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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냐 내 최애를 죽인 게 (80)화 (80/88)

#80

솔직히 미안해 죽겠다. 군 휴학이긴 해도 일단 휴학을 한 상태이기 때문에 입대 전까지는 한도윤이 나보다 시간이 많다는 걸 인정하지만, 그렇다 한들 홀로 왔다 갔다 하며 밥만 같이 먹는 건 좀 아니지 싶었다. 밖에서 사 먹는 것도 아니고 요리도 쟤가 혼자 다 하는데…. 안 미안하면 사람 새끼가 아니지.

뭐… 정작 본인은 얼굴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말하고 있지만.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빠른 속도로 과제를 하나하나 처리해 나갔다. 그나마 아직까지 조별 과제를 내 준 교수님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이 상황에 조별 과제까지 있잖아? 그럼 진짜, 와…. 죽어야지.

그렇게 얼마나 과제에 매달렸을까.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던 나는 귓가에 들리는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에 고개를 휙 돌렸다. 하도 자주 왔다 갔다 해서 한도윤에게 집 비밀번호를 알려 준 상태였다. 지금까지 해 왔던 과제를 모두 저장한 뒤 버선발로 뛰쳐나가 한도윤을 반겼다.

“왔어?”

“네! 아직 밥 안 먹었죠? 제가 얼른 김치찌개 끓여 드릴게요.”

“천천히 해. 나 과제 중이었어.”

아니면 내가 뭐 좀 도와줄까?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내 질문에 한도윤의 동공이 빠르게 흔들렸다.

“그… 어……. 괜찮아요! 형은 과제하느라 바쁘잖아요. 마저 하고 계세요. 준비 끝나면 부를 테니까.”

“그래…….”

녀석이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지 너무 잘 알아서 눈물이 앞을 가리려고 하네. 개강하기 직전에, 하도 밥을 얻어먹는 게 미안해서 내가 나름대로 맛있어 보이는 제육볶음 레시피로 요리를 해 준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감동받은 표정을 짓던 녀석은 제육볶음의 맛을 보더니 표정을 싹 굳히며 앞으로 요리는 자기가 맡겠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한도윤이 내게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행동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조금 섭섭한 티를 냈었는데, 막상 내가 만든 제육볶음을 먹자 그에게 순순히 요리를 그에게 떠넘길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랬는지 알겠더라.

결국,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컴퓨터 앞으로 간 나는 마저 과제를 진행했다. 잠깐 막히던 부분도 한번 풀리기 시작하면 그 이후부터는 술술 풀려 나가니, 이번에는 정말 금방 끝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면 할 만해! 이번 주말에 시간 낼 수 있어!

“만약 주말에 놀러 간다면 어디로 가고 싶어?”

“음… 글쎄요. 영화관?”

“영화 좋아해?”

“이번에 좋아하는 영화 시리즈가 개봉했거든요. 보러 가려고 마음은 먹었는데 막상 가려니까 귀찮아서 아직 안 갔어요.”

“그래?”

좋았어. 영화관이다, 이 말이지? 오늘이 목요일이니까 토요일 이전에만 과제를 다 끝내면 늦어도 일요일은 놀러 갈 수 있겠다.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플랜을 하나하나 짜며 컴퓨터를 열심히 두드렸다. 살면서 이렇게 계획적으로 움직인 건 처음이다. 원래 내가 좀 즉흥적인 사람인데 말이야.

“형, 식사하세요.”

“어어. 지금 갈게.”

그래도 역시 이런 것도 좋긴 하다. 약간, 뭐라고 해야 할까. 한도윤이 제대하고 난 후 함께 살자고 하지 않았던가. 마치 같이 살면 어떤 느낌일지 미리 베타 테스트하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겜창이라 표현을 이렇게밖에 못 하겠네.

“내가 진짜 과제 빨리 끝낼게.”

“천천히 하세요. 무리하다가 몸 상해요.”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건강은 챙기면서 할 거야. 막상 주말 전에 과제를 다 끝내 놓고 아프면 못 나가잖아. 순간 꼭 이러면 플래그가 생긴다는 생각이 떠올랐으나 애써 무시했다. 에이, 설마 진짜로 아프겠어?

…라고 해 놓고 문제가 터졌다. 절대로 주말 안에 과제를 끝낼 수 없다는 문제가. 아, 다행스럽게도 몸살에 걸리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저 다음 날 홀로 과제를 하다 컴퓨터에 블루 스크린이 떴다고나 할까?

“허허허.”

이게 뭔가 싶다. 귀 아픈 기계음이 방 안에 울려 퍼지며 푸른색의 빛이 내 시야에 가득 찼다. 저장… 그래, 저장. 저장은 해 뒀다. 그러면 뭐 하냐. 블루 스크린 떠서 까딱하다가는 포맷하게 생겼는데. 몇몇 과제는 외장 하드에 옮겨 놔 괜찮았지만 지금 하고 있던 건 안 옮겼다고. 걔는 그냥 통째로 날아간 거라고.

“X발…….”

내가 진짜… 눈물이 없는 사람이거든? 나 진짜 잘 안 울어. 근데 지금은… 지금은 좀 울고 싶은 거 같아…….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꺼낸 나는 초록 창에 들어갔다.

[블루스크린 해결법]

[블루스크린이 떴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포맷 안하고 블루스크린 해결하는 방법]

[데이터보호하면서블루스크린해결]

“아, 하나 있다……”

[A. 대부분의 하드웨어 오류는 램 청소를 하면 해결이 됩니다. 메인보드에 있는 램을 꺼내서 딱딱한 지우개로 청소를 하고 다시 조립한 후 사용하세요.]

