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패치노트: 그럼 장인님이랑 영결한다는 건 장난이었던 거야?]
[귓속말/패치노트>나한테명령하지마: 거기까진 모르겠어요]
[귓속말/패치노트>나한테명령하지마: 장난일수도 있고 아니면 게임이니까 그 정돈 괜찮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하기야, 0과 1로 된 디지털 세상에서 결혼한다고 진짜 혼인 신고서에 도장을 찍는 게 아니니 상관없기야 하겠다. 그냥 상대적으로 더 친한 게임 친구가 생기는 개념이 아닐까?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패치노트: 그럼 내가 다른 사람이랑 영결하면?]
[귓속말/패치노트>나한테명령하지마: 안돼요]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패치노트: 알았다]
괜히 물어봤네.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패치노트: 너 휴가 나오면 그때 하지 뭐]
[귓속말/패치노트>나한테명령하지마: 열심히 포상휴가 받아올게요]
그러든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귓속말을 보낸 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뻐근한 몸을 풀었다. 역시 장시간 의자에 앉아 있으니 허리가 너무 아프다. 그러고 보니 내일모레 개강이라 수업 들을 준비도 해야 하는데.
“시간표는 X 됐지만…….”
대학생인데 아침 9시에 수업 있는 게 말이 되는 소리냐. 심지어 두 시간 수업받고 난 다음 세 시간 동안은 할 게 없다. 딱 그때 넣었어야 하는 수업 수강 신청을 놓쳤거든. 짜인 시간표 보고 진짜 미치는 줄 알았다.
“그래서 베타 누나랑 한놈 님은 어떻게 되는 거지.”
다시 원래 주제로 돌아와서, 중간에 끼어 있는 입장에서 상당히 난감한 상황이 되었다. 그래도 나나 다른 사람은 이번 일에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 큰 문제는 아니었으나, 당사자나 다름없는 뚝배기장인은 똥줄 타게 생겼다.
장난인지 진심인지 아니면 블러핑인지는 몰라도 이러다가 커플 하나 깨 버리게 생기지 않았는가. 두 눈으로 보지 않아도 그녀가 얼마나 초조한 상태일지 눈에 훤히 보일 지경이었다. 이래서 남의 연애에 제삼자가 갑툭튀하면 안 된다니까.
[길드/주님한놈갑니다: 베타님은 왜 나가신 겁니까.]
[길드/주님한놈갑니다: 축복해드리자마자 나가시니 좀 그렇군요.]
[길드/주님한놈갑니다: 순수하게 두 분의 앞날을 축복해드리려고 했던 건데 말입니다.]
그, 그만…. 거기까지만 하세요. 그러다가 진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널지도 몰라…. 진심으로 두 사람 사이에 끼고 싶지 않았거늘, 이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한놈 님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주님한놈갑니다: 가서 베타누나한테 갠톡 따로 보내시죠]
[귓속말/주님한놈갑니다>나한테명령하지마: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주님한놈갑니다: 그냥 가서 갠톡이나 나눠요]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주님한놈갑니다: 제발]
어차피 내일 가면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둘이 신나게 놀 거잖아. 이왕이면 파국 좀 일찍 끝내자는 소소하고도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말이니 부디 제발 좀 가서 둘이 얘기를 나누고 와 주세요. 길드원들이 차별이나 편파 느낄까 봐 둘이 사귀는 거 말하고 싶지는 않다면서요. 그러니까 둘이 쇼부 보라고.
[친구 주님한놈갑니다 님이 접속을 종료하였습니다.]
[길드원 주님한놈갑니다 님이 접속을 종료하였습니다.]
[길드/뚝배기장인: 저희 길드 이제 망하나요?]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아뇨 그러진 않을걸요]
[길드/패치노트: 맞아요 겜 망하기 전까진 저 기다려준댔단 말이에요]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그런 일도 있었지 참]
그럼 망하지는 않겠네. 위장에 구멍이 뚫려서 그렇지.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어서 빨리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과연 그들은 서로 대화를 통해 잘 풀었을까. 갑자기 분위기 싸해진 길드 채팅방이 다시 활기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하루 이틀은 지나야 나올 줄 알았던 결과는 그날 새벽에 나왔다. 연달아 패치노트와 결투장에 매칭이 된 나는 10번 중 4번을 이기고 6번을 지는 승률을 자랑하며 터덜터덜 마을에 캐릭터를 주차해 놓고 있었다. 그래도 그나마 실력이 좀 늘긴 늘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친구 주님한놈갑니다 님이 접속하였습니다.]
[길드원 주님한놈갑니다 님이 접속하였습니다.]
[친구 베타 님이 접속하였습니다.]
[길드원 베타 님이 접속하였습니다.]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ㅎㅇ]
둘이 같이 들어오다니. 며칠은 지속될 것이라 예상했던 파국이 이렇게 빨리 해결된 건가?
[길드/베타: ㅎㅇㅇ]
[길드/주님한놈갑니다: 안녕하세요.]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어째 둘이 같이 들어왔네]
어떻게 됐는지 어서 말해 달라는 의도가 숨겨져 있는 채팅이었다. 눈치 빠른 양반들이니 화자의 의도를 기깔 나게 알아채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길드/베타: ㅋㅋ]
[길드/베타: 화해했음]
[길드/베타: 영결도 둘이 하기로 함]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ㅊㅋ]
“예스!”
이제 채팅이 다시 활발해지겠구나. 불편했던 분위기가 다시 편안해질 것이라 생각하니 답답했던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산뜻하게 웃으며 두 사람의 화해를 축하하는 사이, 베타 누나로부터 길드 단톡방 한 번 확인해 달라는 채팅이 올라왔다. 갑자기 웬 단톡방?
