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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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피곤에 쩔어 버린 상태로 몸을 일으켰다. 꽤 오랜 시간 잔 것 같은데도 피곤함이 영 사라지지를 않았다. 오늘은 게임 하지 말까…. 컴퓨터까지 가는 것도 귀찮아…. 길게 하품을 하며 꾸물꾸물 이불을 덮어썼다.
평소라면 핸드폰을 꺼내 시간이라도 확인했을 텐데, 그것조차 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누군가에게 연락이 왔을까 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애써 머릿속을 비우기 위해 두 눈을 감은 채 이불 안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꼬르륵-. 기분이 별로인데도 배는 고프네. 뭘 먹긴 해야 하나. 빼꼼, 이불 밖으로 머리를 꺼낸 나는 길게 한숨을 내뱉으며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전원 버튼을 눌러 액정 화면을 키자 톡 알람이 제일 먼저 보였다.
“확인해야 하나….”
뭐 중요한 얘기가 왔을 수도 있잖아. 못 봐서 나중에 문제가 생길 바에는 지금이라도 보는 게…. 스스로가 참 못났다는 느낌에 헛기침을 흘렸다. 뭘 또 이런 거로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냐. 내 핸드폰 내가 못 보겠다고 난리네.
미간을 살짝 구기며 톡 창을 확인했다. 그러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한도윤이 보낸 개인 톡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무슨 일 있냐며 걱정스럽게 개인 톡을 보냈는데 왜 이 사람이 보낸 연락을 우선으로 확인하는 건지 스스로 이해가 안 된다.
[한도윤: 형]
[한도윤: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죠?]
[한도윤: 급하게 나가시는 것 같은데 많이 바쁘셨나요?]
[한도윤: 형? 주무세요??]
[한도윤: 제가 도와드릴 게 있으면 뭐든 괜찮으니까 꼭 말씀해주세요]
“그러니까 왜 그렇게 도와주려고 하냐고…….”
같은 게임을 즐기는 게임 친구에게 하는 행동이라 보기에는 과하지 않은가? 이제는 습관이나 다름없는 한숨을 푹 내쉬며 침대에서 완전히 벗어난 나는 그길로 밖에 나갔다. 방을 나갔다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밖. 겉옷을 챙겨 입고 집 밖으로 나갔다.
서늘한 공기를 맞고 나니 가라앉아 있던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역시 단기간에 여러 일이 생겨 스트레스가 쌓였다 보니 그랬던 것 같다. 주머니 속의 핸드폰을 매만지며 고민에 빠졌다. 이 신경에 거슬리는 답답함을 어떻게든 해소하고 싶다.
-뭐여? 웬일로 전화를 다 한디야?
“너 지금 시간 되냐?”
-남는 게 시간이죠?
“그럼… 밖에 나와. 나랑 같이 술 먹자.”
-예? 진짜 웬일이야? 야야, 기다려 봐. 금방 준비하고 나감!
치맥 뜯으러 자주 가던 가게에서 만나자는 말을 남긴 뒤 전화를 끊은 나는 그길로 정처 없이 걸었다. 방금 나와 전화를 한 이는 문영윤이었다. 속에 담아 둔 말을 꺼낼 만한 사람이 이 녀석밖에 없다.
베타 누나나 다른 길드원들 같은 경우는…. 사람들은 참 좋은 사람들이다.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러나 인터넷에서나 알고 지내는 사람들에게, 게임을 그만두면 더는 볼 일 없는 사람들에게 진지한 얘기를 꺼내기 조금 그랬다. 솔직히 따지고 보면 별것도 아닌 일이잖아.
“진짜 거지 같네…….”
25년… 아니, 이제는 26년이지. 아무튼 그동안 겪어 보지 못한 느낌이었기에 혼란스러운 것이다. 분명 그럴 거다. 그러니, 오늘 문영윤과 대화를 나누며 요 며칠 신경 거슬리게 하는 이 기분이 무엇인지 어떻게든 알아냈으면 좋겠다.
“야, 많이 기다렸냐? 안에서 기다리지 왜 밖에서 덜덜 떨고 있어?”
