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냐 내 최애를 죽인 게 (84)화 (84/88)

#84

처음에 운동해야겠다는 말을 꺼낸 건 나였다. 나날이 체력 고자가 되는 듯한 느낌에 운동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달은 탓이었다. 그래서 한놈 님께 헬스장에 가려는데 뭐부터 해야 하냐고 물어보다가 그만…….

“헬창한테 한번 걸리면 진짜 좆되는 거야….”

“아…. 고생하셨어요…. 대신 건강을 챙겼잖아요!”

“몸 건강은 챙겼지. 한놈 님이 나한테 ‘곧죽 회원님, 오늘은 헬스장 안 나오세요?’라고 하기 전까지는.”

“아아아…….”

헬창은 정말 무섭더라. 가볍게 건강 챙기려고 시작한 헬스를 군대에서 하는 지옥 훈련으로 만들어 버리더라고. 처음에는 그래도 내 허약함을 격렬하게 알고 있는지라 쉬엄쉬엄하는 듯싶더니 내가 어느 정도 운동에 익숙해지자마자 무슨 롤러코스터처럼 난이도가 급격하게 올라갔다.

물론 도와주겠다는 사람한테 면전에 대놓고 안 한다 하기 좀 그래서 그냥 했더니 근육량도 많이 늘었다. 어떻게 보면 좋은 거지. 건강을 제대로… 아주 제대로 챙기고 있으니까. 한놈 님은 같이 헬스 다닐 친구 있어서 좋고, 나는 빡세게 운동을 해서 좋…은가…?

“밥이나 먹자.”

“네….”

진짜 밥 먹다 말고 이게 뭐 하는 짓이었냐. 앞으로 한도윤과 밥 먹다 뭐 해야 할 거 같을 땐 무조건 밥 다 먹고 나서 하자고 해야겠다. 한국인이 말이야, 밥 먹으면서 딴짓하면 안 된다고! 핸드폰이랑 컴퓨터 하면서 먹는 건 인정.

그래도 맛있게 먹는 걸 보니 기분은 좋다. 한도윤은 밥 한 공기를 싹싹 비워 내더니 이내 두 공기째를 먹기 시작했다. 아무리 애인이 해 줬어도 진짜 맛없으면 저렇게는 못 하는데. 괜히 뿌듯하게 먹는 걸 구경하며 핸드폰을 꺼내 문영윤과 정태원에게 톡을 보냈다.

솔직히 휴가 기간 내내 둘이서만 놀고 싶은데, 이미 군대를 겪어 본 사람으로서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다. 그동안 못 만났던 사람들도 몇몇 시간 맞는 사람 뽑아다 같이 놀고 그래야 돌아가서 열심히 군 생활 하지. 문영윤에게 톡을 보내자마자 곧바로 답장이 날아왔다.

[도윤이 휴가나옴]

[술ㄱ?]

[문영윤: ㅇ]

[도윤이 휴가나옴]

[술ㄱ?]

[정태원: 휴가는 못 참지!]

[정태원: 어디로 갈까요?]

그러게. 어디서 보는 게 좋을까. 술집에 가면 여기저기 시끄럽기도 하니까 아예 여기서 모이자고 할까? 쓰레기 버리는 게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남들 눈 신경 쓰지 않고 수다 떨 수 있지 않은가. 막말로 밖에서 이번 업데이트가 어쩌구 룩템이 새로 나왔는데 어쩌구 하면 주변에서 힐끔힐끔 쳐다볼 거 같단 말이야.

[도윤이 집 주소 알려줄 테니까 이리로 와]

[치맥 사둘게]

“문영윤이랑 태원이 불렀다.”

“네? 갑자기요?”

“네가 문영윤이랑 오랜만에 만나고 싶다며. 밖에 나가면 하고 싶은 말 다 못 하고, 나 빼면 다 술찐들이니까 진상 부릴 거면 집에서 하라고 여기 주소 알려 줬어. 차라리 그쪽이 커버 치기 쉽거든.”