램을 청소하면 된다, 이 뜻이지? 블루 스크린이 뜬 컴퓨터를 강제 종료한 뒤 본체 내부를 청소하기 위해 뚜껑을 열어 안을 확인했다.

“…뭐가 램이지?”

어디에 꽂힌 게 램이지? 다시 초록 창을 켜 램의 생김새를 확인하고 청소를 시작했다. 아니, 시작하려 했다. 딱딱한 지우개로 청소를 하라 했는데 우리 집에 딱딱한 지우개가 없다. 다른 거로 해도 되나? 막 솔 같은 거로 치우면?

눈앞이 핑핑 돌아간다. 이럴 줄 알았으면 컴퓨터 공부도 좀 해 둘걸! 조립이나 이런 건 내 분야가 아니니까 안 해도 되겠지 하고 안 배운 게 하책이었다. 결국, 컴퓨터 하수였던 나는 다시금 초록 창을 켜 수리 기사를 부른 뒤 침대에 기대어 넋을 놓았다.

“진짜 거지 같다…. 왜 하필 이럴 때…….”

원래 사람이 각 잡고 놀러 가려 하면 우주의 기운이 막아선다고 들었는데 말입니다. 그게 딱 이런 거 같아요. 죽겠네, 증말.

[나 블루스크린 떴다]

[블루스크린 오조오억년만....]

[임효린: ㅁㅊㅋㅋㅋㅋㅋㅋㅋ어쩌다가?]

[몰라... 모른다고.... 과제 중이었다고..........]

[이세영: 엌ㅋㅋㅋㅋㅋㅋㅋ미쳣다 복구 안돼요??]

[수리기사 불렀ㅇㅓ요.... 죽을 거 같아.......]

수리 기사가 오면 다 해결되겠지. 분명 그렇겠지….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도착한 수리 기사의 말에 나는 고혈압 위험군이 되어 뒷목을 부여잡았다.

“아…. 이거 본체를 들고 가야겠는데요? 지금 당장 해결하기 좀 힘들 거 같아요.”

“왜죠? 어째서죠?”

“이게 뭐 때문이냐면…….”

수리 기사의 말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쏼라쏼라 뭐라고 말하고는 있는데 무슨 뜻인지 이해도 안 가고 오만 의욕이 뚝 떨어져서 생각이라는 것 자체를 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 안에 끝내는 건 진짜 무리였구나.

아무리 과제가 불가능하다 한들, 그렇다고 컴퓨터를 이 상태로 둘 수도 없어 결국 수리 기사에게 본체를 맡긴 나는 멍한 눈으로 천장만 바라보았다. 노트북으로 할 수 있긴 한데… 의욕이 하나도 없네. 이게 인생인가?

“진짜… 개X발, 거지 같은 인생…….”

울며 겨자 먹기로 노트북을 꺼내 처음부터 새롭게 과제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밤새 과제 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이미 한번 진행한 이력이 있으니까 전보다는 더 빠르게 되겠지?

타다닥, 타닥, 타닥타닥. 그렇게 내 방 불은 하루 종일 켜진 상태였고, 나는 날려 버린 과제를 반절도 채 진행하지 못했다. 포기하면 편하다고 누가 그랬었지. 포기하고 일단 잠이나 자자. 다음 날 바로 본체를 보내 준다 했으니 본체로 옮겨서 하자고.

방금 침대에 누운 것 같았는데 다시 눈을 떴을 땐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상태였다. 본체가 도착했다며 택배 기사가 벨을 누르지 않았더라면 아마 밤이 될 때까지 처자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일어나서 다행이네.

모니터와 본체를 연결한 뒤 컴퓨터를 켜자 털털거리는 기묘한 부팅음과 함께 모니터 화면이 켜졌다. 그리고… 블루 스크린은 여전히 고쳐지지 않은 상태였다. 뭐지? 왜 그대로지? 머리 위로 떠오르는 물음표에 재부팅을 시도했으나 여전히 블루 스크린이 뚜렷하게 떠 있었다.

“미친 건가? 이럴 거면 왜 컴퓨터를 가져갔어? 돌아 버린 거야?”

치솟는 빡침에 까득, 어금니를 갈며 뭐가 문제인지 확인하기 위해 본체 뚜껑을 열어 보았다. 그리고 나는 참으로 희한하고도 신기한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부품 사이에 무려 일회용 간장이 껴 있었다. 그 왜, 초밥 시켜 먹으면 주는 일회용 간장 있지 않은가. 그게 들어 있었다.

“…이게 뭐야?”

간장을 뽑아낸 나는 사람이 정말 어이가 없으면 말문이 막힌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수리를 맡겼는데 본체 사이에 일회용 간장이 껴 있을 확률을 고르시오. 배점 10점.

“이런 썩을 놈의 새끼를 다 봤나! 이게 뭐냐고, 대체! 어떤 미친놈이 수리 맡긴 본체에다가 이딴 걸 껴 놔?! 이것들이 싹 다 대가리에 빵꾸가 났나!”

분노를 담아 수리 센터에 전화를 건 나는 그곳 직원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야, 너희가 생각해도 이건 아니지 않냐? 어?

-아… 그 직원이 지금 출근을 안 해서요….

“출근을 왜 안 하는데요. 뭐, 초밥 먹고 장염 걸려서 응급실 실려 갔대요?”

-저희도 연락이 안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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