“뭐래.”
지도 코끝이 시뻘거면서. 문영윤은 내 등을 가볍게 두들기며 곧바로 가게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그 뒤를 따라가면서 어떻게 포문을 열어야 할지 머릿속으로 쉼 없이 고민했다. …어떻게 말해도 이상하게 느껴지는데? 이거 나만 그래?
“그래서, 무슨 일이야? 요즘 너 술 많이 마신다?”
“그건 그렇지. 요즘 들어 술이 땡기더라.”
“우리가 아직 젊어서 그렇지, 여기서 나이 좀 들면 뼈 삭는다.”
“아, 그래? 그래서 너는 안 드시겠다고요?”
“아뇨. 마실 건데요?”
시시덕거리며 빠른 속도로 주문을 마친 녀석이 치킨보다 먼저 나온 맥주를 원샷 때렸다. 저거 500cc 생맥인데, 목 안 따갑냐?
“우리 정우 씨, 딱 봐도 영윤이한테 할 말이 있구나? 질질 끌지 말고 얼렁 말해 봐라! 이 형님이 다아-들어 줄게!”
“하…. 그래…. 그래야지.”
문영윤의 말에 나는 방금 문영윤이 했듯이 생맥 원샷을 때리고 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어떻게 말을 해야 곱게 풀릴지 모르겠단 말이야. 그래서 더 고민인 거라고.
“내가 말이야… 그……. 요즘 좀 신경 쓰이는 사람이 있는 거 같거든?”
“예?”
“근데 좀 빡치는 거 같기도 하단 말이야.”
“예…?”
“너도 엔간한 술찐이지만 그 사람은 더 술찐이거든. 그래서 술 마실 때마다 사람을 참 빡치게 만들어. 근데 또 사람이 원체 둔하고 순해서 좀 챙겨 줘야 할 거 같단 말이지.”
주정은 개지랄인데 악의가 없거든. 아직 어려서 술 먹을 일이 별로 없었을 테니 봐주는 거지,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진짜 땅바닥에 버리고 갔을 거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스스로의 말에 긍정하던 나는 점점 미묘해지는 문영윤의 표정에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리고는 뭐가 또 그리고야. 아, 같이 게임을 하는데 이 사람이 게임을 되게 잘해. 나도 웬만한 고인물들 씹어 먹지만, 그 사람은 못 이기겠더라. 그렇게 게임 잘하는 사람은 처음 봤어.”
“그래서?”
“아까 사람이 순하다고 했잖아. 애가 좀 착해서 그런지 이것저것 많이 도와줘서 고맙더라고. 약간 마음의 빚이 좀 있다고 해야 하나.”
아, 설마 그걸 못 갚아서 그렇게 답답했던 건가? 두 눈이 번뜩 뜨였다. 그래, 그러네! 그동안 마음의 빚을 차곡차곡 쌓고 있었는데 그걸 못 갚아서 패치노트를 볼 때마다 속이 답답하고 쓰리고 그랬던 거였어! 난 또 뭔 일이라고.
몇 번을 되새김해 봐도 딱 맞아떨어지는 상황에 광명이 비치는 것만 같다. 솔직히 처음에는 신세 한탄이나 할 겸 문영윤을 불렀던 거였는데, 다시 생각해도 잘 불렀다. 이렇게 한 방에 해결할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어.
“야, 마음의 빚을 갚고 싶은데 어떻게 갚아야 잘 갚았다고 소문이 날까? 겜잘알이라 게임으로 도와줄 건 따로 없을 거 같고. 게임머니도 나보다 많던데…. 그렇다고 현금 주는 건 좀 에바잖아.”
“…이 새끼 진짜 또라인가?”
“뭐래. 갑자기 왜 시비야?”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왜 그러냐는 시선을 보내자 문영윤이 어이없어 미치겠다는 듯이 제 이마를 팍팍 내리쳤다. 또라이는 내가 아니라 너 같다만?
“야! 딱 봐도 관심 있는 거잖아!”
“관심이야 있지. 게임에 현질을 대체 얼마나 했는지에 대한 관심은 있어.”