다른 애들보다 한도윤이 제일 심하겠지. 그래도 근 4개월 동안 꾸준히 술을 먹어 온 애들이랑 군대에 처박혀서 알코올 냄새도 못 맡아 본 한도윤은 비교 대상도 안 된다. 이전엔 잘 먹었던 것도 아니고 애초부터 술찐이었는데 거기서 더 약해졌다? 이건 안 되지.

“치킨 주문 좀 해 봐. 나는 편의점 가서 맥주 사올게.”

“가면서 주문하죠. 어차피 한 3, 40분은 걸릴 거잖아요.”

“아, 그럴까? 그럼… 일단 그 군복부터 좀 갈아입어 봐.”

휴가 나왔다고 군복 입고 돌아다니는 거 은근 꼴불견이거든. 내 말에 한도윤이 제 차림을 내려다보더니, 그제야 자신이 아직까지 군복을 입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표정을 지으며 후다닥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갔다. 아니, 진짜로 몰랐던 거냐고.

그렇게 옷을 갈아입은 한도윤을 이끌고 근처 편의점으로 가 맥주를 샀다. 500ml짜리 캔맥주 수십 개를 구매했다. 편의점 안에 있는 맥주 한 종류를 대충 쓸어 모아서 정확히 몇 캔인지는 모르겠다. 한 번에 가져가기에는 무척이나 많은 양이었으나 양손에 한가득 봉투를 드니까 어찌어찌 되기는 하더라. 그저 액체가 든 알루미늄 캔을 들다 보니 손과 어깨가 아팠을 뿐.

“와…. 진짜 무겁다…….”

“치킨은 일단 다섯 마리 시켰어요.”

“어?”

사람은 넷인데 닭은 다섯 마리? 그게 되나? 맥주를 냉장고에 넣으며 두 눈을 느리게 끔뻑거렸다. 요즘 애들이 많이 먹긴 하나 봐. 나는 치킨 그거 네다섯 조각 먹으면 배부르던데. 아니, 그냥 군인이라 그런가. 나도 군대에 있을 땐 살기 위해서 많이 먹었는데.

그렇게 잠시 휴식 겸 한도윤과 함께 TV를 보는 사이, 띵동 하는 벨소리에 후다닥 달려가 문을 열었다. 그러자 문영윤과 정태원이 나란히 서서 인사를 건네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아…치킨인 줄 알고 기대했는데….

“뭐지? 네가 불러 놓고 왜 그런 표정을 짓지?”

“치킨인 줄….”

“개새끼일세.”

나는 문영윤의 투덜거림을 가볍게 듣고 흘리며 정태원을 반겼다. 한도윤 친구이자 나 도와준 애. 그것만으로도 그에게 호감을 가질 이유는 충분했다.

“어서 들어와. 오느라 고생했어.”

“에이, 고생은요. 한도윤은 나와 보지도 않네?”

“내가 치킨 온 줄 알고 먼저 나와서 그래. 도윤아, 애들 왔다.”

“네….”

어슬렁거리며 현관 앞으로 나온 한도윤이 문영윤에게는 살갑게 대하더니 정태원과 눈을 마주친 순간 아니꼽다는 시선을 보냈다. 둘 사이에서 미묘한 신경전이 오가자, 나는 문영윤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저 새끼들 왜 저러냐고 무언의 질문을 건넸다. 그러자 문영윤이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냐는 눈빛으로 화답을 했고, 나는 네가 아는 게 뭐냐는 답장을 보냈다. 물론 전부 눈빛으로 보낸 메시지들이었다.

“곧 치킨 올 거니까 일단 가서 앉아 있어. 오느라 고생했다.”

“그럴게요! 그 전에 한도윤 너는 나 좀 보자. 너한테 할 말 있어.”

“…뭔데. 여기서 말해.”

“안 돼! 빈방에 잠깐 들어가자. 그거만 딱 말하고 나올 거니까 얼마 안 걸려.”

뭔 얘기를 나누려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을 입 밖으로 꺼내기도 전에 두 사람은 컴퓨터 방으로 향했고, 나와 문영윤은 그 둘의 뒷모습을 멀뚱히 바라보다 이내 소파에 앉아 TV를 봤다. 마침 재밌는 예능을 하나 하더라고. 꿀잼인데?

