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 정도의 충성심이냐고. 조금 어이가 없었으나 귀여운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한도윤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쥐며 작게 미소 지었다. 짜식, 귀엽기는.
고개를 살짝 숙여 녀석의 입술에 가벼운 키스를 남긴 뒤 떨어지자, 한도윤이 멍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방금 전의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겠다는 낯짝에 이번에는 큰 소리로 웃으며 녀석의 입에 보다 짙은 키스를 했다. 이 정도면 알아듣겠지.
“싫으면 이런 걸 했을까? 네가 생각하기엔 어때?”
“……형.”
“어. 말해.”
“…한 번만 더 해 주면 안 돼요?”
“네가 하는 거 보고.”
“뭘 하면 되는데요?”
글쎄? 예쁜 짓? 실실 쪼개며 내뱉은 말에 한도윤이 예쁜 짓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너무 웃겨 나도 모르게 크게 웃음소리를 내었다. 근래에 들어 이렇게 즐거운 날은 처음인 것 같다.
(3)
시간이 지나고, 때마침 기다리고 기다리던 프리지아의 열한 번째 신규 업데이트 소식이 들려왔다. 메인 퀘스트와 신규 레이드는 평소에도 존재했던 것이기 때문에 별다른 생각이 없었으나, ‘영혼의 서약’이라는 프리지아 공식 결혼 시스템이 생긴다는 소식에 유저들이 불타기 시작했다.
[길드/베타: 이번 업뎃에 영결 봄???]
[길드/베타: 이거 말이 영혼의 서약이지]
[길드/베타: 따지고보면 영혼 결혼식같은 거 아니냐??ㅋㅋㅋㅋㅋㅋㅋ]
[길드/베타: 이런 빌어먹을 슬애기게임!!! 어떻게 겜 나온지 5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 결혼 시스템이 나오냐!!!!]
한놈 님과 함께 인게임 내에서 결혼식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일까, 베타 누나가 신나서 미쳐 날뛰고 있었다. 거, 예쁜 사랑 하세요.
[길드/뚝배기장인: 베타님 영결 하실라구요??]
[길드/베타: 당근빠따죠]
[길드/베타: 이건 못먹어도 ㄱ다]
[길드/뚝배기장인: 오 누구랑요?]
[길드/뚝배기장인: 할 사람 없으면 저랑 하실래여??]
어라? 이건 또 뭔 소리래? 두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가만히 채팅 창을 응시했다. 이렇게 삼각관계가 되나요? 문영윤이 말했던 남의 연애가 제일 재밌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이야, 이게 제삼자의 눈으로 보니까 아침 드라마보다 더 재밌다.
이왕 관람하는 거 제대로 봐야겠다는 마음에 팝콘 대신 라면을 꺼냈다. 이럴 때는 끓인 라면보단 라면땅이지! 오도독 씹어 먹으면 을매나 맛있게요? 그렇게 의자에 앉으며 동시에 손으로 라면땅을 제조하던 나는 뜻밖의 상황에 아직 다 흔들지 못한 라면을 그대로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와, 아침 드라마 실사판이다!
[길드/베타: 오 그럴까요?]
[길드/뚝배기장인: 엌ㅋㅋㅋㅋㅋㅋㅋㅋ진짜요?!!?]
[길드/뚝배기장인: 저야 완전 좋죠!!!!]
[길드/뚝배기장인: 자 우리 어서 날짜를 잡읍시다!!]
[길드/베타: 좋아요!!!!!ㅋㅋㅋㅋㅋ]
[길드/베타: 장인님 언제 시간 되세요??!!!]
“한놈 님은 어떡하고 이렇게 장인 님이랑 영결을?”
그야말로 상상도 못 한 전개! 이거, 지금 한놈 님이 미접속 상태인데 톡으로라도 연락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님 여친 지금 인게임 결혼을 다른 사람이랑 하려고 하는데, 이거 합의가 된 내용인가요? 물론 실제로는 조용히 던전이나 들어갔다. 남의 연애사에 끼기 시작하면 골 아픈 일이 오조 오억 개 생겨서 참견하면 안 돼.
[길드/패치노트: 저도 영결....]
[길드/뚝배기장인: 곧죽님 있잖아요]
[길드/뚝배기장인: 두분의 사랑을 응원하겠습니다^^]
눈웃음 쓰지 마. 나 ‘ㅋ’이랑 ‘^^’이랑 ‘^^;’, 이거 세 개 혐오증 있어.
[길드/패치노트: 형... 저랑... 영결...하실래요....?]
[길드/베타: 뭔데 아련...]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그러게]
정말 쓸데없이 아련한 채팅이었다. 그나저나 인게임 결혼이라…. 나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살짝 고민했다. 어떻게 할까. 한도윤이 군대에 가면 한동안 못 써먹을 시스템이긴 하나 그래도 확실히 재미는 있을 거 같다. 역시 하는 게 좋겠지? 쟤 삐지면 남의 연애사에 낀 것보다 더 골 아프단 말이야.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하지 뭐]
[길드/퇴사기원: ?]
[길드/퇴사기원: ㄹㅇ??]
[길드/뚝배기장인: 오옼ㅋㅋㅋㅋㅋㅋ이쁜 사랑하세요!!]
