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냐 내 최애를 죽인 게 (76)화 (76/88)

#76

4월에 입대면 제대는 내년 10월쯤인가. 기간 자체는 모두 동일한 1년 8개월이라 한들, 연도로만 따지면 1년이라 그런지 그리 멀지 않게 느껴졌다. 뭐, 솔직히 4월쯤 되면 개강 이후라 졸업 과제 준비한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 한도윤 생각은 잘 안 나지 않을까 싶은데. 심지어는 쟤 입대할 때 나는 중간고사 기간이다. 역시 올해는 크게 생각 안 할 듯?

“이거 말하면 분명 삐지겠지.”

한도윤이 생긴 건 참 무심해 보이는데 속을 까 보면 무른 감 같은 녀석이라서 저 정도 말에도 삐질 거다. 아니, 분명 삐진다. 내 모든 걸 다 걸 수 있다. 느긋하게 들어온 지하철 플랫폼 앞에 서서 이어폰을 꽂았다. 랜덤으로 흘러나온 노래는 잔잔하게 흐르는 것이 꽤 내 취향이었다.

그렇게 멍한 눈으로 집 근처 지하철을 타고 환승역에서 내려 다른 호선의 지하철을 타고를 반복하길 두 번. 가는 과정이 귀찮아 죽겠다는 생각과 동시에 그래도 다른 사람도 아닌 한도윤과의 약속인데 귀찮아하는 것도 좀 그렇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니야…. 귀찮은 건 그냥 귀찮은 거야….”

출구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며 거칠게 숨을 몰아쉰 나는 남은 방학 기간 동안 기필코 운동을 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자고 일어나면 사라질 한철 같은 다짐이었다. 겨울임에도 흐르는 땀을 닦으며 핸드폰을 꺼내 지도 앱을 실행해 약속 장소를 찾아 헤맸다.

분명 지도에서 우측으로 가라고 나와 있길래 우측으로 갔는데 왜 가면 갈수록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지? 보통 갈수록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이 동네 초행이라 그래? 무슨 클자만 올 수 있는 동네야? 잠시 고민한 끝에, 나는 결국 핸드폰을 꺼내 한도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좀 데리러 와.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

데리러 오라고 말이다. 내가 살면서 길치라는 생각은 요만큼도 안 해 봤는데, 오늘은 좀 길치인 것 같다.

-금방 갈게요!

그 말을 남기고 한도윤이 전화를 끊었다. 그에 나는 한 차례 고민에 휩싸였다. 이대로 좀 더 가 볼까, 아니면 그냥 이 자리에서 한도윤을 기다릴까.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주변을 쭉 훑어본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결정을 내렸다. 역시, 쓸데없는 체력 빼지 말고 기다리자.

근처에 쭈그려 앉아 핸드폰을 매만지며 그가 마중 나오기를 기껏해야 5분 정도 기다렸을까, 멀지 않은 곳에서 손을 열심히 흔들며 다가오는 한도윤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핸드폰을 집어넣고 일어나려다가 다리가 저릿해서 살짝 휘청거렸다.

“형! 괜찮아요?!”

“어어, 그냥 쭈그려 앉아 있느라 다리 저려서 그래. 별거 아니야.”

“이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공원 있는데, 거기 벤치에서 쉬고 계시지 그랬어요….”

한도윤은 속상하다는 듯이 내 손을 주물럭거리며 울상을 지었다. 그 모습이 귀엽게 보여 팔을 쭉 뻗어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따, 키 한번 크다. 아니면 내가 작은 건가. 그래도 대한민국 남성 평균 키인데.

“빨리 가자. 나 추워.”

“아, 네! 이쪽이에요.”

막 출구 밖으로 나왔을 땐 더웠는데 기다리는 사이 땀이 식어 추워졌다. 으슬으슬 떨리는 몸에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한도윤의 뒤를 따라갔다.

오늘의 목적지는 다름 아닌 한도윤의 자취방이었다. 살짝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의 집 안에 들어간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뭐지. 대학생 자취방치고는 방이 세 개나 되는데?

“이쪽 방이 침실이고요, 여기는 컴퓨터방. 아, 그리고 여기는 옷방이에요.”

