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냐 내 최애를 죽인 게 (65)화 (65/88)

#65

“뭐, 사람이 착하긴 하지.”

“아니 그런 식으로 말고! 연애 감정으로!”

“예? 뭐요?”

소주랑 병맥을 시킬까 말까 고민하는 도중 훅 하고 들어온 얼토당토않은 소리에 헛웃음을 흘렸다. 이건 또 참신한 개소리일세.

“돌았냐?”

“아니. 나 진심인데. 너 얘 좋아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자꾸 신경 쓰이고 그러는 거지!”

“네가 술 먹으면 개가 되는 놈이라는 건 뼈저리게 알고 있다만, 아직 개가 될 정도로 마시지도 않았는데 개소리를 하는 건 좀 아니지 않냐?”

나 지금 진지하다. 육성이라 티는 안 나도 궁서체임.

“뭐래. 이쪽도 너한테 관심 있는 거 같은데? 솔직히 관심 없으면 누가 이렇게까지 챙겨 주냐? 게임 할 때도 많이 챙겨 줬다며. 그냥 한번 찔러보기라도 하지? 아니면 내가 해 줘?”

“아니, 그니까 이게 무슨 개소리냐고. 너 술 먹고 나와서 또 마시는 거냐?”

아닌데. 그렇다고 치기엔 너무 맨정신으로 보이는데. 심각하게 녀석의 정신 건강을 걱정하는 와중에도 녀석은 본인의 뇌피셜이 마치 공식인 듯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내 핸드폰을 가져가 잠금을 풀어 달라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내가 한번 찔러봐 줄게! 그러니까 잠금 좀 풀어 봐!”

“왜죠?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죠?”

“원래 남의 연애가 제일 재밌는 법!”

“개소리가 낭낭하네? 낭낭해서 돌아 버리겠네?”

투명이 뇌가 또 투명한 짓 하죠? 내가 미쳤다고 잠금을 풀어 주겠냐?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해야 하는 부분 아닌지? 열심히 아가리를 털며 녀석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참으로 단순하기 짝이 없는 친구인지라 내 현란한 시비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네 핸드폰 던져 버린다?”

“깽값 받아야 쓰겠네. 이왕 던지는 김에 최신 폰으로 바꿔 주라.”

“미친놈 아냐, 이거?!”

나는 뒷목을 붙잡으며 뒤로 넘어가려는 녀석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러니까 적당히 해.”

나직이 혀를 차며 단호하게 끊은 뒤 마저 맥주를 마셨다. 네가 주먹으로나 나를 이기지 주둥이로는 못 이긴다고.

“쳇, 연애는 남의 연애가 재밌는 법인데.”

“너나 연애하고 얘기하세요.”

누구 하나 연애 중이라는 소리 듣자마자 죽창부터 찾던 놈이 할 말은 아니지 않냐. 여친이랑 데이트하니까 술 먹으러 못 나온다는 소리에 죽창, 비밀 연애 하다 걸린 동기 놈한테도 죽창. 이쯤 되면 남의 연애가 아니라 죽창으로 찌르는 게 재밌어서 이러는 거 아닐까.

(4)

“그러고 보니 도윤이랑 제대로 게임해 본 적이 없네. 나중에 같이 던전이나 돌자. 게임을 얼마나 잘하는지 좀 보게.”

“관짝 광전사한테 발리는 듀블보단 훨씬 잘하지.”

“이 새끼가 갑자기 뼈를 때리네?”

“뭐, 듀블 잘하는 방법이라도 물어봐 줄까?”

“…진짜?”

욱해도 어쩔 수 없다. 문영윤의 컨트롤이 과하게 쓰레기인 건 아니지만 플레이 시간 대비 컨트롤이 후달리는 건은 맞았다. 잘하는 듀얼 블레이드의 경우 압도적인 공속과 연계기로 광전사가 뭔가를 할 틈도 주지 않으니까.

