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형, 보여요?”
“…어어, 보이네.”
“앞으로 형 밥은 제가 챙길게요. 제가 사람 확대범이거든요.”
별말 한 것도 없는데 묵직한 팩트로 뼈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체중계에 뜬 무게는 하다못해 60kg도 아니고 그보다도 가벼운 58kg이었다. 내 키 표준이라는 65kg에서 한참 미달인 무게라 내가 제일 당황했다. 그래도 이것저것 많이 먹으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왜, 어째서 저거밖에 안 나가는 거지?
“이유가 궁금해요?”
“어…. 진짜 궁금해. 나 그래도 인스턴트로 많이 먹는데 왜 이것밖에 안 돼? 인스턴트만 먹으면 더 쪄야 하는 거 아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내 표정과 말투에 한도윤이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을 들은 나는 입을 헤벌리며 원인을 깨닫게 되었고 내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되었다.
“하루에 몇 끼 먹어요?”
“주로 한 끼 먹는데 두 끼 먹는 날도 있고….”
“아예 안 먹는 날도 있죠?”
“그치. 자면서 먹을 수는 없잖아. 보통 자느라 안 먹는…….”
아하!
“형. 사람은 삼시 세끼를 다 챙겨 먹어야 하는 법이에요. 세 끼가 어려우면 못해도 하루 두 끼는 필수로 먹어야 살도 찌고 건강도 챙길 수 있어요.”
“그렇구나…….”
나는 그냥 끼니마다 인스턴트만 먹으니까 살이 쪘을 줄 알았지.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했네. 시무룩하게 체중계 위에서 내려온 나는 축 늘어진 어깨를 흔들거리며 한도윤을 따라 거실 소파에 앉았다.
요즘 보면 너무 마른 사람은 싫어한다는 얘기도 있던데, 설마 내 체중이 마음에 안 들어서 한도윤이 나를 살찌우려는 건 아니겠지? 힐끔 눈동자를 굴려 한도윤의 낯을 확인했다. 별다른 표정은 없었다. 오히려 입꼬리를 씰룩이고 있다고 해야 할까. 뭐야, 눈깔을 왜 그렇게 떠?
“와, 어쩔 수 없다. 저랑 다니면서 살 좀 찌우도록 하죠. 저 맛집 많이 알아요. 아까 요리한 것도 보셨죠? 맛있는 거 해 드릴 수도 있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뿌듯해하는 한도윤의 모습에 문득 어떤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 얘 설마?
“너 그냥 자주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아냐? 건강이고 나발이고.”
“…사실 주목적은 그게 맞는데……. 그, 그래도 이왕이면 건강도 챙기자는 거죠!”
뭐지? 얘 진짜 뭐 하는 놈이지? 얼굴이 시뻘게진 채 횡설수설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자꾸만 튀어나왔다. 아무리 나보다 5살이 어리다고는 해도 덩치로 따지면 훨씬 큰 녀석이 붉어진 낯으로 쑥스러워하는데도 귀엽게만 보였다.
“뭔 만날 구실을 그런 거로 정해. 그냥 네가 오고 싶을 때 오고 부르고 싶을 때 불러. 과제랑 시험 때문에 바쁘지만 않으면 다 받아 줄게.”
“…그래도 돼요?”
“참 내….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 게 싫었으면 애초에 널 안 만났어.”
작게 웃음을 흘리며 팔을 쭉 뻗어 한도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녀석이 허리를 살짝 숙이며 내가 제 머리를 쓰다듬기 좋은 높이로 만들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아예 양손으로 녀석의 머리를 매만졌다. 부들부들한 게 만지니까 기분 좋네.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그냥 말을 해.”
“그… 솔직히 좀 안 믿겨서…….”
“나 밖에 나가기 싫어하는 거 알잖아. 근데 한 시간이나 걸려서 여기에 왔고. 그거만 봐도 알지 않아?”
“하지만… 좋아한다고 말은 안 해 주시잖아요….”
“그건…….”
내가 이런 유의 민망함에 좀 약한 편이라. 나는 팔을 쭉 뻗어 내 허리를 감싸는 한도윤의 머리를 매만지며 머뭇거렸다. 머릿속으로는 생각해도 입 밖으로 내뱉는 건, 역시 좀, 민망한데.
“혀엉…….”
“…귀엽네.”
툭 튀어나온 말에 한도윤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미쳤네. 살면서 내가 얼빠라는 생각은 안 해 봤는데, 얘만 보면 내가 얼빠가 된 것 같단 말이야. 이래 봬도 아무리 예쁘고 잘생긴 사람을 봐도 혹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나도 너 좋아해. 싫어하는데 거절 못 해서 억지로 사귀는 거 아니야.”
“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말 한마디로 네 불안을 없앨 수 있다면 언제든지 말해 줄게. 물론 민망해서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겠지만.
“그냥 너라서 좋은 거야.”
다른 걸 보고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나한테 잘해 주는 너라서, 나를 그 자체로 봐 주는 너라서 좋은 거야. 민망함에 시선은 전혀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지만 이건 진심이었다. 단순히 외모만 가지고 좋아한 게 아니다. 그동안 내게 잘해 준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내게 꾸준히 호감을 보내 줬기 때문에 그 호감에 호응을 해 준 것이다.
한도윤이 고개를 푹 숙인 채 가만히 내 품에 안겼다. 정확히는 고개를 숙이고 큰 손에 얼굴을 파묻어 가린 채 내 품을 파고든 것이라, 나는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녀석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궁금했다. 나는 슬쩍 멀어지며 양손으로 녀석의 얼굴을 감싸 쥐어 들어 올렸다. 새빨갛게 물든 얼굴을 보니 내가 잘 말했구나 싶어졌다.
