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아,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에요!”
한도윤이 다급하게 손사래를 치며 해명하려는 찰나 맥주와 콜라가 나왔다. 그는 입을 연 상태 그대로 멈췄다가 음료 잔을 내려놓는 알바생을 흘겨보더니, 벌어졌던 입을 꾹 다물며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지자 웃는 낯으로 다가왔던 알바생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린다.
“으, 음료 먼저 드리겠습니다아…….”
“커험…. 감사합니다.”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그냥 흔한 겜창들이라고요. 옆 걸음질으로 사라지는 알바생을 흐릿한 눈으로 바라본 나는 이내 고개를 돌려 한도윤을 응시했다.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왜 웃으세요?”
“그냥요.”
아무 이유 없이 웃게 된다. 할 말이 없어서 그냥이라 한 게 아니었다. 나는 실없이 흘러나오는 웃음을 막지 않은 채 차가운 맥주잔을 매만졌다. 유리잔 바깥에 맺힌 물기가 손끝에 묻어 나온다.
“내일 일정 없어요? 어디 사는진 몰라도 집에서 여기까지 꽤 멀 텐데.”
“아, 괜찮아요. 일정 없어요.”
“그럼… 왜 여기까지 올 생각을 했어요? 그냥 톡이나 전화로 말해도 되잖아요.”
“그건…….”
내 질문에 한도윤이 잠시 머뭇거렸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무언가 켕기는 게 있음을 눈치챈 나는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의구심을 품은 내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던 한도윤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슬쩍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투, 아니, 영윤이 형이 형 화난 거 같으니까 찾아와서 얼굴 맞대고 얘기해 보라고 하시길래, 찾아왔어요.”
“문, 영윤이 그런 말을 했어요?”
“네…. 얼굴 보고 얘기하면 화 풀 거라고 그래서…….”
“하……. 그래요?”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온다. 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빠득 이를 갈았다. 문영윤, 이 깜찍한 새끼. 내 기분이 별로인 걸 그 자리에서 눈치채고 한도윤을 부른 거구나. 무엇 때문에 기분이 더러워졌는지는 몰라도 풀고 끝내라고.
“이런 깜찍한 새끼를 다 봤나.”
“그, 그, 제가 상담하다가 그렇게 된 거예요! 영윤이 형은 잘못 없…!”
“알아요. 걔한테 화낼 생각도 없어요.”
내가 그랬잖아요, 깜찍한 새끼라고. 나는 깍지를 낀 손에 턱을 괴며 흐릿하게 웃었다. 다음에 문영윤을 보게 되면 맛있는 거라도 하나 사 줘야겠다. 아니지, 직접 얼굴 맞대기 귀찮으니까 기프티콘 같은 거라도 하나 쏴 주면 되지 않을까.
“그래도 얼굴 보니까 화가 풀리긴 하네.”
“네? 그… 제 얼굴이요?”
“네. 댁 얼굴이요.”
일단 기본적으로 잘생겼잖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잘생기고 예쁜 사람을 보면 기분이 풀리는 법이다. 한도윤은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기울이더니, 이내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손등으로 제 입가를 가렸다.
“그, 어,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어깨를 으쓱이며 한 말에 한도윤이 환하게 웃으며 예쁜 미소를 지었다. 참, 얼굴로 이 사람 저 사람 다 홀리게 생겼네. 확신컨대 이건 콩깍지 같은 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판단한 팩트였다. 음료를 마시며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사이 음식이 나오고, 한도윤이 무언가 떠오른 듯 표정을 굳히며 멈칫했다.
“왜 그래요?”
“그… 차에 두고 온 물건이 생각나서요…. 지금이라도 가져와도 될까요?”
“뭘 그런 걸 물어봐요. 다녀오세요.”
“그, 금방 다녀올게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한도윤이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차에 두고 왔다는 건, 자차를 타고 왔다는 뜻인가.
“좋겠네. 나는 면허도 없는데 말이야.”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자차를 타고 왔던가. 그때는 그리 주의 깊게 보지 않아서 크게 기억에 남지 않았다. 맥주를 홀짝이며 한도윤이 돌아오길 기다리길 10여 분, 돌아온 그를 반기려던 나는 한도윤의 손에 들린 ‘물건’을 확인하고 먼 산을 응시했다. 시방, 저게 뭐시여?
“이거, 그, 선물이에요.”
“…아, 네. 뭐, 네.”
꽃다발이다. 그것도 장미 꽃다발. 크기가 큰 꽃다발은 아니고 작은 사이즈인데, 그… 뭐라고 해야 할까. 같은 남자한테 받기엔 부담스럽게 생긴 선물이었다.
“그… 꽃잎 색이 독특하네요.”
“예쁘죠? 신경 써서 골랐어요.”
그러니까 왜? 장미는 겉으로 푸른빛이 돌면서 안쪽은 분홍빛을 띠었다. 내가 아는 장미는 빨간 장미, 노란 장미, 하얀 장미뿐이라 이런 건 처음 본다.
“오로라 장미라는 거예요.”
“아, 예.”
이름도 따로 있구나. 품종 개량한 장미인가 봐. 아니면 말고.
“거… 으음…… 크흠, 선물, 고마워요.”
“마음에 드신다면 다행이에요!”
감사 인사를 받은 게 기쁘다는 듯, 수줍게 미소 짓는 훤한 얼굴을 보니 뭐라 하기 힘들었다. 그래, 선물이니 감사히 받으면 되는 거지. 다른 사람이면 이 새끼가 날 멕이려고 이런 걸 가져왔나 했을 텐데 이 양반이 그럴 것 같진 않다.
