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냐 내 최애를 죽인 게 (81)화 (81/88)

#81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변명을 무슨 그딴 식으로 해요? 막말로 댁이 컴퓨터 수리를 맡겼는데 그 안에서 일회용 케첩이 나왔다고 생각해 보세요. 고운 말이 나올 거 같나요? 환불은 물론이고 보상까지 확실하게 해 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환불은 제 선에서 해 드릴 수 있지만, 그 외에는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우선 그 기사분께서 연락이 일절 되지 않는 상태이기 때문에 저희도 곤란해하고 있고요.

“그건 그쪽 문제고요. 소비자가 그런 것도 사정 봐 가면서 문의 넣어야 합니까? 누가 봐도 센터 측 과실인데? 직원 관리를 어떻게 했길래 이딴 식으로 해서 보내 주죠? 그래도 수리 맡기기 전까지만 해도 켜지기는 했던 게 이제 켜지지도 않는데요?”

구라가 아니고 진짜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블루 스크린이 뜨던 컴퓨터가 이제는 더 이상 켜지지도 않았다. 한창 분노를 토해 내며 직원과 실랑이를 주고받았으나 일단 수리비 환불부터 해 주겠다는 말만 남기고 상담원이 전화를 끊었다.

“와…. 와! 진짜 말이, 와, 안 나온다….”

나 이러다가 진짜 고혈압으로 실려 가는 거 아니야? 과제해야 하는데? 양손에 얼굴을 묻은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이를 갈았다. 이럴 때 어떤 식으로 대처를 해야 할지 내 머리로는 도무지 떠올릴 수 없다. 뭘 해도 안 될 것 같은 기분이다.

“아… 진짜 울 거 같아…….”

한도윤한테 전화라도 할까. 그래도 엊그제까지만 해도 기분 좋았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진짜 괜찮았는데. 오늘은 도무지 멘탈 회복이 어려울 성싶다. 나는 맨바닥에 엎어진 채로 한도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짧은 수신음이 이어지고, 수화기 너머에서 녀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한창 과제 하실 때 아니에요? 전화 주실 줄 몰랐는데.

“야, 나 어떡하지…? 진짜 조동아리에서 쌍욕이 막…….”

-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목소리를 들으니 안정감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눈물도 같이 나왔다. 여태까지 그런 일이 없어서 몰랐을 뿐, 나는 스트레스를 과하게 받으면 우는 타입이었나 보다. 어제, 오늘 있었던 일들을 물기 어린 목소리로 하나하나 설명하자 녀석이 조곤조곤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괜찮아요?

“안 괜찮아…….”

-우리 맛있는 거 먹으면서 속 풀어요. 그럼 괜찮아질 거예요. 지금 바로 출발할 테니까 어디 나가면 안 돼요?

“어차피 기운 없어서 안 나갈 거야….”

-가서 제가 과제도 도와드릴게요. 자료 찾기 같은 건 혼자보단 둘이 더 낫잖아요. 노트북 가지고 가야겠네.

한도윤은 준비를 하는 도중에도, 차를 타고 우리 집으로 오는 도중에도 전화를 끊지 않은 채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게 고마운 한편… 정신이 들고 나니 미친 듯이 쪽팔렸다. 애도 아니고 이런 거로 울기까지 하냐. 아니, 근데 진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상태에서 열 받으니까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저 이제 다 왔어요. 우리 밖에서 맛있는 거 먹어요. 형, 술 좋아하니까 치맥 먹으러 갈까요?

“그럴까…. 그럼 나도 준비해서 나갈게.”

-그럼 제가 먼저 도착하면 미리 가서 이것저것 주문해 둘게요.

“으응…. 그래. 네가 먹고 싶은 거로 시켜. 나는 맥주면 돼.”

-그럴게요.

