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와악! X발, 차가워!”
그렇지. 차갑겠지. 찬물을 틀었으니까 차가운 게 맞지! 황급히 머리를 빼고 수도꼭지를 잠근 나는 물에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다시 방 안으로 돌아왔다. 미친, 몸살 나은 지 얼마나 됐다고 이 짓거리를 했지? 또 몸살 걸리려고?
추위에 덜덜 떨며 전기장판 위로 몸을 눕힌 나는 아직 젖어 있는 머리를 깨닫고 상체만 다시 일으켜 앉았다. 내가 아무리 드라이기 안 쓰고 자연 건조 시키는 편이라 해도 젖은 머리로 눕기는 좀. 뚝뚝 떨어지는 물기를 쉼 없이 수건으로 털며 한 손으로는 핸드폰을 집었다. 문영윤이라도 불러서 술 먹어야지.
“…어라?”
잠시 화장실을 갔다 온 사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도윤에게서 연락이 와 있었다. 그것도 부재중 전화를 한 통 남긴 뒤 개인 톡이 날아왔다. 타이밍 한번 거지 같네? 하필이면 자리 비웠을 때 연락이 왔네? 이런 젠장!
수건을 바닥에 패대기친 나는 공손하게 무릎을 꿇은 자세로 개인 톡을 확인했다. 아, 잠깐. 나 심호흡 좀 하고. 짧게 심호흡한 후 곧바로 톡을 확인한 나는 이윽고 핸드폰까지 패대기쳤다. 물론 핸드폰을 부서지면 안 되니까 침대에 던졌다.
[한도윤: 형 바빠요?]
[한도윤: 저 형 동네 근처인데]
[한도윤: 혹시 안 바쁘시면 연락 주세요]
“미친, 미친, 미친!”
평소 거들떠보지 않았던 드라이기를 꺼내 급하게 머리를 말린 뒤 옷을 갈아입었다. 최대한 깔끔한 거로 고르다 보니 얼결에 과거 정모 전날, 문영윤이 골라 줬던 옷을 입게 되었다. 내가 가진 옷 중에 이게 제일 낫긴 하더라.
[ㅇㄷ]
[위치 ㄱ]
옷을 입으며 한도윤에게 톡을 보내 놓은 나는 이윽고 패딩을 걸친 뒤 다시 핸드폰을 집었다. 혹시 또 한참 기다려야 하는 건가 싶었던 걱정과 달리, 답장은 빠르게 도착해 있었다.
[한도윤: 저희 저번에 갔던 호프집에 있어요]
[한도윤: 미리 주문해둘 테니까 천천히 오세요]
[ㅇㅋ]
답이 짧아서 미안하다. 빨리 가려고 하다 보니 이게 이렇게 되지 뭐야. 나는 핸드폰과 지갑을 패딩 주머니에 쑤셔 넣자마자 빠르게 현관을 나섰다. 피부를 감싸는 겨울바람에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빠른 걸음으로 호프집을 향해 걸었다.
아, X나 추워. 와중에 뛰기엔 체력이 후달려서 어쩔 수 없이 걸어야 했다. 아직 스물여섯의 젊은 나이지만 한 살 한 살 먹을 때마다 그만큼 체력도 디버프 먹어서 떨어지기만 했다. 빠른 걸음으로 걸었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중간중간 숨이 턱 막힐 정도의 쓰레기 체력이었다.
그렇게 내 딴에는 최대한 빠르게 호프집에 도착한 나는 청량한 종소리를 내는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따뜻한 공기에 숨을 깊게 내쉬었다. 와, 한참 걸었더니 지금은 또 덥다. 팔한지옥에서 팔열지옥으로 넘어온 기분이야.
“아, 형! 여기예요.”
“…오래 기다렸어?”
“아뇨. 그렇게 오래 안 됐어요.”
나름 반갑게 인사하려던 나는 어쩐지 수척해 보이는 한도윤의 얼굴에 잠깐 멈칫했다. 뭐지. 얼마나 바빴으면 애 얼굴이 반쪽이 됐지? 잘생긴 건 여전하다만, 그래도 잘 먹고 잘 자야지 저게 뭐야.
“별일 없다더니… 아무리 봐도 무슨 일 있는 얼굴인데? 너 괜찮아?”
“네. 괜찮아요.”
