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오늘부터 네 집은 여기 쓰레기 더미 위입니다. 네 친구한테 데리러 와 달라고 하든가.”
남자한테 장미 꽃다발 선물을 주라고 한 개소리 장인이자 너의 메가 베스트 프렌드, 연중무휴가 있잖아? 네 정신으로는 연락 못 보낼 테니 내가 대신 연락해 주마. 그 정도 서비스는 해 줄 수 있다.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한도윤이 닭똥 같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저… 싫어요……?”
“하…….”
“왜… 싫어요? 알려 주면… 고칠게요…….”
일단 주정 부리는 게 너무 싫고요, 사는 게 힘이 드네요. 처음에 봤을 땐 이런 이미지가 아니었는데….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리며 한도윤 앞에 앉아 녀석을 달랬다.
“내가 왜 널 싫어해. 오히려 좋아하지.”
“어라, 진…짜요?”
“어.”
그래서 지금 이 고생을 하고 있잖아. 거칠게 뛰는 심장을 애써 짓누르며 어색한 미소를 그린 나는 한도윤의 팔을 붙잡고 그를 일으켰다.
“그러니까 집에 가자. 술도 못하는 게 왜 이렇게 퍼먹었어. 나 근력 부족이라 나보다 큰 사람 못 옮긴단 말이야.”
“저 하나도 안 취했어요!”
“레퍼토리 다 똑같네. 주정뱅이들끼리는 뇌트워크라도 통하는 거냐?”
원래 술 취한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본인은 안 취했다고 하는 법이다. 알코올 쓰레기가 무슨 근자감으로 퍼먹은 건지. 나한테는 간에 기별도 안 가는 양이라지만 인마는 아니잖아. 잠시 한도윤을 자리에 두고 일어난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카운터에서 계산부터 끝냈다.
그리고 결국, 한도윤의 땡깡을 이겨 내지 못한 나는 술 취한 개새끼를 업고 집으로 향했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데다 무게도 더 나가는 녀석을 데리고 가기엔 내 근력이 너무도 쪼들려 영 진도가 안 나갔다. 더불어 한 손에는 한도윤이 선물이랍시고 준 꽃다발이 들려 있어 더더욱 속도가 느렸다. 와아, 한겨울인데 땀이 다 나네. 여름인 줄?
“X발… X바아아알……! 내가 X발! 너랑 또 술 먹으면! 그 자리에서 내 대가리를 깬다! 내가 X발, 사람 새끼가 아니다!”
“화…내지 마요…. 마음, 아파…….”
“지랄이 심하시네요! 이 상황에서 화 안 내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 진중하고 침착한 스님들도 아수라가 돼서 죽빵을 날릴 판국인데!”
“혀엉… 불교에요? 그럼 나도… 오늘부터 불교 해야지….”
“무교! 무교다, 이 새끼야!”
한놈 님의 ‘아뇨, 불교인데요.’가 생각나서 스님 얘기 한번 해 봤 Die 새끼야! 거친 숨을 몰아쉬며 후들거리는 다리에 애써 힘을 주어 앞으로 나아갔다. 평범하게 걸어갔으면 집까지 5분이면 갈 거리를 지금 몇십 분째 걷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중간에 누구 아는 사람 하나만 만나서 나 좀 도와줬으면 좋겠다. 나중에 내가 밥 살게. 제발….
그러나 안타깝게도 종종 마주치던 동기들은커녕, 지나가는 사람 하나 보지 못했다. 유일하게 본 것은 고등어 무늬를 한 고양이 한 마리가 전부였다. 오늘 다들 놀러 나갔냐? 왜 아무도 없어? 나 진짜 이러다가 탈진으로 죽겠어.
“너… 어윽……. 너 걸을 수 있으면, 좀, 네 발로 좀 걸어 봐….”
“예…에…?”
“돌겠네. 그냥 다 죽었으면 좋겠다.”
주차장 위치만 알았더라면 대리 기사를 불러서 보내 버렸을 텐데! 일단 태워 놓으면 집 주소야 알아서 말할 거 아냐. 지도 집에 가긴 해야 할 테니까. 이마를 팍팍 때리며 정신적 고통을 줄이는 도중, 제 발로 일어선 한도윤이 내 양손을 꽉 붙잡았다. 또 뭐. 또 뭔데.
“왜 때려요…. 그럼 아프잖아요.”
“너 때문이잖아요. 일어설 수 있으면 걸을 수도 있겠네. 이제 네 발로 걸으세요.”
“제가… 제가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때리지 마요. 응?”
속이 아프다. 신경성 위염이 재발한 것 같다. 어금니를 꽉 깨물며 미소 지은 나는 깊은 빡침을 가라앉히기 위해 나직이 숨을 내쉬었다.
“을읐으느끄… 그믄흐즈….”
평소라면 내 짜증을 바로 눈치챘을 법한 녀석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을 하며 헤실헤실 웃음을 흘렸다. …귀여워 보이면 지는 거랬다. 뇌에 힘주고 참아, 나 새끼야.
“이제 걸을 수 있지? 팔 잡아 줄 테니까 조심… 야야, 잠깐만!”
그렇게 그의 팔을 붙잡고 한 발 한 발 이끄는데, 그가 갑자기 크게 움직이더니 내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도윤의 돌발 행동에 다급하게 팔을 뻗어 그를 막으려 했다. 술 먹고 넘어지면 다친다고! 그냥 다치는 게 아니라 쪽팔리게 다친다고!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휘청거리는 한도윤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나를 똑바로 마주 보며 화사한 미소를 짓는 그의 얼굴에 멈칫해 버렸다. 뭐지, 데자뷔가 느껴지는데. 멍하니 한도윤을 올려보던 나는 갑자기 가까워지는 그의 얼굴에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뭐냐고, 진짜….”
