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어…?”
“왜.”
“아니, 너…. 너 도윤이 차단했어? 왜?”
“네가 알아서 뭐 하게.”
차단도 내 마음대로 못 하나? 문영윤의 질문을 짜증스럽게 넘긴 나는 곧바로 결투장 매칭을 넣었다. 마음 같아서는 패치노트의 주력 직업인 배틀 메이지만 찾아다니며 PK를 하고 싶었으나 하나하나 찾아다니기 귀찮아서 PVP 쪽으로 노선을 틀었다.
[WIN]
매칭되자마자 폭딜을 쏟아부으며 빠르게 전투를 끝냈다. 그리고 끝나자마자 새롭게 매칭을 돌리며 멈추지 않고 PVP를 진행했다. 연달아 빠른 승리를 쟁취했음에도 기분은 풀리지 않는다. 지나면 닉네임도 기억 못 할 유저들을 상대로 학살을 반복하며 생각을 비워 나갔다.
“후…….”
자,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 거야. 나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패치노트, 아니 한도윤이 나한테 개구라를 쳤어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 애초에 같이 게임하는 게임 친구에 불과한데 내가 쟤랑 무슨 사이라고 이렇게까지 신경을….
[LOSE]
…연승이 깨졌다. 손을 움직여야 했는데, 키보드를 두드려 스킬을 눌러야 했는데. 순간 그 당연한 사실이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결투장을 빠져나온 나는 어느새 내 앞에 캐릭터를 끌고 온 한도윤을 보며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차단을 했기 때문에 한도윤의 채팅 자체는 내 눈에 보이지 않았으나 무어라 얘기하고 싶어 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이런 씹…….”
아까 문영윤이 말했던 게 이런 거였나. 그게 개소리가 아니라 진짜였다고? 그럼 나는 남이 말해 줘도 눈치 못 챈 빡대가리가 되는 건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주먹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여기가 밖이 아니라 집 안이었으면 이마를 두들겼을 텐데.
“야, 너 왜 그래? 아까 먹은 술이 올라오냐?”
“…야, 나 집에 간다.”
“어? 갑자기? 왜?”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 넌 더 놀다 오든가.”
“어어, 야! 박정우! 잠깐만!”
컴퓨터를 끄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손등으로 얼굴을 가리며 피시방을 빠져나왔다. 뒤에서 문영윤이 나를 붙잡으려 했으나 도무지 녀석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다. 서둘러 거리로 나온 나는 열이 오르는 얼굴에 오만상을 찌푸리며 걸음을 빨리했다.
“진짜 미친, 이런 미친!”
미친 게 분명해. 미치지 않고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해.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앞을 보고 걸을 생각도 못 한 채 고개를 푹 숙이며 집으로 향했다. 중간중간 모르는 사람과 어깨가 부딪히며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으나 다행스럽게도 넘어지지는 않았다.
나와 어깨를 부딪친 이들이 욕지거리를 내뱉고는 마저 제 갈 길을 간다. 평소라면 미안하다는 한마디라도 했을 텐데, 안타깝게도 지금의 내게는 그럴 정신머리가 없었다. 그렇게 어영부영 집으로 돌아온 나는 멍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내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진짜 X발……. 왜냐고. 왜!”
한번 달아오른 얼굴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현관 앞에 쭈그려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으며 욕지거리를 쉼 없이 중얼거렸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멘탈이 털린 건 처음인 것 같다. 알타니아가 죽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뭐야.”
누군가에게 연락이 온 듯 미약한 진동을 뽐내는 핸드폰에 눈살을 찌푸리며 액정 화면을 확인했다. 그리고 후회했다. 괜히 봤어.
[한도윤: 형 제가 뭐 잘못했나요?]
[한도윤: 그 투명 형이 말하지 말라고 해서]
[한도윤: 진짜 별거 아니었어요]
[한도윤: 형 혹시 저 톡도 차단하셨나요?]
[한도윤: 제가 잘못했어요...]
[한도윤: 앞으로 안 그럴게요...]
내가 뭐 때문에 이러는 줄 알고 앞으로 안 그러겠대?
“몰라, X발. 나도 모른다고.”
쭈그려 앉은 채 바닥에 엎어진 나는 한쪽에 핸드폰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침대까지 갈 기력은 없었다. 원래 멘탈이 털렸을 때 가장 좋은 회복 방법은 잠자는 것이 아니겠는가. 고로 멘탈이 털릴 대로 털려 버린 나는 지금부터 내일 아침까지 잠들 생각이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애써 다른 생각을 하며 잠을 청했다.
당연하겠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은 채, 어서 빨리 잠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양이라도 세야 잘 수 있으려나. 아니면 잠에 빨리 드는 방법 같은 게 있나. 그렇게 현관 앞에 잔뜩 웅크린 채로 누워 시간만 때우길 수십 분.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어? 뭐, 뭐라고?”
슬쩍 실눈을 뜨며 핸드폰을 확인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야.
[한도윤: 저번에 뵈었던 카페 도착했어요]
[한도윤: 그...]
[한도윤: ‘! 삭제된 메시지입니다.’]
왜? 왜 갑자기? 설마 게임에서 차단 먹었다고 근처까지 달려온 거야? 나만 미친 게 아니라 얘도 어지간히 미쳤는갑네! 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은 뒤 현관문을 박차고 나갔다.