분명 예쁘게 웃는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영 매가리가 없다. 자리에 앉으며 심각하게 한도윤의 얼굴을 요모조모 살펴본 나는 이마를 팍 때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딱 봐도 뭔 일 있었네. 보통 이런 낯짝을 띤 애들은 육체적으로 문제가 있다기보단 심적으로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다죠.
“거짓말하지 마. 딱 보면 척이거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냥… 마음고생할 일이 있었어요.”
“어쩌다가? 일이 그렇게 힘들었어?”
대학생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더라. 아르바이트? 새삼 한도윤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이 와닿아 입 안이 쓰게 느껴졌다. 알바생을 불러 맥주를 주문한 뒤 겉옷을 벗어 옆에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고민 있으면 다 들어 줄게. 뭐든 말해. 네가 날 얼마나 많이 도와줬는데 그 정도도 못 해 주겠냐?”
“…정말요?”
한도윤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제 앞에 있는 맥주를 쭉 들이켰다. 무슨 고민이기에 술로 긴장을 풀어?
“이게 좀처럼 입 밖으로 안 나오네요….”
“뭔데?”
“그… 저…….”
양손을 꽉 쥐며 여전히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모습에 고구마를 오조 오억 개 먹은 것처럼 답답해졌다. 그냥 말하면 안 돼? 차마 면전에 대놓고 가슴팍을 내리칠 수는 없어 때마침 나온 맥주를 그 자리에서 원샷했다. 탄산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니 좀 살 것 같다.
그러나 잔을 내려놓자마자 나오는 말 한마디에 손끝이 멈칫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러니까… 뭐라고? 내가 지금 들은 게 진짜인가? 내 귀가 잘못된 것도 아니고, 내 머리가 잘못되어서 이해를 못 하는 것도 아니라, 들은 그대로의 말인 건가?
“형… 저 군대 가요…….”
“예?”
두 눈만 끔뻑거리며 말을 곧이곧대로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멍한 눈으로 가만히 한도윤을 바라보고 있자, 녀석이 옥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훌쩍거렸다. 와, 군대 간다고 우는 애는 문영윤 외에 처음 보는데?
“아, 아니 이게 아니지. 그러니까… 군대를 가신다?”
“네….”
“영장 떴어?”
“네…….”
보통 이맘때쯤에 영장이 나오던가? 멍한 눈으로 한도윤을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을 닦고 있는 그의 모습에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맥주를 한 잔 더 주문했다. 딴 건 잘 모르겠고, 일단 마시자. 원래 슬픈 일은 술로 푸는 거랬어. 누가 그랬냐고? 내가 그랬다.
“언제 가는데?”
“4월이요….”
“너, 네가 직접 신청했냐?”
“그… 홧김에 그냥…….”
머릿속에 상황이 절로 그려진다. 대학생들은 재학 중이면 본인이 먼저 신청하지 않는 이상 졸업할 때까지 입대를 미룰 수 있다. 그러니까 뭐 때문인진 몰라도 홧김에 입영 신청을 했는데, 때마침 공석이 있어서 거기에 끼워 맞춰졌겠지.
“와… 진짜 말이 안 나오네.”
언젠가 갈 거라는 생각은 했다. 이제 막 성인, 올해로 스물한 살 되는 녀석이니 군대에 갈 거란 생각을 안 했었겠는가. 문제는 그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는 거지. 그동안 해 왔던 모든 고민은 부질없는 짓이었구나. 괜히 허탈해져 헛웃음을 흘리며 새롭게 주문한 맥주를 들이마셨다.
“잘 다녀와. 네가 신청했는데 뭐 어째. 가야지.”
“그…래야죠…….”
“오, 어지간히 후회되나 본데?”
“조금요….”
자세하게 들리진 않았으나 작은 목소리로 무어라 중얼거리는 것이 들린다. 저거, 저거 정신 줄을 아예 놔 버렸네. 맥주를 홀짝이며 문득 떠오른 궁금증에 입을 열었다.
“홧김에 신청했다며. 뭐 때문에 그랬는데?”
“속앓이하던 게 하나 있었는데… 그거 때문에요. 아무리 생각해도 가망이 없어 보였거든요.”
도피처로 군대를 선택했다는 거구나. 뭘 얼마나 앓았으면 군대로 피할 생각까지 했냐. 궁금증이 이는 한편으로 동시에 가라앉는 기분에 조용히 맥주만 마셨다. 그래도 4월에 간다고 했으니까 아직 석 달 남짓 남았네. 남은 석 달 재밌게 돌다가 배웅이나 해 줘야겠다. 마음도 좀… 정리하고.