“아, 이것도 괜찮겠네. 이번에 길드전을 필드쟁에서 공성전으로 패치한다고 했잖아. 새 패치를 얼마나 잘했는지 확인 좀 할 겸, 겸사겸사 날 잡아서 친선 경기 하는 건 어때?”

“괜찮겠어?”

“왜? 안 될 거 뭐 있어. 너에 대한 것도 다른 길드원들한테 최대한 좋게 말해 놨으니까 걱정 마.”

그 뜻이 아닌데. 내가 PK를 하고 돌아다닌 건 맞으니 그걸로 뭐라 할 생각은 요만큼도 없다. 문제가 있다면 다른 쪽이 아닐까.

“한도윤 씨가 패치노트라고 했잖아.”

“엉? 그게 왜?”

“예전에 너희가 나 잡겠다고 지랄했을 때, 패치노트 광역기에 죄다 쓸려 나갔던 거 기억 안 나?”

시일이 꽤 지난 지금까지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장면이지. 3분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정말 그 시간 안에 전부 죽여서 한동안 홀리스터 길드를 3분 카레 길드라 부르며 놀려 댔었다. 그 사실을 이제야 기억해 낸 문영윤이 짜게 식은 표정을 그렸다.

“…아, 그게 그 양반이었냐.”

문영윤의 썩은 낯짝을 보니 속이 뻥 뚫린 것처럼 시원해졌다. 이런 기분 오랜만이야. 그동안 내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만 일어나서 속 답답했는데.

“일단 베타 누나한테 물어본다? 친선전.”

“그래, 그래. 나도 우리 길마한테 물어봄!”

나와 문영윤은 핸드폰을 꺼내 각자의 길드 마스터에게 연락을 보냈다. 단톡보다는 갠톡으로 연락하는 쪽이 낫겠지? 다른 길드원들에게는 베타 누나랑 얘기가 잘된 이후에나 물어보면 될 거고.

[홀리스터에서 친선 길드전 하자는데 혹시 생각 있어?]

[임효린: 엥? 갑분 홀리스터???]

[임효린: 너 걔네랑 사이 안 좋지 않았어?]

[투명이 내 실친이랬잖아]

[걔가 친선전하지 않겠냐고 그러더라고]

[임효린: 아 맞다 까먹었네]

[임효린: 일단 다른 길드원들 동의도 좀 구해야할듯!]

[임효린: 단톡에 얘기해볼게!]

내 이야기를 들은 베타 누나는 곧바로 단톡방에 친선 길드전에 대해 이야기했고, 단톡방을 확인한 길드원들 사이에서 하나둘 동의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특히 아가리 길드와 있었던 쟁에 참여하지 못한 길드원들이 새로이 단장될 공성전에 강렬한 참여 의사를 보였다.

[이세영: 아따 쟁하고 싶었는데 잘됐네유!]

[이세영: 칼을 갈아놓고 있겠습니다!!]

[김현호: 님 법사잖아요.]

[이세영: 법사는 칼도 못 가남?ㅎㅎ]

“야, 우리 길드에서는 다들 동의하는데, 너희는?”

“우리도 대부분 환영하는 분위기야. 이 김에 너한테 갚아 주려는 애들도 있고….”

문영윤이 곁눈질을 하며 내 눈치를 본다. 뒷말이 조금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자식이, 안 그렇게 생긴 주제에 은근 눈치 본다니까.

“뭐… 감정 상한다든가, 그렇지는 않지?”

“내가 너냐.”

이게 다 내가 PK를 너무 잘한 탓이지, 뭐. 어깨를 으쓱이며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쉰 문영윤이 잔을 들어 올리며 마저 술자리를 즐기자고 소리쳤다. 곧죽을놈이 나인 걸 알게 된 후부터 이전에 일어났던 트러블 때문에 여러모로 마음고생이 심했던 모양이다. 문영윤 체면도 있으니까 앞으로 홀리스터 애들한테 잘해 줘야겠네.