“아니, 아니! 아오! 그게 아니고 다른 관심!”
“게임을 어떻게 그렇게 잘하는지?”
“미친놈아!”
문영윤이 테이블을 탕, 하고 내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야, 이 새끼 이제 겨우 생맥 한 잔 마셨는데 벌써 취했나 봐. 너 이렇게까지 술찐이었니? 미친놈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문영윤을 흘기던 나는 이어지는 녀석의 말에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거 도윤이지? 저번에 같이 술 먹었던.”
“어떻게 알았지?”
“네가 아는 술찐이 걔 말고 더 있겠냐?”
너 있잖아, 너. 너도 술찐이면서 누구한테 술찐이래? 썩어 가는 내 낯빛에 문영윤이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 다시 앉고는 내 쪽으로 얼굴을 바짝 들이민 뒤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여 왔다. 가까이 오지 마라. 숨결 느껴져서 기분 더럽다.
“나 그런 데에 편견 없어.”
“아까부터 왜 자꾸 개소리야.”
“너 도윤이한테 관심 있잖아. 아, 맞다. 뭐 특별하게 느껴지는 언행 같은 건 없어? 둘이 잘 될 확률이 있는지 좀 봐야겠는데?”
“뭔 인간관계에서 확률을 찾아? 랜덤 키트냐?”
“특별한 말 같은 거 없었냐니까! 질문에 답부터 해!”
특별한 말?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곰곰이 생각해 봤다. 패치노트가 특별하게 했던 말이라. 딱히 그런 건 없었는데.
“모르겠는데?”
“그럼 그냥 일상에서 했던 말은? 너 많이 도와줬다며. 그때마다 했던 말 같은 거 없어?”
“평범했는데?”
“아니, X발! 이래서 연알못이란!”
“연알못이 뭔데, 등신아.”
이 새끼가 주둥아리에서 튀어나온다고 말이 다 같은 말인 줄 아나. 입을 열기 전에 진작 끝장냈던 생맥주를 재주문한 뒤, 남들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바락바락 소리 지르는 문영윤의 대가리를 냅다 후려쳤다. 쪽팔리니까 목소리 좀 줄여라. 진짜 모르는 사람이고 싶네.
“아, 왜 때려!”
“네가 맞을 짓을 하니까 때리지. 아가리 좀 싸물고 조용조용 얘기하자, 좀.”
“쳇…. 그 사람이랑 갠톡은 하지? 그거라도 좀 보여 줘.”
“갠톡을 왜 남한테 보여 줘? 사생활 침해야, 이 새끼야!”
“아, 보여 줘! 보여 줘! 내가 그거 보고 각인지 아닌지 따아아악! 확인해 줄게!”
그러니까 뭔 각이요. 아까부터 이 새끼랑 내가 하는 말이 좀 안 맞는 거 같다? 진저리를 치며 거절했으나 내 멱살까지 잡으며 매달리는 문영윤의 모습에 쪽팔려서 개인 톡을 보여 줬다. 맥주를 가져오던 알바생의 짜게 식은 눈빛이란…. 상처였다. 저 새끼가 또라이인 거지 내가 또라이인 건 아닌데.
내게서 핸드폰을 강탈해 간 문영윤은 두 눈이 빠질 듯 가까운 거리에서 개인 톡 내용을 훑었다. 저러다 눈 나빠지겠네. 감상하듯이 읽어 내려가던 녀석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내게 핸드폰을 돌려주며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 아직 안 사귀는 거지?”
“뭐래.”
“이래서 무자각이 X같다는 건가?”
이 정도면 사귈 때가 됐는데. 무어라 중얼거리는 문영윤을 곁눈질로 흘기며 생맥 잔을 들어 올렸다. 뭐라고 지껄이는 건지 뇌에서 이해를 못 하겠으니까 나는 술이나 마시련다. 그나저나 맥주만 먹으려고 하니 속만 더부룩하네. 소주를 시켜야 하나. 저 새끼 소맥 말아 먹으면 뒈져 버릴 텐데.
“너 한도윤 좋아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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