기운 없는 몸을 이끌고 외출하기 위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이어폰을 낀 뒤 아직까지 전화를 끊지 않은 채 말하고 있는 한도윤의 목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호프집으로 향했다. 잔잔하고 낮은 저음을 계속 들으니 귓속이 간지러웠다.

시답잖은 얘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호프집에 도착한 나는 아직 한도윤이 도착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미리 자리를 잡아 앉았다. 확실히 근처에 사는 사람이랑 멀리서 오는 사람은 다르네. 늦게 출발해도 가까이에 사는 사람이 먼저 도착하긴 한다니까?

메뉴판을 보며 어떤 걸 주문할까 고민하는 사이, 한도윤이 도착했다. 급하게 달려온 듯 숨을 몰아쉬며 환하게 웃는 모습에 나 또한 밝게 웃으며 녀석을 반겼다. 마침 잘됐네. 뭐 먹고 싶은지 물어봐야지.

“뭐 먹을래?”

“형은 뭐 먹고 싶은데요?”

“나는 일단 크리스피 순살. 너는?”

“그럼… 으음…. 저는 칠리 순살이요.”

순식간에 메뉴 조율을 마치고, 곧바로 알바생을 불러 주문을 마쳤다. 치킨이 나오기 전에 생맥 먼저 서빙해 주는 건 역시 국룰이죠.

“오늘 맛있게 먹고 즐겁게 놀면서 스트레스 풀어요.”

“…그래. 멀리까지 오게 해서 자꾸 미안해지네.”

“제가 좋아서 오는 건데 뭐가요. 저도 싫었으면 먼저 오겠다는 말도 안 꺼냈을 거예요.”

전에 내가 했던 말과 비슷한 이야기였다. 하나하나 신경 써 주는 게 느껴져 괜히 코끝이 찡해진다.

“너한테 진짜 많이 받는 거 같아. 나도 뭔가 해 주고 싶었는데….”

“이미 큰 거 하나 해 주셨잖아요.”

응? 뭐를?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 봐도 내가 해 준 건 딱히 없었다. 큰 거라고 했으니 게임이랑 관련된 건 아닐 거고. 그 외에 뭘 해 줬지? 한참을 고민해도 결론이 나오지 않아 고개를 기울이자 한도윤이 작게 웃음소리를 내며 맥주잔을 들었다.

“저 군대 2년 기다려 준다고 했잖아요. 그게 진짜 큰 건데.”

“…고작? 별거 아니잖아.”

“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요즘 누가 군대 갔다 오는 걸 기다려 줘요. 그런 사람 별로 없어요.”

그런…가? 맥주를 홀짝이며 한도윤의 열변을 한 귀로 듣고 흘린 나는 그래도 사람을 만나니 한결 나아진 기분에만 신경을 썼다. 네가 그렇다니 그런 거라 치긴 하겠는데 내 성에 차지 않으니까 어떻게든 뭔가를 해 주고 싶은걸.

제대 기다려 주는 거야 따지고 보면 별거 아니다. 나는 할 거 다 하면서 얘 언제 나오려나-, 하고 바쁘게 살면 되잖아? 시간이라는 게 바쁘면 바쁠수록 빨리 지나가는 법이니, 체감하기로야 1~2년은 순식간에 지나가는 듯싶을 거다.

“그것도 못 기다리면 뭐 하러 연애를 해.”

“저보다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잖아요.”

“장난하냐?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

없으니까 여태까지 연애를 안 하고 있었지. 세상 살다 보면 사람 암 걸리게 만드는 빡대가리들은 많아도 제정신 박힌 정상인은 은근 보기 힘들다. 특히나 거기서 나한테 잘해 주는 사람? 차라리 다시 태어나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너 근데 왜 그렇게 웃어?”

“…기분 좋아서요.”

뭐가? 내 컴퓨터가 나가리 된 게? 아니면 내 과제가 삼도천을 건너서 돌아오지 않게 된 게?

“형. 저는 진짜 형이랑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요.”

“…….”