“차단이 뭐라고! 나중에 얘기하면 되는 걸 굳이 또! 굳이!”
한도윤이 근처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한들, 연락까지 보냈는데 더 기다리게 하기는 싫었다. 그 때문에 평소라면 느긋하게 걸어갔을 거리를 온 힘을 다해 뜀박질했다. 오랜만에 하는 달리기라 그런지 오래 뛰지 않았음에도 숨이 턱하고 막힌다.
“다 돌아 버린 게, 허억…. 분명, 해…….”
세상도 미치고 나도 미치고 우리 모두 미치지 않은 이상 이런 짓을 할 리가 없어! 아니면 차라리 도착하기 10분 전에 말이라도 해 주든가! 그럼 금방 가겠다고 연락이라도 하고 천천히 걸어갔을 텐데!
중간중간 뜀박질을 멈추며 숨을 고른 뒤 다시 뛰기를 반복. 그렇게 평소보다… 썩 빠르진 않은 시간 내에 카페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도 뛰었더니 숨이 막히다 못해 덥기까지 하다. 티셔츠 목 부분을 흔들며 땀을 식힌 나는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주변부터 확인했다.
현재 시각은 오후 9시 40분 정도. 곧 있으면 카페도 문을 닫을 시간이었다. 턱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닦으며 고개를 돌리자 한도윤으로 추정되는 뒷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혼자 유독 눈에 띄게 훤칠한 남정네 하나가 두꺼운 패딩을 입고 있었다.
‘패딩 입고 다녀요. 이 날씨에 코트만 입으면 얼어 죽어요.’
‘네, 네! 다음부터는 패딩 입고 올게요!’
설마, 내가 그때 저렇게 말해서 진짜 패딩을 입고 온 건가? 뜀박질을 하도 해서 힘차게 뛰고 있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발소리를 들었는지 그의 고개가 뒤로 꺾이고, 얼굴을 확인한 순간 나는 허탈함에 어깨에 힘을 쭉 뺐다.
“아, 형. 진짜 오실 줄은 몰랐는데…….”
한도윤이 평소보다 창백해 보이는 안색을 하며 천천히 내게 다가온다. 노빠꾸로 달려와 놓고 내 눈치를 보는지 머뭇거리는 그의 모습에 헛웃음을 흘렸다. 결국, 문영윤 말이 옳았다.
‘무자각이 이래서 X같다는 건가?’
‘너 한도윤 좋아하지?’
‘언제쯤 네가 네 마음을 이해하려나.’
양손에 얼굴을 묻으며 문영윤의 말에 긍정했다. 나는 왜 저걸 개소리로만 치부했을까. 그러지 말걸. 그냥 납득할걸. 녀석이 한 말을 듣고 진작 눈치챘더라면 마음의 준비라도 했을 텐데.
“빡대가리 새끼….”
욕을 처먹어도 할 말이 없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한도윤과 시선을 마주한 나는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웃으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울상이 지어진다.
“거, 차단이 뭐라고 이 시간에 여기까지…. 멀잖아요.”
“…그냥, 형 보고 싶어서요.”
네가 그러니까 자꾸 헷갈리잖아.
13. 눈물
(1)
카페가 문을 닫을 시간이 다 되어 한도윤을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아까까지만 해도 달리느라 후덥지근하게 느껴졌던 공기가 갑작스럽게 차가워졌다. 아직 몸에서 열이 다 빠져나가지 못해 온도 차이가 더 크게 느껴지는 것 같다.
“일단… 대화가 필요해 보이니까 어디 가게에 들어가죠.”
“네, 네!”
한 차례 힐끗 한도윤을 흘겨본 나는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호프집에 들어갔다. 문영윤과 갔던 호프집과는 다른 곳이었다.
“뭐 먹을래요?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저는 아무거나 괜찮아요!”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주문이네요.”
뭘 골라야 하나.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메뉴판을 노려보았다. 나야 막입이라 아무거나 잘 먹어서 더욱 뭘 골라야 할지 모르겠다. 요즘 애들은 뭘 좋아하지? 기껏해야 5살 차이라고는 하나 나는 내 또래 애들이 뭘 좋아하는지도 잘 모르는 아싸 새끼라서 고민이 끊이지를 않는다.
한참을 메뉴판과 씨름한 나는 결국 그나마 호불호가 덜한 치킨과 감바스를 고른 뒤 음료로는 맥주와 콜라를 주문했다. 그에 한도윤이 조금 시무룩한 표정으로 힐끗, 내 눈치를 보았다. 눈치 보지 말고 말을 해. 뭐가 불만이야.
“왜 그렇게 봐요?”
“아뇨, 그냥…. 저도 맥주, 마시고 싶어서요….”
“…안 돼요. 술도 못하는 사람이 왜 술을 마시려고 그래요. 그러다가 뼈 삭아요.”
콜라도 뼈가 삭긴 하지만 그래도 술보다는 낫겠지. 무엇보다 압도적 알쓰한테 술을 먹이고 싶지 않았다. 한도윤도 술 좀 들어갔다 하면 미쳐 날뛰는 놈이라, 감당하기 힘들다.
“차단당한 것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 맞죠?”
“그… 네.”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한도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보통 이렇게까지 신경 쓰던가.
“말이 그렇다는 거지 진짜로 내내 차단하고 있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정말요?”
“제가 어지간히도 쪼잔해 보였나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