“혼자 사는 거지?”

“당연하죠.”

“내가 아는 대학생의 자취방이랑 좀 다르네.”

보통 자취방 하면 방 한 칸에 식탁 놓을 자리조차 마땅찮아서 바닥에 튼튼한 박스 하나 놓거나 아니면 컴퓨터 책상에서 먹지 않나? 근데 여기는 널찍한 데다 인테리어도 단정하고 말끔했다. 꼭 흔히들 말하는 모델 하우스처럼 생겼다. 물론 내가 그쪽에 대해 잘 모르니 뭐라 할 수 없긴 한데….

얼떨떨한 눈으로 집 안을 쭉 훑으며 백팩을 열어 가져온 집들이 선물을 꺼냈다. 별건 아니고 집들이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휴지 묶음이었다. 제일 큰 묶음은 아니어도 꽤 큰 가방을 꽉 채우는 크기라, 선물을 꺼내고 나니 가방이 텅 비었다. 마음 같아서는 더 큰 걸 사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만한 부피를 짊어지고 대중교통을 탈 자신이 없었다.

“휴지는 많이 쓰니?”

“언제 떨어질지 모르니까 많으면 많을수록 좋죠. 고마워요.”

빈약한 선물임에도 정말 기쁘다는 듯이 웃는 한도윤을 보니 양심의 가책이 찔려 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양손 가득 휴지를 들고 올 걸 그랬나 봐. 너무 생각이 짧았네.

“식사는 하셨어요?”

“아니, 안 먹었어.”

“제가 맛있는 거 해 드릴게요! 여기서 잠깐 기다리세요!”

“잠깐 놀러 온 거 가지고 그렇게 안 해도 되는데….”

“제가 해 드리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앞치마를 맨 한도윤이 고운 미소를 그리며 주방으로 가 요리를 시작했다. 솔직히 라면 끓이는 것 외엔 할 줄 아는 요리가 없는 나로서는 쟤가 도대체 뭐 하는 건지 봐도 모르겠다. 한도윤은 냉장고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도마 위에 올려서 칼로 슥슥 자르고, 그걸 프라이팬에 집어넣더니 그 위로 처음 보는 걸 뿌려 댔다.

“그게 뭐야?”

“이거 통후추예요.”

내가 아는 후추랑 다르게 생겼네. 요리 알못은 그저 그렇구나 하고 웃으며 입을 꾹 다물 뿐이었다. 모르는데 아는 척하는 것도 좀 그렇고… 어련히 먹을 수 있는 거로 해 주겠거니, 하는 마음이 컸다.

“저 뭐 물어보고 싶은 거 있는데. 괜찮아요?”

“뭔데?”

“저 제대했을 땐 형은 이미 졸업했을 거잖아요.”

“그렇겠지?”

너 제대할 때까지 졸업 못 하면 학과의 암모나이트가 되지 않을까? 딱히 부정할 것도 없는 말이라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자 한도윤이 프라이팬에 든 재료를 휘저으며 마저 말을 이었다.

“그럼 저 제대하고 나서 저랑 같이 살래요?”

“…예?”

아직 2년이나 남은 이 시점에요? 느리게 눈꺼풀을 깜빡이던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헤벌렸다. 쟤 지금 뭐라니.

(2)

“…싫어요?”

그릇을 꺼내며 내 눈치를 보는 한도윤의 말에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아니, 어떻게 보면 나한테도 이득 아닌가? 지금 살고 있는 자취방에서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니니까 차라리 졸업 후에 한도윤한테 빌붙는 것도….

“싫은 건 아니고… 조금만 생각해 봐도 돼?”

“당연하죠.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니잖아요.”

막연히 빌붙는 건 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때 되면 집세가 얼마인지 물어보고 반반 내면 되겠지. 그때쯤 되면 나도 어느 정도는 자리를 잡지 않았겠어? 물론 인생사 확실한 건 하나도 없으니 또 모를 일이긴 하다만.