“크게 뭐 특별한 걸 한다든가, 그런 데에는 별로 관심 없어요. 물론 아예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행복한걸요.”

“예나 지금이나 너 진짜 말을 예쁘게 하는구나?”

이러니까 좋아하는 거지. 과제? 이제 나도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오히려 스트레스를 풀고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하는 게 더 효율이 높을 것이다. 왜, 머리가 복잡하면 집중하기 힘들지 않은가.

“고마워.”

“네? 뭐가요?”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고맙다는 말밖에 안 나오네.”

내가 말을 좀 더 조리 있게 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옅게 웃으며 재차 고맙다고 인사하자 한도윤 또한 예쁘게 웃으며 내 말을 받아 주었다. 역시, 멀리는 아니라도 같이 놀러 가고 싶다. 여행이라든지 말이야.

(5)

최대한 늦게 오길 바랐던 한도윤의 입영 날이 찾아왔다. 한동안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자 입 안이 쓰게 느껴졌다. 휴강일이 아니라는 점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기왕이면 입소하는 것까지는 보고 싶어서 아침 일찍 일어나 오전 수업만 대충 듣고 나와 한도윤과 함께 논산으로 향했다.

평일 출근 시간을 피했기 때문인지 논산까지 가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입소 시간은 2시였으나 사람이 몰리는 시간대에는 들어가기까지 오래 기다려야 해 조금 일찍 도착했다. 처음에 한도윤이 왜 그렇게 일찍 가야 하느냐 물어봤을 때 얘가 아직 미필이 맞는구나 싶었다.

“2시에 딱 맞춰서 가면 사람 몰려서 들어가기까지 한참이야. 너만 입대하는 거 아니다.”

“아, 그렇구나.”

“내가 준비하라던 건 제대로 준비한 거 맞지?”

“당연하죠. 말씀하신 대로 가져왔어요.”

나는 한도윤이 챙긴 짐을 열어 뭐 빠진 것은 없는지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일단 가장 중요한 입영 통지서랑 신분증은 챙겼고, 꼭 챙기라고 했던 건 다 챙겨 놨네. 이 정도면 뭐, 걱정 안 해도 되겠는걸?

“잘 다녀오고.”

“네, 그럴게요.”

“가서 다치지만 말고.”

“형도 끼니 꼬박꼬박 챙겨 먹어야 해요.”

“그럴게.”

가볍게 인사를 하며 한도윤이 입영 심사대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나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인사할 수 있는 시간이 짧아서 조금 아쉽긴 하다. 일찍 왔으니 더 있을 수 있긴 한데, 이왕이면 좀 편하게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먼저 들어가는 게 나았다.

서울로 올라가는 열차 안에서 피곤함을 참지 못한 나는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로 선잠을 잤다. 그래도 잠들긴 잠들었다고 꿈까지 꿨는데 내릴 때가 되어 일어나니까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았다. 꽤 재밌는 꿈 같았는데.

“흐아암…. 어우, 피곤해.”

집에 가자마자 중간고사 준비를 해야 하는 내 인생이 레전드다. 뻐근한 몸을 풀며 역에서 내린 나는 아포칼립스에 나오는 좀비라도 되는 양 비척거리며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을 탔다. 논산역에서 내려도 입영 심사대 앞까지 가려면 버스를 또 타야 한다. 따져 보니 왔다 갔다 왕복 6시간은 걸리는 것 같았다.

“언제 집에 가냐.”

내가 이래서 밖에 안 싸돌아다니는 건데. 그래도 오늘은 챙겨 줘야 하는 날이었다. 혼자 덜렁 입소하면 쓸쓸하거든. 누구 하나는 따라가 줘야 좋지. 길게 하품을 하는 사이 집 앞 역에 도착했다. 지하철에서 내린 뒤 느긋한 걸음으로 집에 가던 나는 내 어깨를 퍽, 하고 때리는 손길에 고개를 획 돌렸다.

“대체 누가… 어? 문영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