그나저나 보통 저런 식으로 군대 가는 경우는 대부분이 연애 때문이던데…. 내 동기들 중에서도 뜬금없이 입대 신청한 애들은 고백하다 차여서, 혹은 CC였다가 깨져서가 이유였다. 나 같은 경우엔 대학 1년 다니고 그다음 바로 군대 가는 게 낫다는 얘기를 들어서 그렇게 했었고.
“그래서… 입대 전에 속앓이하던 거 다 끝낼 생각이에요. 가망 없는 건 없는 거고, 이대로 군대 2년 보내 봤자… 미련만 남을 것 같았거든요.”
“잘 생각했네. 나중에 후회할 바에는 그게 훨씬…….”
“저 형 좋아해요…. 그거 말하고 싶었어요.”
“더… 예?”
뭐라고요?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그가 잘게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은 발언은 내가 상상도 못 한 내용이었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의심스러워져 귓구멍을 후벼 파며 되묻자, 그는 여전히 물기가 가득한 눈으로 씁쓸하게 웃으며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
“저 형 좋아해요.”
“…이 상황에?”
“저도 이런 식으로 말하고 싶진 않았어요. 근데 곧 군대 가잖아요.”
“아직 몇 달 남았잖아?”
“그… 남은 기간 동안 게임이랑 방송 다 정리하고 잠적할 생각이라….”
…아무리 그래도 보통 이걸 이렇게 대놓고 얘기하나? 요즘 애들은 원래 이래? 내가 노땅인 거야?
“아까 말했잖아요. 어차피 가망 없다는 거 다 안다고…. 주변에 다른 사람들은 괜찮으니까 밀어붙이라고 그랬는데, 제 스스로가 자신 없는 걸 어떡해요. 그래서 그냥… 마지막으로 얼굴 보고 얘기한 다음에 조용히 연락 끊을 생각이었어요.”
형한테는 거짓말하기 싫어서 잠적한다는 것까지 얘기한 거고요.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한도윤의 말에 머리가 띵해졌다. 어허…, 와…, 이거 참…. 내가 여기서 뭐라고 대답해도 누구 하나는 입장이 되게 묘해지지 않나?
“왜 그렇게 생각하지?”
“…네? 뭐가요?”
“왜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생각했지? 참 이해가 안 되네.”
그나마 다행인 게 뭔지 아는가? 처음에는 초조했고 그다음에는 어이없어서 할 말을 잃어버렸던 내 마음에 안정이 찾아왔다는 것이다. 너무 안정적이라 평소와 다름없는 언행을 할 수 있다는 게 이렇게 행복한 일인 줄 몰랐다. 앞으로 주변에서 누가 짝사랑 중이라 할 때 잘해 줘야지. 내가 겪으니 이게 또 새롭네.
“기다려 줄게. 잘 다녀와.”
“네?”
“여기 맥주 하나 추가요.”
“혀, 형? 잠시만요! 방금 그거 무슨 뜻이에요?”
“너 땅 파는 솜씨가 일품이더라. 군대에서 좋아하겠어.”
위에서 산 까라고 하면 까야 하거든. 네 솜씨면 기립 박수 쳐 줄 듯. 추가로 나온 맥주를 마시며 힐끗 한도윤을 쳐다보자 얼빠진 얼굴로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말뜻을 이해했는지, 녀석은 힘없는 한숨을 흘리며 양손에 제 얼굴을 묻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입대 신청 안 하는 건데….”
“어차피 다녀와야 하는 거니까 좋게 생각하고 갔다 와.”
“그렇지만 저 제대하고 나면 형은 사회인이잖아요….”
무슨 소리. 네가 군대를 언제 가든 나는 너보다 먼저 사회인이 돼. 저거 아주 그냥 헛소리하는 거 보니 살짝 취했네.
“건배하게 잔 들어.”
내 말에 잔을 든 녀석은 팔을 뻗어 제 잔과 내 잔을 부딪쳤고 유리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치맥의 밤이 무르익었다. 시원한 맥주를 홀짝인 뒤 곧바로 치킨을 뜯을 수 있는 여기가 바로 천국이네. 역시 치맥은 언제나 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