그나저나 나 자취방 계약 기간이 얼마나 남았더라. 2년 계약이라 아마 내년 초에 끝날 텐데. 그때가 딱 졸업 후니까 취직한 회사 근처로 이사할 것이고, 그럼 또다시 2년 계약을 하게 되겠지. 기본적으로 월세든 전세든 집 계약은 보통 2년이니까 말이다.

“기간이 애매한데?”

“무슨 기간이요?”

“나 지금 자취방 계약이 끝나 가서, 졸업하자마자 그때 취직한 회사 근처로 이사할 생각이었거든. 보통 집 계약이 2년이니까, 너 제대하고 나서 1년은 더 기다려야 할걸?”

“저는 기다릴 수 있어요. 형도 저 군대 기다려 주기로 했잖아요.”

웃음기 가득한 한도윤의 목소리를 들으며 테이블 위에 팔을 올려놓고 턱을 괴었다. 너무 당연하게도 미래를 생각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하루 벌어 하루 살겠다는 일념으로 그날그날 할 것만 생각하지, 저렇게 가깝고도 먼 미래까지는 생각 안 해 봤다. 필요성도 못 느꼈고.

“그래. 그때 가서 되면 같이 살지 뭐.”

“…정말요?”

“뭐 어려운 거라고.”

어차피 네가 나 먹여 살릴 거잖아. 농담처럼 던진 한마디에 한도윤이 무척이나 예쁜 미소를 지었다. 뭐냐, 여기 어디에 조명 켜 놨니? 눈이 좀 따갑네.

“자, 다 됐어요. 드세요.”

식기류에 관심이 없는 내가 봐도 예쁘게 생긴 접시 위에 큼직한 스테이크가 곁들임 채소와 함께 올려져 있었다. 윤기가 좔좔 흐르는 걸 보니 침이 절로 넘어간다. 한도윤에게서 포크와 나이프를 받아 고기를 썰어 냉큼 한 입 맛본 나는 작게 감탄을 흘렸다.

“이야, 너 요리 잘하는구나?”

“입에 맞아요?”

“어, 맛있어.”

아무리 막입이라 아무거나 잘 먹는다 해도 역시 맛있는 건 달라도 달랐다. 느끼하지도 않고 술술 들어가는 고기를 열심히 씹어 먹으며 흐뭇하게 웃고 있는 한도윤의 시선을 한 눈으로 보고 흘렸다. 밥 먹는데 쳐다보지 마. 눈치 보여서 체할 거 같잖아.

“…왜 그렇게 봐?”

“형이 밥을 제대로 안 먹어서 걱정이었는데 잘 먹는 거 보니까 안심이 돼서요.”

“그렇게 안 먹지는 않는데….”

“거짓말하지 말아요. 잘 먹는 사람은 그렇게 마르지 않아요.”

내가 말라 봤자 얼마나 말랐다고. 괜한 반항심이 생겨 보기보다 그렇게 마르지 않았다고 일갈하자 한도윤이 웃던 낯을 싹 지우고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눈깔을 왜 그렇게 떠? 지금 싸우자는 거야?

“자신 있으신가 보네요? 형, 그럼 지금 체중계 있는데 한번 재 볼까요?”

“…어?”

“참고로 형 정도 키면 65kg은 나가야 표준 몸무게인 건 알죠?”

뭐라고? 65kg…? 동공이 거칠게 흔들린다. 잠깐, 내가… 몇 kg이더라?

“자, 가져왔으니까 이제 올라가시면 돼요.”

“어, 어어….”

내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한도윤이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체중계를 가지고 왔다. 뭐야, 너 왜 내 몸무게에 진심인 건데…? 이게 그렇게 의미가 있는 건가. 그냥 살이 찌면 찌는 대로 빠지면 빠지는 대로 살면 되잖아? 안 그래도 먹고 살기 팍팍한 세상에서 그런 걸 하나하나 재 가면서 살아야 하냐고.

“…알았다. 까짓거 한번 해 보죠.”

눈빛으로 무언의 시위를 하던 나는 산뜻하게 웃으며 내 팔을 잡고 이끄는 손길에 울상을 지으며 따라갔다. 몸무게에 신경 써 본 적 없다 보니 나도 잘 기억 안 나는데…. 진짜 65kg을 못 넘기면 어떻게 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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