럼 나는 얘랑 팀! 2대 2 가 보자고!”
“뭐지. 굳이 그래야 하는 이유가?”
“저는 좋은데요?”
예? 정태원이 부드러이 웃으며 문영윤의 편을 들었다. 와, 배신감! 그래도 방송 관련으로 이것저것 얘기 나누면서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이렇게 되네! 물론 겸사겸사 문영윤이랑도 친해지긴 했겠지만! 방송 도움을 받는 도중 문영윤과 몇 번 마주치기도 하고 다 같이 술 마시러 간 적도 있었으니까.
“뭐로 싸울 건데.”
“게임…?”
“컴퓨터 두 대밖에 없는데?”
“피시방을 가면 되잖아.”
“치킨이랑 맥주를 이렇게 쌓아 두고 지금 피시방을 가겠다는 건 아니지?”
“그럴 리가! 먹을 거 다 먹고! 마실 거 다 마신 다음에 가야지!”
“그래?”
그럼 끝났네. 문영윤의 호기로움 외침에 나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웃었다. 너희가 정녕 이 술들을 다 마실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거 같더냐? 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그 자리에서 넉다운 된다에 올인할 수 있다고.
“술찐 새끼들이 말도 많고 탈도 많기는. 어디 한번 해 보시지.”
“나중에 가서 후회하지 마라?”
“내가 할 후회는 왜 술을 처먹여서 내가 뒤처리를 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었나 뿐이야.”
너네 같은 알코올 쓰레기 새끼들한테 질 정도로 내 간의 해독 능력이 쓰레기는 아니란 말이야. 나는 의기양양하게 캔을 들어 올려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했다. 비워지는 캔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주변은 빈 캔투성이가 되었고, 이것들을 치울 생각에 머리가 아파 왔으나 여기서 질 수는 없었기에 끝까지 술을 마셨다.
“야, 아직 살아 있냐?”
“아, 어어아, 아직, 살아 있거드으으으은!”
“그래? 그럼 더 마시자.”
“그으으래! 가자고!”
술에 취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문영윤은 상모를 돌리는 것처럼 머리를 이리저리 신명 나게 돌려 댔다. 이야, 이거 딱 영상 촬영해서 나중에 골려 먹을 때 쓰면 딱일 거 같은데. 문득 떠오른 생각에 살짝 웃으며 핸드폰을 꺼낸 나는 문영윤의 모습을 남몰래 영상으로 남겼다. 재밌는 건 한도윤과 정태원의 말다툼도 함께 들어갔다는 거다.
“네가 한 말… 진짜…… 맞, 지?”
“그런 거로 거짓말하는 사람도 있냐?”
“너…….”
“아, 이 새끼 술만 먹으면 미친놈처럼 아련하게 구네. 너 이제 맥주 한 캔 마셨거든? 정신 좀 차려라. 뭔 소리를 할까 겁난다.”
“너어……, 진짜 아까… 했, 던… 말…….”
“알았다고! 그거 진짜라고! 그러니까 입 다물라고!”
너희 진짜 아까 무슨 얘기를 나눈 거냐? 정태원이 한도윤의 입을 틀어막으며 나와 문영윤의 눈치를 겁나게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친 정태원이 어설프게 웃으며 시선을 피하려 하는데, 그걸 그냥 두고 볼 내가 아니지.
“너는 그래도 술이 좀 세긴 하구나? 자, 마셔.”
“아니, 형…. 잠시만요…….”
“자, 누구 하나 죽을 때까지 마시는 거야. 그러고 싶지 않으면 무슨 얘기 했는지 나도 좀 알려 줘.”
“하…. 차라리 나중에 얘기할 걸…. 괜히 오늘 술자리 좀 편해 보겠다고 지랄하다가…….”
무어라 중얼거리는 정태원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씨익, 썩은 미소를 지었다. 정태원은 울상을 지으며 눈동자를 재빠르게 굴려 주변 상황을 스캔했고, 그나마 현 상황이 괜찮게 느껴졌는지 내게 핸드폰을 확인하라고 손짓을 했다.
말로 하기는 좀 그러니까 폰으로 확인하라는 뜻이렷다. 그러려면 카메라를 꺼야 하는데…. 공교롭게도 지금 영상을 찍는 중이라 핸드폰을 쓰기 좀 껄끄러웠다. 톡을 확인하려면 동영상을 종료해야 하는데…. 그러기엔 문영윤의 미친 듯한 상모돌리기 영상이 좀 아깝단 말이지.
“이 새끼 상모 돌리는 것만 마저 찍고 확인해도 돼?”
“네…. 상관없어요.”
“그래? 좋았어. 그럼 제대로 찍어야지.”
아이고, 잘 돌린다! 아주 그냥 상모돌리기에 국가 대표가 있었다면 문영윤이 대표가 되었겠네! 간간이 호응까지 넣어 주며 문영윤의 진상 짓을 낱낱이 기록한 나는 만족스럽게 영상을 저장하고 난 후, 정태원이 보낸 톡을 확인했다.