[임효린: 쪼까 고민했읍니다만]
[임효린: 그라도 동무덜에게 말하는 게 맞는 거 같아서]
[임효린: 저랑 한놈이랑 사귑네다^^]
[임효린: 사귄지 좀 되긴 했는디]
[임효린: 저희가 싸우면 아따 이새기들 사랑싸움하네 하고 생각 해주십셔^^]
[임효린: 으차피 쪼까 싸우다가 말거임 ㅎㅎ]
이런 건 생각 못 했는데. 두 사람의 연애를 진심으로 축복하는 입장에서 흐뭇한 미소가 절로 튀어나왔다. 그래서 나 또한 그들의 원만한 연애 전선을 위해서 단톡방에 가벼운 채팅 하나를 남겼다. 이로 인해 우리 길드에 평화가 찾아오기를….
[누구 물어본 사람]
[임효린: 저거 ㄹㅇ 개객기라니까]
[ㅗ]
[김현호: 효린이한테 그런 식으로 말씀하지 마십시오.]
[뭐래]
[임효린: 너 왜 울 애기한테 그러냐? 혼날래?]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애기의 사전적 의미가 달라졌나]
그렇게 길드의 평화를 지켜 낸 나는 두 사람과 아주 즐거운 채팅을 나누었다. 대충 한 시간 정도? 하다 보니 점점 재미가 붙더라. 웃긴 건 나만 재밌어한 게 아니라 저 둘도 재밌어했다는 점이다. 역시 같이 노는 사람이라 그런지 끼리끼리더라.
(4)
어느새 푸릇푸릇한 새싹이 돋기 시작하며 봄이 되었다. 봄이 되었다는 뜻이 무엇이냐. 직장인들에게는 별 의미 없으나 대학생에겐 지옥의 개강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한 달만 지나면 벚꽃의 꽃말인 중간고사가 시작되겠지.
수업을 모두 마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다 때려치우고 게임이나 하고 싶은데 교수님이 내 주신 과제 때문에 자료 조사나 하게 생겼다. 교수님은 과제를 하나 준다고 생각하시지만 저희는 다 합쳐서 대여섯 개는 된답니다. 모든 교수님들이 다 똑같이 하나씩 주시거든요. 종종 두 개 주시는 분도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교수님은 아시려나 몰라.
“자퇴하고 싶다….”
한국인이 말하는 ‘자퇴하고 싶다’와 ‘자살하고 싶다’는 정말 학교를 때려치우고 죽고 싶다는 게 아니라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서 게임이나 돌리고 싶다는 뜻이다. 피곤한 눈가를 비비며 컴퓨터를 켜던 나는 핸드폰에 울리는 진동에 천천히 손을 뻗었다. 누구에게 온 연락인지 진동만 들어도 알 수 있다. 다른 사람은 진동 설정조차 안 해 놨거든.
[한도윤: 수업 끝날 시간이죠?]
[한도윤: 잘 다녀오셨어요?]
[엉]
[너는 뭐 하고 있었어?]
[한도윤: 저는 그냥 컴퓨터 하면서 형 기다리고 있었죠]
[한도윤: 많이 바빠요?]
어어, 엄청 바빠. 이럴 거라 진즉부터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미친 듯이 몰아치는 과제 러쉬에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다. 입대 전에 미리 데이트 같은 거라도 해야 하는데…. 졸업반에게 데이트할 시간이란 사치와도 같았다. 할 거면 미리 과제 다 끝내고 난 다음에나 할 수 있어.
[죽겠어....]
[과제가 너무 많아.....]
[한도윤: 밥은요?]
[점심 먹음]
[한도윤: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어... 국물에 소주?]
[한도윤: 과제 해야 하는데 소주?]
“그건… 그렇긴 하지…….”
그렇지만 술 못 먹은 지도 꽤 됐는걸. 막말로 개강한 후부터 술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 다른 놈들은 무슨 배짱인지 그래도 술자리를 만들며 이리저리 싸돌아다니던데 나는 안 되겠더라. 술자리 가는 것보다는 당장 눈앞에 떨어진 과제가 더 급해. 미리 안 해 두면 나중에 가서 피똥 싼다는 것을, 지금은 졸업해서 없는 선배들이 뒤늦게 미쳐 날뛰는 걸 보고 뼈저리게 깨달았다.
[한도윤: 김치찌개 좋아해요?]
[존맛이지]
[한도윤: 금방 갈게요]
한도윤이 올 때까지 한 시간 정도 걸리니까 그사이에 할 수 있는 만큼 해야지. 개강하기 전에는 밖에서도 종종 만나고 술도 함께 마셨으나, 지금은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한도윤이 틈틈이 우리 집으로 찾아와 밥을 해 줬다. 특히 과제한다고 끼니를 거르는 날에는 마치 부모님께 들을 법한 잔소리가 떨어지며 냉큼 달려와 맛있는 저녁을 차려 줬다.
내가 아까 전에 졸업반에게 데이트할 시간은 사치라고 했던가? 연인 둘이 만나면 데이트라는 이름을 붙이니 이것도 데이트라면 데이트이긴 하다. 한쪽만 미친 듯이 개고생하는 데이트. 그래서 어떻게든 과제를 빨리 처리하려는 것도 있었다. 평일 중에 모든 과제를 끝내면 주말에는 시간이 빌 거 아냐.
“이따 오면 주말에 어디 놀러 가고 싶은 곳 있냐고 물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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