[길드/베타: 이야 1호컾 나오나요??]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그래서 정확히 업뎃 언제 하는데?]
업데이트한다고 말만 나온 거지 아직 실질적으로 업데이트된 건 아니잖아. 채팅으로 질문을 던지긴 했으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공식 홈페이지에 있는 업데이트 노트에 들어가 영혼의 서약 시스템이 언제 나오는지 정확한 일자를 확인해 보았다. 그리고 매우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돌아온 나는 채팅에 딱 한 마디를 날린 뒤 다시 던전에 들어갔다.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4월 10일에 업뎃되더라]
내 채팅이 올라오고 난 뒤, 반응은 두 가지로 갈렸다. 하나는 장본인인 패치노트였는데, 이 녀석은 지금 침묵 디버프에 걸린 것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아는 사람으로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베타 누나와 뚝배기장인의 반응이었는데, 이들은 왜 패치노트가 침묵해야 했는지, 내가 왜 굳이 업데이트 날짜를 확인하고 그걸 언급하기까지 했는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이유를 알면 반응이 달라질걸?
[길드/베타: 엥? 그게 왜?]
[길드/뚝배기장인: 좀 늦긴 하네ㅠㅠ]
[길드/뚝배기장인: 아직 한달이나 남았잖아요...ㅠㅠㅠㅠㅠㅠ]
[길드/베타: 마자마자]
[길드/베타: 4월 언제 기다려어엉어어어ㅓㅓㅓ]
여전히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곁눈질로 흘겨본 나는 눈앞의 몬스터를 열심히 두들겨 패며 채팅을 칠 수 있는 타이밍을 잡아 엔터키를 눌렀다. 딱 봐도 정확한 상황을 모르는 것 같으니 이 스피드왜건이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팿놑 4.3 입대]
[길드/베타: 아........]
[길드/뚝배기장인: 아.... 그렇구나.......]
[길드/베타: 이건 뭐 대리를 해줄 수도 없고.....]
누가 인게임 결혼을 대리 불러서 치러요? 어지간히 미치지 않은 이상 그건 아니지. 그런데 말입니다. 여기 그 미친놈이 있었습니다.
[길드/패치노트: 미리 침발라두려면]
[길드/패치노트: 대리라도 부르는 게 역시...]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개소리 ㄴ]
네가 드디어 돌아 버렸구나. 아, 군대 2년 기다려 준다고! 정확히는 1년 8개월 기다려 주겠다고! 아니면 휴가 나와서 게임할 때 하면 되는데 그걸 또 뭐 굳이 대리까지 불러서 하겠다고 하니. 평소 행동 때문에 가끔가다 잊어버리는데 쟤도 썩 정상은 아니었다. 정상인 애들이라면 거너 부캐까지 만들어 가면서 거너만 PK하는 사람한테 죽여 달라고 X랄하진 않으니까.
[친구 주님한놈갑니다 님이 접속하였습니다.]
[길드원 주님한놈갑니다 님이 접속하였습니다.]
[길드/주님한놈갑니다: 안녕하세요.]
[길드/주님한놈갑니다: 베타님과 장인님이 영혼의 서약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왔습니다.]
와, 파국이다! 패치노트의 개소리 때문에 잠시 잊고 있던 진정한 아침 드라마이자 이 구역 파국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나와 패치노트의 경우 베타 누나와 한놈 님 사이의 미묘한 기류, 정확히는 둘이 연애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상태지만 다른 사람은 아는지 모르는지 확실하지 않았다.
즉, 지금 한놈 님이 어떻게 대처를 하냐에 따라 이 파국이 스무스하게 흘러가 더 이상 파국이 아니게 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과연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 참으로 궁금하기 짝이 없는데 말이죠! 다시금 라면땅을 입 속에 욱여넣으며 한놈 님의 채팅을 기다렸다.
[길드/주님한놈갑니다: 주의 이름으로 두 분의 영혼의 서약을 축복하도록 하겠습니다.]
[길드/주님한놈갑니다: 영혼의 서약이니만큼 부디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어라?”
예상했던 반응이랑 달라도 너무 다르다. 보통 이럴 땐 이미 자기랑 하기로 했으니 님은 다른 사람을 찾아보라고 하고 베타 누나랑 딴따단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라면을 씹던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채팅만 보고 있던 나는 이내 베타 누나의 반응을 확인하고 입을 다물었다.
[친구 베타 님이 접속을 종료하였습니다.]
[길드원 베타 님이 접속을 종료하였습니다.]
[길드/뚝배기장인: 이제 누가 길마해주냐]
별다른 말도 없었다. 그냥 게임을 꺼 버렸다. 진정한 파국의 끝을 보게 된 나는 조금 얼떨떨한 심정으로 패치노트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기 때문이다.
[귓속말/나한테명령하지마>패치노트: 혹시 장인님이 베타누나랑 한놈님 사귀는 거 알아??]
[귓속말/패치노트>나한테명령하지마: 어 네]
[귓속말/패치노트>나한테명령하지마: 모르셨어요?]
응, 나는 몰랐어. 너랑 나만 알고 있는 줄 알았지.
[귓속말/패치노트>나한테명령하지마: 공대원들은 다들 눈치 다 챘어요 다른 일반 길드원들은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