(2)

띵동. 다시금 울리는 벨 소리에 이번에는 치킨이 확실하다는 마음으로 달려간 나는 따끈따끈한 치킨 다섯 마리를 양손에 쥘 수 있게 되었다. 요즘은 배달 어플도 예전보다 잘 되어 있어 그런지 배달원에게 직접 결제를 하지 않아도 되어 편하다.

“맥주는?”

“냉장고에. 야, 저거 진짜 무겁더라.”

“설마 편의점에서 사 왔어? 직접?”

“그럼 어디서 사?”

“요즘 배달 어플은 편의점 배달도 되는데. 몰랐냐?”

…진짜? 전혀 몰랐다. 와, 세상 참 좋아졌구나. 편의점 배달이라니. 살면서 처음 들어 본 단어의 조합에 입을 헤벌리며 문영윤을 쳐다봤다. 그런 게 있으면 진작 알려 주지 너 혼자만 알고 있고 나한테는 말도 안 해 주냐? 이런 양아치 새끼.

“야! 치킨 왔으니까 얼른 나와! 안 나오면 문영윤이 다 처먹는다!”

“내가 돼지인 줄 알아?! 다섯 마리를 어떻게 다 먹어!”

“너라면 먹을 수 있어. 네 돼지력을 무시하지 말라고.”

“못 해! 못 한다고, 이 새끼야!”

에이, 그런 것도 못 해? 실망스러운 눈초리로 문영윤을 바라보던 나는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나오는 한도윤과 정태원을 확인하고 눈꺼풀을 천천히 깜빡였다. 분명 들어갈 땐 썩 기분 좋지 않아 보였던 한도윤의 표정이 한결 밝아진 탓이었다. 둘이 무슨 얘기를 나눴길래?

“어… 일단 치킨부터 먹을까?”

“네! 야, 이거 네 맥주.”

“고오맙다.”

심지어 한도윤이 직접 정태원에게 맥주까지 건네는 걸 보니 놀라움은 더더욱 커졌다. 철천지원수처럼 굴더니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겼길래 저런 호의를?! 괜히 궁금해져 문영윤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녀석 또한 궁금했는지 내게 무언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야, 너도? 야, 나도.

“근데 둘이 무슨 얘기를 그렇게 오래 했어? 궁금하게.”

“별 얘기 아니었어요.”

“맞아요. 더 이상 얘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을 얻고 왔을 뿐이에요.”

“저건 또 뭔 개소리지?”

“야, 너 안… 크흠. 조용히 안 하냐?”

“별거 아니에요, 형.”

이전이었다면 한도윤이 불편해하고 정태원이 여유로웠을 텐데, 오늘은 이게 또 반대의 상황이 되었다. 진짜 무슨 얘기를 나눈 건데? 정태원은 왜 본인이 먼저 대화하자 해 놓고 언급되는 것을 불편해하는 것이며, 짜증이 가득했던 한도윤은 한결 여유로워졌는가.

“X나 궁금하네….”

“야, 너도? 야, 나도.”

“쟤들이 우리 따 시키나 봐. 우리끼리 놀아야겠다.”

“싫은데? 내가 왜?”

“개새끼….”

아무리 궁금해 미칠 거 같아도 딱히 너랑만 놀고 싶진 않은데? 꼬우면 오지 말았어야지. 내가 이럴 걸 예상 못 했니? 문영윤이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며 맥주를 꼴꼴꼴 잘도 처마셨다. 마시는 꼬라지가 딱 술 먹는 하마 같아서 박수와 함께 놀리자 그가 주먹으로 내 팔뚝을 쳤다. 아, X바. 개 아파.

“아, 왜 때려!”

“네가 먼저 놀렸잖아!”

“나이 처먹고 잘하는 짓이다!”

“지는!”

…그만하자. 우리 둘 다 나이 헛먹은 거 같으니까. 이제 무려 스물일곱이라고. 스물일곱에 이러는 건 좀 아니지. 심지어 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애인이 옆에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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