그렇게 문영윤과 본격적으로 술을 퍼먹기 시작한 지 어언 2시간이 지났다. 안줏거리는 당연하게도 게임 얘기였다. 먹기 편하라고 순살로 시킨 치킨에는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채 노가리나 열심히 까며 술을 마셨다. 나는 빈 잔에 소주와 맥주를 원하는 비율로 따른 뒤 숟가락으로 잔의 바닥을 내리쳤다.

“야, 나도 한 잔만! 나도 소맥 먹을래!”

“미쳤습니까, 휴먼? 뒤지기 싫으면 그냥 맥주만 드세요. 아니, 음료수 드세요. 여기 청포도에이드 맛있다.”

“시져, 시져. 영윤이는 소맥 묵을꼬얌.”

“아, 나 토하러 화장실 좀.”

진짜 토 나오려 그래. 제대로 헛구역질하며 역겨움을 나타내자 문영윤이 너무 익숙한 지랄이라 더 이상 타격이 없다는 듯 썩소를 지으며 맥주잔을 내밀었다.

“어디 해 봐. 토해 봐.”

“맥주잔으로 내 머리 깨려고? 잔은 멀쩡해도 내 머리는 안 멀쩡할 거 같은데.”

“이잉, 영윤이는 폭력적인 고 시로, 시로.”

“집 나간 문영놈 혓바닥을 찾습니다. 신고 포상금 10원.”

“저렴한 축에도 못 드네. 내 혀에 그 정도 가치밖에 없어?”

“마음은 1원인데, 생각해 보니 골동품으로 팔면 1원 동전이 1원보다 더 비싸다더라. 그러니까 딱 제값인 10원인 거로.”

문영윤이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며 잔을 내밀어 내 잔과 가볍게 부딪쳤다.

“너무하네! 내가 내 마음대로 술도 못 먹냐?”

“너 술찐이라 뒤처리를 내가 해야 하잖아, 개새끼야.”

“친구끼리 그 정도도 못 해 줘!?”

“한두 번이 아니니까 이러는 거지!”

순간 너무 욱한 탓일까, 아니면 그동안 겪었던 문영윤의 개진상 짓이 떠올랐기 때문일까. 나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영윤의 머리통을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빡! 큰 소리에 문영윤이 충격받은 표정을 지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너… 밥은 잘 먹고 다니니…?”

“아, 진짜 망할 놈.”

“어쩜… 이렇게 힘이 없을 수가……! 살면서 이런 솜방망이는 처음 봐. 우리 사촌 조카가 더 힘셀 듯.”

이게 참 뭐랄까. 저 새끼가 멕이려고 저런 소리를 한 거면 득달같이 달려들었을 텐데, 표정이 과히 진심이라 말문이 막힌다. 내가 그렇게 힘이 없나? 내 근력이 그렇게 안쓰러울 정도인가?

“나 운동하는 거나 같이 할래?”

“…무슨 운동 하는데.”

“킥복싱!”

“안 해.”

사람 패는 운동은 좀. 차라리 헬스장을 다니지. 그러고 보니, 막 성인이 되었을 때 체력도 기를 겸 헬스장에 등록한 적이 있었다. 한두 번 가고 안 나가서 돈만 버리는 꼴이 됐었지…. 그렇지만 너무 귀찮았는걸. 나도 참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구나 싶어 말없이 술을 홀짝였다.

“쳇, 그럼 술 여기까지만 마시고 피시방 가서 같이 프리지아 하자. 겜창이 이걸 거절하진 않겠지!”

“너 심심했냐?”

“우웅, 영윤이는 정우랑 놀 때 제일 즐거워욤!”

“진짜 X발….”

이 새끼 왜 이러는지 누가 설명 좀. 헛구역질하는 시늉을 하며 남은 술을 모두 해치운 뒤 계산을 마치고 피시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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