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냐 내 최애를 죽인 게 (82)화 (82/88)

#82

“너 왜 이렇게 힘이 없냐? 도윤이 군대 가서 그래?”

“뭐래. 집돌이가 집 밖에 너무 오래 있어서 그런 거지.”

“논산 갔다 왔어? 어쩐지 오후 수업에 없더라.”

그럼 내가 어딜 갔다 왔겠냐. 무려 수업도 빼먹고. 월요일을 공강으로 뺄 수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수강 신청에 실패한 패배자는 말이 없는 법이다.

“중간고사 준비는 했어?”

“교양은 오픈북이니까 대충 어디에 뭐가 있는지 정도만 훑으려고. 전공은 나 예전에 족보 얻어 둔 거 있어서 그거 보고 공부하면 돼.”

“헐, 너 혼자 족보 보냐? 영윤이는?”

“뭐래. 너도 족보 받은 거 있잖아.”

주변 사람들과 두루두루 원만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녀석인지라 나보다 먼저 족보를 구했을 거라 확신할 수 있다. 졸업해서 더 이상 쓸 일이 없을 족보 정도야 이 녀석에게 주고도 남을 사람들이니까.

“우리 트레이드할래? 각자 족보 복사해서 공유하기!”

“음…. 나쁘지 않은데.”

족보라고 다 같은 건 아니니까…. 머릿속으로 시험공부를 보다 효율적으로 할 방법을 고심해 본 나는 문영윤의 트레이드라 쓰고 공유라 읽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참고할 수 있는 자료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좋아! 아, 나 도서관 갈 건데 같이 가실?”

“집부터 들러야 해. 가방 두고 나왔어.”

“같이 가자. 가는 김에 게임 얘기도 좀 하고.”

그러든지. 문영윤이 행동을 애새끼처럼 해서 그렇지, 얘가 그래도 성적은 그럭저럭 나오는 놈이다. 분명 수업 틈틈이 자는데 과제 점수랑 시험 점수가 나쁘지 않게 나온단 말이지. 그것도 어찌 보면 능력이긴 하다.

“그래서,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어?”

“갑자기 이건 또 뭔 개소리지?”

“왜애애-. 내가 이어 준 거나 다름없잖아!”

“지랄하지 마쇼.”

불현듯 남의 연애 구경이 재밌다고 지랄해 대던 문영윤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니, 나도 뭐, 저번에 베타 누나랑 한놈 님의 파국을 제삼자의 시선으로 봤을 때 꽤 재밌다는 사실을 알게 되긴 했다만 그게 내 일이 되면 또 다르지.

“신경 꺼. 네 연애나 해.”

“에이, 내가 저번에도 말했잖아!”

“어어, 알아. 남의 연애 구경하는 게 재밌다 이거지. 알긴 아는데 그래도 그냥 신경 꺼. 알아서 잘할 테니까.”

괜히 참견하면 단순한 사랑싸움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파국이 날 수도 있는 일이다. 그 가능성을 눈앞에서 한 번 본 입장에서 문영윤의 참전은 최대한 지양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이 새끼는 다른 사람들과는 파급력 자체가 다르거든.

“내가 연애 솔루션 진짜 잘해 줄 수 있는데!”

“잘 만나고 있으니까 필요 없어.”

“오올! 오오오올! 우리 정우가 달라졌어요! 예전이었으면 그런 말 안 했을 텐데!”

“꼰대세요?”

그냥 조용히 가방 가지고 와서 도서관 가면 안 되겠냐? 그렇게 호들갑을 떨어 대야 해? 답답함과 짜증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몇 마디 나누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머리가 아프다.

꾸역꾸역 문영윤이 지껄이는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며 집에 도착한 나는 빠르게 가방을 챙긴 뒤 도서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에 박차를 더했다. 도서관에만 가면 사람이 많으니까 이 새끼도 조용해지겠지. 도서관은 엄연히 큰 소리 내는 게 금지인 구역이지 않은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불이 붙은 문영윤을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다. 도서관 안에서는 육성으로 뭐라 하는 게 불가능하니까 필담을 보내오기 시작한 것이다. 한 장씩 찢기 좋은 스프링 노트를 사용하는 녀석은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종이를 찢은 뒤 조신한 손길로 내게 쪽지를 보냈다.

[그래서 진도는 어디까지 나간거야? 영윤이는 궁그매 궁그맹!!!!]

[너무너무너무너무 궁금해서 죽어버릴지도 몰라!]

죽든지. 궁금해서 사망하면 ‘세상에 이런 일이’에 출현할 수도 있겠네. 관종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이니 어디 한번 열심히 해 보도록.

[왜 안 알려주는데??]

[설마 영윤이가 생각한 거까지 다 한 거야?!!]

[엄멈머 대박이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올라간댔는데 그 짝이구먼!!!]

“그믄흐르….”

손 올라가려고 하니까 적당히 하자, 이것아.

[도서관에서 소음 내면 안 되는 거 몰라?]

[쯧쯔 아직 덜 배웠네]

그렇게 따지면 다른 곳도 아니고 도서관에서 타인의 공부를 방해하는 것도 하면 안 되는 행동 아니냐? 샤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성격 같아서는 손부터 올리고 싶은데 차마 그러지 못하는 현재의 상황이 참으로 한스러웠다. 그렇다고 밖에 나가자니 그때부터는 이 새끼의 주둥이에 모터가 달릴 게 뻔해서 나가기도 힘들다.

[적당히하고 님도 공부나 하시지]

[시져시져! 영윤이는 공부 안할고야!]