꽃다발을 한쪽에 내려놓은 나는 자꾸만 흔들리는 동공을 애써 갈무리하며 입가를 비틀었다. 나도 한도윤처럼 예쁘게 웃고 싶은데 상황이 안 따라 주네? 하하. 해맑은 표정으로 치킨을 집어 먹는 한도윤을 보며 눈가를 가늘게 떤 나는 목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그, 크흠…. 근데 이, 꽃다발은 어쩌다 가져온 거예요?”
“아, 그거요? 그… 선물을 드리고 싶은데 뭐가 좋을지 고민돼서 친구한테 물어봤더니 꽃다발이 좋을 거라고 추천받았어요.”
“…혹시 그 친구가 이번에도 연중무휴 님인가요?”
“어? 어떻게 아셨어요?”
깜짝 놀랐다며 두 눈을 동그랗게 뜨는 한도윤을 보니 짠한 마음이 들었다. 딱 봐도 멕이려고 그런 건데 전혀 눈치를 못 챘을 줄이야. 이 순진한 사람을 어쩌면 좋아. 누가 좀 도와줘 봐.
“…저번에 손절각 씨게 왔다고 하더니.”
“차마 그럴 수 없어서요. 날 잡아서 줘 패… 아니, 따지려고요.”
“그래요?”
썩어 가는 표정을 숨기지 못한 나는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맥주를 홀짝였다. 다른 놈이었으면 욕부터 날리고 봤을 선물에 가라앉았던 기분이 한결 나아진 걸 보니, 나도 중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X발,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말이에요. 진짜 이런 사람이 아닌데, 내가.
“뭐 궁금한 거나 고민되는 게 있으면 차라리 저한테 물어보세요. 연중 님한테 묻지 말고.”
“그럼… 여쭙고 싶은 게 하나 있었는데…….”
“뭔데요?”
한도윤이 유리잔을 매만지며 머뭇거렸다. 뭘 물어보려고 하길래 이렇게 뜸을 들여. 술도 안 마신 양반이 붉어진 낯으로 입을 달싹거렸다. 우물쭈물하는 그를 본 나는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
“아, 아니. 그냥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편할 때 말하세요.”
그 정도는 기다려 줄 수 있으니까.
“일단 먹죠. 배고프지 않아요?”
“네…. 맛있네요.”
아직 안 먹었잖아. 무슨 질문이길래 저렇게까지 고민하는 건지. 겉으로는 담담한 척 치킨을 집어 먹었지만, 답답하기 짝이 없어 속으로는 이마를 팍팍 내리쳤다. 이게 뭔 맛인지 모르겠네. 나는 쩝쩝거리며 치킨을 뜯는 와중에도 말수가 줄어들다 못해 사라진 한도윤을 힐끗 흘겨보았다. 이 상태로 버티다 보면 내 위장에 구멍이 뚫릴 거 같은데, 그냥 배 째라는 식으로 물어볼까.
“저….”
“저….”
하필 말이 겹쳤다. 타이밍 한번 거지 같네. 습관처럼 손톱을 매만지자 한도윤이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머, 먼저 말씀하세요!”
“예… 배려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렇다고 하니 내가 먼저 말할게요. 작게 심호흡을 하며 최대한 말을 고르고 골라 흘렸다.
“혹시 저랑 있는 거 불편해요?”
“예? 아뇨! 그럴 리가요!”
내 질문에 한도윤이 테이블을 내리치며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주변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리는 것을 느낀 내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자 그제야 제 실수를 깨달았는지 그가 머쓱해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니, 뭘 그렇게까지 반응하고 그래. 사람 민망하게.
“그런 거 아니에요. 만약 정말 형이 불편했으면 형을 찾아오지도 않았겠죠.”
“아까부터 말이 없어서 불편한가 싶었는데, 다행이네요.”
“그건… 그냥…….”
그는 여전히 어물어물하며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그래도 일단 불편하지 않다는 대답을 듣고 나니 마음이 한결 놓였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포크로 치킨을 찍어 입어 넣었다.
“그냥 제가… 형한테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못 보여 드린 거 같아서…….”
“이건 또 뭔 소리래.”
“아직도 존댓말 쓰시잖아요….”
그야 너랑 나랑 알고 지낸 지 기껏해야 한 달이니까요? 그동안 꽤 자주 만나고 얘기를 나눴다 한들 나보다 어리다는 이유 하나로 말 까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은지? 어처구니가 없어 치킨을 씹다가 입을 헤벌린 나는 입 안에 든 음식물을 꿀꺽 삼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부터 말 까면 되겠네.”
“네?”
“나한테 밥 먹고 다니라 하지 말고 너도 좀 먹어라. 덩치는 산만 한 게 왜 이렇게 깨작깨작 먹어? 좀 많이 먹어.”
딱 봐도 나보다 많이 먹을 것처럼 생겨서 사람 불편하게 깨작거리고 말이야. 맛없어도 맛있게 먹어야지, 그러면 쓰나. 한도윤의 앞 접시에 치킨을 올려놓으며 말하자 그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네! 그럴게요!”
“오냐.”
시시덕거리며 맛있게 치킨을 뜯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스무 살이 맞는구나 싶어졌다. 거, 맛있게도 먹네. 사람이 이렇게 단순해도 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