톡 내용을 확인한 나는 눈가를 비볐다. 내가 본 이게 맞는 건가 싶은 마음에 확인차 정태원을 바라보았다. 너, 이거 진짜야? 구라치는 거 아니고 진짜야? 이게 정말 너의 진심인 거야? 정태원이 찝찝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와, 세상에!
“…왜? 굳이? 어째서?”
“사람 마음에 왜가 어디 있어요….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와…. 인생이란 원래 한 치 앞도 못 보는 거라더니….”
딱히 장문의 톡은 아니었다. 내용이 믿기지 않았을 뿐.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세 줄짜리 톡에는 자신은 문영윤에게 관심이 있으며, 한도윤이 저를 경계하는 듯해 나에겐 그런 쪽으로 관심 없다고 이야기했다는 놀라운 소식이 들어 있었다.
와, 나 이런 건 진짜 상상도 못 했어. 그래서 우리 앞에서는 못 하고 한도윤을 끌고 방으로 들어갔던 거구나. 그렇구나. 근데 왜 하필 많고 많은 사람 중에 문영윤이지? 나도 모르게 문영윤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여전히 시뻘건 얼굴로 상모를 돌리며 열심히 무어라 중얼거리는 그의 모습이 시야에 담겼다.
“…진짜 굳이?”
“…조용히 하세요.”
“미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서. 물론 내가 참견할 건 아니니까 조용히 있을 거야.”
“그래 주시면 감사할 거 같아요….”
걱정하지 마라. 이래 봬도 커플을 연결시켰으면 시켰지 커플 브레이커 짓은 안 한다. 그럴 이유도 없고. 내가 지옥에서 돌아온 솔로였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깨 버렸을 텐데, 난 이미 애인이 있잖아? 그것도 어리고 잘생기고 귀여운 애인이. 그럼 남의 연애 좀 도와줄 수도 있는 거지.
“도움은?”
“괜찮아요.”
“나중에라도 필요하면 말해. 도와줄게.”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한껏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정태원과 건배를 한 나는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살아 있던 정태원을 꺾어 버리고 홀로 살아남아 한참 전에 식어 버린 치킨과 냉장고에서 꺼낸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TV를 봤다. 이건 뭐, TV에 재밌는 걸 안 하네.
그렇게 남아 있던 맥주를 모두 끝낸 나는 집 안 청소를 시작했다. 예전이었다면 다음 날 일어나서 해야지, 하고 내버려 뒀을 텐데 4개월 동안 쌓인 습관이 내 몸을 조종했다. 어차피 내일 하나 지금 하나 다를 바 없으니 지금 당장 하라고.
재활용 쓰레기를 담을 봉투를 꺼내 그 안에 빈 캔을 구겨서 집어넣었다. 한두 캔도 아니고 수십 캔을 치우려고 하니 봉투 하나로는 부족했다. 새 봉투를 꺼내 마저 담고 나니, 쓰레기봉투 두 개가 꽉꽉 채워졌다. 새삼 내가 술을 많이 마시는구나 싶다. 여기서 80%는 내가 다 처먹은 거 같은데 정신이 아주 그냥 멀쩡하네.
그 뒤 남은 치킨은 혹시 몰라 꽁꽁 싸매 냉장고 안에 넣어 뒀다. 내일 오전에 해장국 먹고 오후에 남은 치킨은 프라이팬에 구워서 치밥 해 먹으면 되겠다. 계란은 무조건 반숙이지. 배가 부를 정도로 퍼먹었는데도 내일 먹을 걸 생각하니 허기가 지는 것 같다.
테이블과 바닥까지 깔끔하게 쓸고 닦은 나는 이후 뭘 할까 고민하다가 미리 사 뒀던 황태와 북어를 확인했다. 이걸 물에 불려야 하긴 하는데, 오래 불리면 또 이상해져서 지금 해야 할지 아니면 자고 일어나서 할지 고민된다.
…그냥 일어나 있는 김에 해장국을 미리 끓여 둘까? 아침에 데워 먹으면 되잖아. 나 한번 자면 깊게 자서 아침에 눈 못 뜬단 말이야. 결국, 짧은 고민 끝에 해장국을 미리 만들기로 결정했다. 핸드폰을 꺼내 해장국의 레시피를 확인한 나는 레시피가 시키는 대로 따라 하며 해장국을 만들었다.
소소한 문제가 하나 있다면 이번에 본 레시피가 정확한 계량을 알려 주는 게 아니라 ‘적당히’와 ‘대충’을 사용했다는 것 정도? 그래서 적당히 얼마나 넣으라는 건데? 왜 몇 스푼 넣어야 하는지는 안 알려 줘?
“아… 다른 레시피는 없나…….”
잠시 불을 끄고 레시피 서치에 집중했다. 이것도 적당히랑 대충이네. 제대로 된 계량 나온 거 어디 있냐고. 안 그럼 X나 짜거나 X나 싱겁게 될 거라고. 두 눈을 부릅뜨며 초록 창에 존재하는 레시피란 레시피는 샅샅이 뒤진 나는 기어코 원하는 레시피를 찾을 수 있었다. 다만 이게 1인분 기준이라 4인분을 만들려면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때려야 했다.
“그냥… 쓰여 있는 것에 4배를 하면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