가까워진 얼굴에 당황하는 사이, 한쪽 볼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닿았다 떨어졌다.
헤실거리며 웃고 있는 한도윤을 바라보며 한 손으로는 내 뺨을 감싸 쥐었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나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한도윤의 팔을 쥐고 있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형?”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실없는 웃음을 흘리는 녀석의 뒤통수를 냅다 후려쳤다. 아무리 주정이라지만 사람 속도 모르고 이딴 짓을….
“알아서 집에 가든지, 말든지.”
나도 이제 모르겠으니까. 그렇게 그를 버려두고 다리에 힘을 주어 집으로 향했다. 답답한 속에 울컥한 나머지 눈가가 시큰거린다. 핸드폰을 꺼내 정태원에게 얼른 와서 네 친구나 데리고 가라 연락을 남기는데 뒤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혀엉! 같이 가요!”
당연하게도 한도윤이었다. 술에 취해 어눌한 발음으로 나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순간 걸음을 멈칫했으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걷기만을 반복했다. 걸으면 걸을수록 한도윤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이윽고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자 나는 옷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스스로가 너무 못나 보였다. 잘해 줘도 될락 말락 할 텐데, 그놈의 욱하는 성격 때문에 말아먹은 것 같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건 아니잖아.”
아무리 몰랐다 해도, 그저 술주정에 불과하다 해도, 속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잖아.
“X발…….”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 나는 씁쓸한 미소를 흘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한동안 게임할 생각은 안 들 것 같은데, 뭘 해야 하나.
(3)
방금 잠에서 깨어나 멍한 정신으로 느리게 눈꺼풀을 움직였다. 그날 이후로 벌써 일주일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게임 접속은 물론이요, 길드 단톡이나 갠톡으로 오는 연락도 모두 씹었다. 정신이 혼란할 때마다 잠수 타는 건 안 좋은 버릇인데, 영 고치기가 힘들다.
“아… 피곤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거늘, 온몸에 피곤함과 나른함이 엄습해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그러고 보니 목이 좀 칼칼한 것 같기도 하고.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하려는데, 땅에 발을 디디자마자 다리가 풀리며 몸뚱이가 힘없이 무너졌다. 나는 얼떨떨한 낯을 띠었다.
다리에 힘을 주는 것이 힘들다. 아니, 더 깊게 파고들자면 숨을 쉬는 것 자체가 힘들게 느껴졌다. 쎄한 기분에 어기적어기적 땅바닥을 기어 책상으로 향한 나는 서랍에 넣어 둔 체온계를 꺼내 체온을 재었다.
“와… 38도…….”
거의 연례행사구나. 성인이 되고 난 후부터 이상하게도 연초만 되면 몸이 안 좋았다. 감기에 걸려 열이 오르는 일도 일상다반사였고, 열이 안 난다 싶으면 체기가 내려가지 않아 고생했었다.
“그래도 기침은 안 나네.”
단순 몸살인 건가. 나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나직이 헛웃음을 흘렸다. 머리에 열이 오를 대로 올라서 그런지 정신이 멍해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느릿하게 땅바닥을 기어 화장실로 향한 나는 찬물로 세안을 한 뒤 다시 바닥을 기었다.
허기가 지는 느낌이 들어 슬쩍 주방 쪽을 쳐다봤다. 배는 고프지만 무언가를 먹고 싶지는 않았다. 아프면 식욕이 사라진다고 하던데, 그게 지금 상황인가. 침대에 등을 기대어 앉은 채로 손만 뻗어 핸드폰을 찾았다.
전원이 꺼져 있던 핸드폰을 켜자 이 사람 저 사람에게서 온 연락들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쉼 없이 새로운 메시지가 올라오는 단톡방은 물론이요, 장기간 내가 나타나지 않자 길드원들에게서 갠톡까지 도착해 있었다.
[임효린: 정우야 혹시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임효린: 요즘 안 보여서 걱정되길래 연락했어]
[임효린: 내가 도와줄 거 있으면 꼭 말해줘]
베타 누나부터 시작해서,
[김현호: 무슨 일 있으십니까?]
[김현호: 걱정되어 연락드렸습니다.]
[김현호: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한놈 님에,
[이세영: 요즘따라 평소랑 조금 다르신 거 같던데...]
[이세영: 무슨 일 생기신 건 아니죠??ㅠㅠ]
뚝배기장인까지. 따로 그들에게 잘해 준 기억이 없음에도 그들은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새삼 내가 인복은 있구나 하는 생각에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한도윤: 형]
[한도윤: 시간 되실 때 꼭 연락 주세요]
[한도윤: 형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한도윤…….”
그에게 연락이 왔을 거라 예상하긴 했지만, 막상 두 눈으로 확인을 하고 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하고 싶은 말이라, 저번에 같이 술을 마셨을 때, 아직 때가 아니라 나중에 말하겠다던 그 말을 하려는 걸까.
“무슨 말을 하려고….”
걱정과 두려움이 앞선다. 혹시 평소와 달라진 내 행동으로 그가 이미 눈치챈 건 아닐까? 무어라 하기도 전에 거절부터 듣게 된다면…. 쓴웃음을 지으며 갠톡들에 하나씩 답장을 보냈다.
[몸이 안 좋아서 연락 못 했어요]
[그냥 몸살이 온 거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렇게 핸드폰을 내려놓은 나는 지끈거리는 두통에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숨을 쉴 때마다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열기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