“왜? 말해 줬으면 했다며.”
“…막상 들으니까, 쑥스러워서…….”
“내가 그래서 여태까지 말 안 했던 거야. 쑥스러워서.”
네가 싫어서가 아니라. 나직이 내뱉은 말에 한도윤은 양손에 제 얼굴을 묻으며 어떻게든 현 상황을 회피하려 했다. 지금 와서 하기에는 너무 늦은 행동이었다.
“도윤아, 그렇게 부끄러워? 네가 먼저 시작해 놓고?”
“…기분은 좋지만 조금 그런 건 있네요.”
붉어진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녀석을 보니 괜히 실실 미소가 흘러나왔다. 귀여운 녀석. 이래서 내가 너를 좋아하는 건데, 너는 알고 있을지 모르겠네. 여전히 붉은 한도윤의 낯을 보며 실실 미소를 짓자 녀석이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며 불만을 토로했다.
“…너무 웃는 거 아니에요?”
“귀여워서 그래.”
“그, 그런 말을 막 하는 건 아니죠!”
“왜? 네가 표현해 달라고 계속 얘기했잖아.”
“그건 그렇지만…, 민망하잖아요…….”
민망하다는 사람을 붙잡고 애교 부리면서 표현해 달라 한 사람이 누군데 인제 와서?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리자 한도윤이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제 말에 내가 상처 입었을까 봐 걱정한 탓이었다. 하여간 귀엽긴.
“뭐하러 눈치를 봐. 너랑 나랑 남…인 건 맞지만 완전 남보단 가까운 사이잖아.”
“…그냥 사귀는 사이라고 말해 주면 안 돼요?”
“그렇게 확답이 듣고 싶어?”
내 질문 하나에 고개를 끄덕이는 한도윤을 보니 괜히 귀여워져 아까와 같은 미소를 지으며 녀석의 머리를 헤집듯이 매만졌다. 걱정할 필요 없는데, 정말로. 걱정은 오히려 한도윤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한다. 비주얼만 봐도 나보다 훨씬 매력적인 게 눈에 보이는 녀석이, 굳이? 내가 다른 사람에게 갈까 봐 걱정을?
솔직한 심정으로 말하자면 썩 이해가 가는 상황은 아니었으나 본인이 그렇다는데 내가 뭐라 말하겠는가. 그저 큰 걱정은 하지 않도록 좋게 좋게 얘기하는 수밖에. 좋게 얘기할 것도 없다. 녀석을 대하는 내 행동 하나하나가 충분히 진심이므로.
“너랑 나랑 사귀는 거 맞지. 걱정은 네가 아니라 내가 해야 하는 거야. 넌 너무 잘생겼어.”
“형은 귀엽잖아요. 인터넷에서 보니까 귀여우면 끝이랬어요.”
“…그런 건 또 어디서 봤냐?”
저건 뭐라 말할 수가 없네. 나도 솔직히 따지고 보자면 한도윤이 귀여워서 만난 것도 있으니까. 그냥 행동 자체가 귀여웠다. 콩깍지가 쓰여서 그런 거라고? 그럼 그런 거라 치자.
“그냥 넘어가자. 막말로 내가 너를 두고 다른 데에 눈을 돌릴 것처럼 보여? 나에 대한 신뢰가 그렇게까지 없어?”
“그…건 아닌데…….”
내 단호한 질문에 한도윤이 머뭇거리며 대답을 어물쩍 넘겼다. 봐라, 걱정을 해도 내가 해야지 네가 할 게 아니란 말이야. 막말로 나와 한도윤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외부인을 대상으로 누가 더 의도치 않게 다른 사람을 꼬실 가능성이 높은지 질문한다고 치자. 그럼 열에 열은 한도윤을 선택할 것이다.
얼굴부터 보라고. 가만히 있어도 다른 사람들이 꼬일 거라고. 역으로 내가 다 답답해져 가슴께를 내리치며 한도윤을 가느스름한 눈으로 노려보자 움찔 몸을 떨며 고민하던 녀석은 이내 내 작은 품에 폭 안기며 오로지 나를 향한 애정을 뽐내었다.
“저는 다른 사람 안 봐요. 처음부터 그랬어요.”
“어쩌다 그렇게 됐는데?”
“……솔직하게 말해요?”
그럼 거짓으로 말하리?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묻자 동공을 거칠게 떨며 고개를 푹 숙인 한도윤이 천천히 제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별 이야기는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자연스럽다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이야기였다. 그저 대상이 나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게 느껴졌을 뿐.
“처음에는 독특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런 컨셉으로 즐길 수도 있구나, 딱 그 정도?”
“그래? 하기야, 그때는 내가 거너만 보면 PK를 하고 다녔으니까 희한하게 느낄 수도 있겠네.”
“저도 이렇게 깊게 빠질 줄은 예상 못 했어요. 그냥 같이 있으면 즐거우니까 함께하는 정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점점 보면 볼수록 함께하는 게 좋다는 생각을 했어요.”
“언제부터?”
“……진짜 솔직하게 말하자면 정모 때부터 그랬던 것 같아요.”
적어도 나보다 먼저인 건 알겠다. 나는 진짜 느지막이 알았잖아. 처음에는 체력이 떨어질 대로 떨어져서 두근거리는 줄.
“그럼 지금은?”
“형 없으면 안 돼요. 그럼 진짜 아무것도 안 하고 잠적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