[F 먹든가]

네 성적까지는 내가 알 바 아니잖아? 심드렁하게 대꾸를 하며 마저 공부를 계속했다. 이 방대한 분량을 하루 안에 전부 익히는 것은 불가능하니, 우선 오늘은 어느 정도 수준까지만 하고 난 후 나머지는 다음 날 해야겠다.

저번에 컴퓨터가 날아갔을 때, 휴식의 필요성을 격렬하게 깨달아서 두 번 다시 비슷한 실수는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무엇보다 목숨을 갈아서 과제를 하고 시험공부를 하면 건강 베리잖아. 꼬박꼬박 삼시 세끼 먹으면서 건강 챙기기로 약속했단 말이야.

“야, 나 인제 간다.”

“어? 벌써?”

“어. 여기까지만 할 거야.”

문영윤도 어느 순간부터 공부에 집중하느라 깜빡한 모양인데, 슬슬 해가 떨어지며 주변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애초부터 늦게 오기도 했으나 짧은 시간이라도 얼마나 집중했느냐에 따라 머리에 남는 게 다른 법이니 이 정도면 충분했다.

가방에 챙겨 온 짐들을 다시 넣으며 집에 돌아가서 할 일을 정했다. 일단 가자마자 씻고 밥부터 먹은 다음에, 컴퓨터를 켜서 나머지 시험공부를 해야겠지.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중간고사임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과제를 처리하든가.

“나도 같이 가.”

“너 할 거 다 했으면 그러든지.”

지가 집에 가고 싶다는데 그럼 가야지. 말릴 생각은 요만큼도 없다. 그렇게 가방을 챙겨 도서관을 완전히 나오자 아직 해가 짧아서 그런지 그새 주변이 어두워져 있었다.

“근데 왜 같이 나오려고 했어? 너 공부 다 했어?”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또 쓰잘데기 없는 거 물어보면 가만 안 둔다.”

“그게 아니라…. 우리 사실 따지고 보면 기껏해야 두 시간 공부한 건데, 왜 이렇게 일찍 돌아가?”

예상을 빗나간 질문에 느리게 눈꺼풀을 깜빡였다. 물어볼 거라 하길래 또 뭔가 했는데, 생각보다 정상적인 질문이 나왔네. 턱을 쓰다듬으며 뭐라고 대답할까 잠시 고민한 나는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래 공부한다고 머릿속에 다 들어오는 건 아니잖아. 딱 내가 집중할 수 있는 시간까지만 한 거야. 그리고 시간이 늦었으니까 일단 집에 가야 할 거 같아서 일어난 것도 있고.”

“와…. 연애가 사람을 바꾸긴 하나 봐. 예전엔 벼락치기나 하던 애가 이런 성실한 생각을 다 하게 되다니…….”

“내가 그래도 너보단 성적이 좋은데?”

“그건 맞지!”

낄낄거리며 웃는 문영윤을 보며 살짝 고민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과제에 치인다고 이 녀석이랑 논 지도 오래된 것 같다. 이왕 도서관도 함께 갔으니 술 먹으러 가자고 할까.

“네가 골라. 술 먹을래, 아니면 게임할래.”

“당근 빠따 게임 아니겠습니까.”

“이래서 겜창이란. 가자, 피시방으로.”

“오 예! 웬일이야? 너 방학 전엔 게임 잘 안 하잖아.”

“그냥, 너랑 논 지도 좀 오래된 거 같고, 나도 휴식 시간은 있어야 하니까. 겸사겸사?”

내 말에 문영윤이 세상에서 가장 충격받은 사람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야, 너는 이쪽 말고 연기 쪽을 전공했어도 잘했겠다. 무슨 표정이 저렇게 휙휙 바뀌냐.

“진짜… 연애가 사람을 바꾸는 게 맞았구나……. 지만 알던 놈이 남을 생각해 주네…?”

“아, 시바. 그냥 너 혼자 가라.”

“에잉, 왜! 같이 가기로 했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네 반응이 마음에 안 들어. 그러니까 나 집에 갈래.”

“집에서 프리지아 켜! 죽을 때까지 나랑 같이 프리지아 하는 거야!”

“우리 죽기 전에 섭종할걸.”

“…클래식 서버 만들어 버려!”

이 새끼, 게임에 어지간히도 진심인 모양인데? 설마 클래식 서버까지 생각할 줄이야. 차마 그렇게까지 프리지아를 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문영윤의 진심에 감탄하며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게임사에서 그런 걸 용납해 주겠냐.

“아는 프로그래머 없어.”

“야, 너도? 야, 나도.”

“그냥 있는 게임이나 하자. 그때 가면 새로운 게임 나오겠지. 잘 만든 거 하나 골라서 하면 돼.”

“흑흑, 클래식의 위대함을 모르는 당신이 불쌍해요!”

“어우, 그냥 빨리 게임이나 하러 가자. 네가 그러는 거 계속 보니까 속 안 좋아.”

“개새끼.”

“멍멍.”

논산에서 서울까지 올라오는 시간 동안 허전했던 마음이 조금 채워지는 듯했다. 문영윤이 일부러 헛소리를 지껄이며 어그로를 끄는 것도 아마 내 기분을 생각해서…라고 하고 싶긴 한데, 얘가 진짜 그런 의도로 그랬을까? 얘가? 문영윤이? 그저 같이 놀 사람이 필요해서 그랬을 확률이 더 높은데?

가느스름한 눈으로 문영윤의 의도를 확인하기 위해 녀석을 위아래로 훑어본 나는 이상한 표정을 짓는 녀석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역시 그냥 심심했던 게 틀림없다. 민망하게끔 괜히 깊게 생각했네. 그래도 썩 괜찮아진 기분에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문영윤과 함께 피시방으로 향했다.

“결투장으로 따라와.”

“아,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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